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21. 23:43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코로나 방역 기간에도 부득이 누군가를 만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다. 하여 조심스레 만났음에도 만났던 그 사람 동선이 확진자 동선이 겹쳤다는 소리를 들으면 불안을 떨칠 수가 없는 게 우리 인간이다. 어쩌면 불안은 우리 인간들의 버릇이고 숙명인 것 같다. 그렇다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지레 낙심하거나 절망은 금물이다. 설령 최악의 경우가 닥친들 바닥짐이라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극복할 수 있다. 배의 무게 중심이 아래로 유지되도록 하는 바닥짐, 중심이 항상 아래로 향하도록 물이나 화물로 바닥을 채웠기에 파도나 풍랑에도 배는 전복되지 않는다. 그 바닥짐처럼, 험한 파도와 같은 삶에서 믿음은 우리 인생의 바닥짐인 것이다.
혼돈스런 현실
요한복음16:19-24에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은 뜻밖의 말을 듣는 내용이 나온다. <너희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신할 것이다> '<베드로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모두 어둡고 음울한 말이었다. 메시야적 통치를 기대하며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제자들에게 찬 물을 끼얹는 말들이었다. 더구나 <나는 지금 나를 보내신 분에게로 간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볼 것>이라는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은 말들까지 하였다. 예수와 동행하던 제자들은 일순간 혼돈에 빠져들었다.
이해란 경험을 전제하는데 예수의 그런 말들은 제자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말들이었다. 인간은 경험치 않은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경험치 못한 일을 맞닥뜨리면그저 직면하여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을 뿐이다. 종교 체험, 혹은 신앙적 체험은 우리 일상 삶에 균열을 야기한다. 그리고는 우리의 합리적 지각을 깨뜨리고 새 질서를 안착시킨다. 이런 성스러운 경험에 두려움과 이끌림의 반응을 보인 성경 속 인물들이 있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앞에 섰던 모세의 경우와 고기잡이 이적을 경험한 베드로가 그 예이다. 베드로는 예수 앞에 엎드려 "내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눅5:8)는 고백까지 하였었다.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이 지금 낯선 두려움에 직면하였다. 조금 있으면 주님을 볼 수 없을 것이기에, 또 조금 있으면 볼 수 있게 될 것이기에, 이 두 상반된 말씀에 두렵고 혼돈스러웠다. 게다가 예수는 수수께끼 같은 말까지 더 하였다. "너희는 울며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요16:20) 이는 십자가 사건에 제자들이 보일 반응을 내다본 말이었다. 스승의 죽음 앞에 자기들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현장에서 달아났다는 자책감을 말한 것이다. 여기 '세상'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질서이다. 하나님을 안다면서도 정작 그의 뜻을 거스르며 사는 체제의 기득권자들은 자기들 체제를 흔들던 예수를 제거했다고 축배를 들었다.
비극을 축제로
인간의 어리석음은 살아계신 신을 염두에 두지 않음에서 비롯되었다.. 신의 어리석음이 인간의 지혜보다 낫고 신의 약함이 인간의 힘보다 강하다. 인생들이 이것을 모른다. 아니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진실이 실체화된 것이 십자가 사건이었다. <너희가 근심에 싸여도 그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 그렇다. 이런 변화가 신의 역사이다. 신의 뜻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현실에서 이런 기적을 경험하게 된다. 그 예로 예수는 해산하는 여인의 예를 들었다. 낳기 전에는 그 진통 때문에 두려워 하지만 낳고 나면 자기 분신을 얻은 기쁨에 고통을 잊는 여인의 해산, 십자가적 삶은 여인의 그 해산 과정을 거쳐 인생의 새 가치관을 낳는다는 유사하다.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이런 용광로를 거쳐서야 얻어진다.
똘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 소설 속 인물 일리치는 유능한 판사였다. 바르고 친절하며 명랑하여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좋은 아내까지 얻어 행복한 결혼 생활을 이어갔다. 하지만 아내가 임신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짜증이 늘어가더니 가정이 족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일리치는 일을 핑계로 집 밖에 오래 머물렀다. 그럴수록 아내의 질투가 커지고 불화는 깊어졌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았다. 그는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자기가 왜 일찍 죽어야 하는지 부당함을 느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커갈수록 자기 사정에 아랑곳없이 즐겁게 살고 있는 이들에 대한 질투와 분노도 커져갔다. 그러다가 자기 삶을 성찰하기 시작했다. 상류층 관습과 사고방식에 절어 살아왔던 삶이 겉보기엔 근사했지만 마음이 담기지 않은 삶이었음을 깨닫자 참회하고 아내에게 용서를 구한다. 어떻게든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애썼는데 그러자 그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마음 또한 편해졌다.
예기치 않게 찾아온 시련은 우리 삶을 곤란하고 어리둥절하게 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그간 살아 온 방식을 차분히 돌아보게 만들고 마침내는 삶이 고마움이라는 사실과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한다. 신앙의 힘은 그런 것이다. 고통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올 때 그 속에 숨겨진 복을 찾아내게 하는 것, 그것이 신앙의 힘이다. 창세기 32장에 묘사되어 있는 얍복 나루에서 천사와 씨름한 야곱의 이야기. 자기 엉덩이 뼈를 다치는 고통 속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제자들도 지금이야 울며 애통하겠지만 예수는 그런 그들에게 말했다. 이 일로 인하여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고. 지금의 삶이 고난이고 비극일 수 있다. 그러니 신앙은 기왕의 비극을 축제로 바꾸는 능력을 배양시켜 준다. 많은 신앙의 선진들이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곳곳의 의인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
신과 접속하여
신앙에 무지한, 혹은 불신앙으로 사는 이들에게 십자가는 실패요 어리석음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실은 그 십자가가 영원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십자가, 그것은 죽음이었지만 그렇게 죽어야 새 존재로 다시 살 수 있었다. 이 과정을 경험한 이들, 믿는 이들은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소망을 품고 산다. 그 소망을 품고 살기에 더 이상 자기 맘대로 살지 않는다. 영원한 세계에 접속한 자답게, 신의 자녀답게 사는 것이다. 일상을 사노라면 근심이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저런 일들에 시달려도 믿음의 바닥심이 있기에 전복되지 않는다. 땅의 인력에 속절없이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그 인력을 거스르며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지체의 일들, 곧 우상과 더러움과 악한 욕망과 탐욕을 죽이라. 탐욕은 우상숭배이라."(골3:5) 믿음의 삶은 지향하는 바가 바뀌는 것이고 삶의 목적이 달라짐이다.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아무것도 내 이름으로 구하지 않았다. 구하라. 그러면 받으리라. 그래서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되리라"(요16:24). 요상한 신앙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 구절을 맥락 없이 오독하여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구하면 된다고 오해하였고 또 능히 그렇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어왔었다. 그러나 예수가 구하는 것을 얻게 되리라 말에는 전제가 있었다. '신의 선한 의지와 접속된 경우에 한하여 그렇게 된다'는 말이었다. 신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아도, 요구하지 않아도 절로 자명해지는 것이 신의 뜻에 접속된 경우이다.
신의 선한 의지에 접속된 이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 신을 동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요구한다면 신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구할 뿐이다. 그 신의 손과 발로 살기 위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들, 즉 절대자에 대한 경외심, 나만큼이나 귀한 타인에 대한 존중, 생의 끝자락에 대한 소망 등을 구하는 것이다. 신앙한다 하면서도 여전히 야곱으로 머물고 있는 우리를 이스라엘로 살라고 부르신 신 야훼. 그 신이 오늘 우리들을 부르신다. 그 신을 믿고 산다 함은 부족함과 고난이라는 재료로 기쁨과 감사의 삶을 빚어내는 삶이다. 그 신 야훼를 철저히 신뢰하면 그러한 변화가 가능하다. 그때에 모든 야곱들은 이스라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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