꽃이 떨어져도 희망은 있다

2021. 4. 11. 18:23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사40:6~8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3~25

 

화사했던 벚꽃들이 다 사라졌다. 한두 번의 봄비와 그 사이 불어 온 바람들에 다 흩날리고 만 것이다. 정말 짧디 짧은 한 생이었다. 그런데 길고 긴 지구 나이에서, 또 넓디넓은 우주 공간에서 볼 때, 오늘 우리들 삶은 또 얼마나 찰나적이고 제한적인가! 짧은 인생, 어떻게 사는 것이 정말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일까? 성경 인물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아갈 희망을 보았고 그 희망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라 전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예언자들은 나라가 망하는 시대에 들불처럼 일어나 활동했다. 그 참혹한 전쟁의 참혹함에서, 살육과 굶주림, 절망...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희망을 말하다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고 예언자들은 선포하였다. 회개하면 희망이 있다고. 외세 침략으로 고통스러운 이 현실은 야훼가 그 대국 군대를 사용해서 우리를 채찍 하는 것이라 해석하였다. 바아흐로 야훼가 이스라엘만의 신이 아니라 주변국, 세계를 다스리는 신이라는 믿음의 전환이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결과는 이스라엘에게 희망이었다. 하지만 근동 제국들에 의해 이스라엘이 망하고 수백 년 흐르면서 상황은 더 비관적으로 흘렀다. 예언자들의 희망도 더는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그러자 묵시 문학가들이 등장하여 그 희망을 계승하였다. 스가랴, 다니엘, 에스겔 등 이런 묵시문학들은 종말을 기대하였다. 세계의 종말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같은 작은 나라를 억압하고 수탈했던 제국의 종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어질 새 하늘과 새 땅, 새 인간을 기대하게 하였다.

 

뒷날 오신 예수는 이 묵시 문학가들의 희망을 이어갔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었다. 예언과 묵시 문학의 희망에는 언제나 민족과 국가, 시온의 회복이 중심에 있었으나 예수는 국가와 민족의 회복을 넘어 항상 하나님 나라가 있었다. 그 나라의 주인공은 그가 살았고 활동했던 갈릴리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하늘나라의 주인이라 강조하였다. 예수는 국가와 민족의 실체를 소박한 개개인으로 보았던 것이다. 국가와 민족의 실체는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땀 흘리는 노동으로 국가와 민족을 먹여 살리는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그런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포하였다.

 

늘 우리의 희망은?

 

힘들면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의 좋았던 시절을 그리워한다. 마치 광야 고생길에서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의 고깃 가마를 그리워했던 것처럼. 하지만 그런 마음으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가 없다. 출애굽 해방을 체험하고도 히브리인들이 광야 40년의 훈련기간을 필요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새로운 땅 가나안에는 이전과 다른 각오와 규정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예언자들은 권력자들을 향해 정의가 강물같이 흐르게 하라고 했고 예수도 신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했다. 성서는 한결같이 돈과 명예, 저급한 탐욕이 인생의 주인이 되지 않도록 하라고 경계해왔다. 희망이 잘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정신적 고양이나 수련에 있을까? 그렇게 가르치는 종교들도 있다. 하지만 성서는 물질 풍요에만 아니라 정신적 고양에도 희망을 두지 않는다.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적 대립을 말하지 않는 것이다.

 

성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희망을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존경과 지지가 있다면 그 공동체는 살만하고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예수의 천국 운동도 사람들 사이에서 하신 일이었다. 길가 돌멩이 같은 사람들을 일으켰고 그들을 가리켜 신의 자녀라고 하셨다. 하여 그들 사이에 원수 된 것을 풀고 이웃이 돼라 하셨다. 모두가 겪는 불행에 대해 서로를 비난하지 말고 서로 봐주어야 파괴된 공동체를 회복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나는 새, 아궁이로 들어갈 들꽃까지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니 그런 것들이 솔로몬의 옷보다 더 아름답다 하셨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무엇이 기쁨인가? 복수하고 대결하여 결국 이길 것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승자가 되지 못해도 당신들처럼, 들풀처럼, 참새처럼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예수는 말했다. 그런 사람들의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긍정해 주신 것이다.

 

희망은 함께 사는 것

 

처음 제자들의 삶에는 예수가 함께 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아픈 사람들을 치유하며 함께 이상을 꿈꾸었다. 꿈을 꾸는 동안 그들은 정말 행복했었다. 희망을 갖는 데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삶이다. 사람들이 불행을 느끼는 것은 가난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가난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하여 예수는 지금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고 선언을 하셨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 될 것이기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가난은 서로를 필요로 하게 만들고 피차 협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오늘날 우리의 위기 원인은 무엇이고 어떻게 희망을 찾을까? 가난도 행복이라 축복하신 예수의 역설에서 그 명확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지금 세계가 겪는 바이러스 팬데믹은 인류 역사에서 낯선 경험이 아니다. 중세의 역병과 다른 게 있다면 그 범위가 전 지구적이라는 점인데 이는 오늘 인류의 삶이 전 지구적이기 때문이다. 자본이 세계화되었고 생산과 물류와 소비가 세계 단일 시장이 되어버렸다. 이 과정에서 이윤과 성장을 추구하는 무절제한 탐욕이 세상을 압도하니 지금 같은 파국이 전개되었다. 이 응급상황에서 치료와 백신 같은 방책도 시급하나 이 위기 경험에서 진지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빨리 코로나를 극복하고 이전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이전 삶의 방식 그대로 다시 산다면 어떻게 될까? 어쩌면 지금보다 더 크고 치명적인 재앙이 닥쳐 올 수도 있다. 무한 경쟁과 소비적 삶에 매몰되어 온갖 쓰레기를 양산해 온 우리들의 그간 삶이 정말 잘 산 것이었을까?

 


성서는 시종일관 우리에게 탐욕을 멀리하라고 말하고 있다. 소박한 삶과 공생 윤리로 살라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욕망을 줄이지 않는 한 희망은 없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생활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고자 하는 한 희망은 없다는 말이다. 성서의 인간들은 물질적 행복과 성공 추구를 삶의 희망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물질적 삶에 덧없음을 깨닫고 그 물질에 매이지 않으며 검소하고 소박하게, 겸손하게 살 것을 말해왔다. 이사야가 말했었고 그 말을 베드로도 상기시켰다. 모든 것이 헛되고 근원적 새로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에서 현존하는 모든 것이 위기에 놓인 오늘날, 믿음은 어떻게 유지되며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장자는 세상의 삶을 한 바탕 꿈이라고 했고 죽음은 실제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라 했다. 플라톤도 보이는 세계는 그림자에 지나지 않으니 보이지 않는 이데아만이 참 실재라 했다. 그러나 기독교는 현실을 꿈이나 그림자로 보지 않는다. 세상 삶도 진지한 현실이요 소중한 경험들이다. 다만 이 삶의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큰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먼 지금 삶에서 영생을 경험할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신을 사랑하기에 세상의 지배적인 논리를 거슬러 살 수도 있는 것이다. 그 가치가 사랑이고 믿음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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