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28. 23:1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리포트나 논문 작성에서 남의 자료를 적당히 배열하여 내는 것을 ‘짜깁기’라 한다. 과거 세탁소 간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말 ‘짜깁기’라는 용어, 옷감이 상했을 때, 안 쪽에 있는 천을 잘라내어서 천을 짜듯이 이어 붙여서 정교하게 깁는 것이 짜깁기였다.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서 요즘에는 어느 세탁소에서도 그런 용어를 볼 수가 없다. 짜깁기가 없어진 것이다. 우리가 사치스러워져서가 아니라 짜깁기 한 그 모양이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그 부분 불편하기 때문이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예수는 말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부분적인 개선은 개선이 아니라 개악이 될 수 있다. 집을 고칠 때 구조를 좀 더 좋게 하려면 벽을 다 헐어낼 수밖에 없다. 차라리 완전히 새 집을 지으려면 기둥도 장애물이다. 결국 모두 헐어야 새 집을 지을 수 있다. 사회, 경제, 문화, 언론 현실에서 바꾸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바뀜으로써 손해를 보는 이들의 저항이 만만찮기 때문이다. 권위, 전통, 질서, 등으로 묘사되기도 하는 기득권 세력들과의 갈등이 부담스럽다고 적당히 대충 타협하다 보니 개선이 아니라 개악의 결과들이 나오기도 한다. 개혁이 혁명보다 더 어렵다는 말이 실감되는 시기이다.
오늘의 기술 진도는 발전이 아니라 혁명이다. 컴퓨터 칩의 용량 단위가 바이트, 1바이트는 트랜지스터 1개의 기능이다. 과거에 트랜지스터 3개만 가지고도 라디오를 만들었는데 바이트가 킬로바이트로 그 킬로바이드가 메가바이트로, 그 메가바이트가 기가바이트로 되더니 이제는 테라바이트 단위가 보통이다. 1기가바이트의 논리 회로를 트랜지스터 수준의 논리로 일일이 계산한다면 숙련된 사람이 1분에 트랜지스터 논리 회로를 100개씩 정리해도 19년의 노동시간이 걸린다. 노동시간 19년이면 노동자의 일평생이다. 그래서 디지털 논리가 개발되었다. 칩과 회로가 더 복잡해지자 더 효과적인 통제 기술이 등장한 것이다. 수천명이 일생을 바쳐도 풀 수 없는 논리를 새 방법으로는 단 몇 초만에 푼다.
오늘날 과학은 과거의 지식까지 쓸모없게 만들었다. 변화 무쌍한 오늘의 트렌드에서 과학적 지식이야말로 언제 폐기될지 모르는 가변적 지식인 것이다. 과학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과학을 설명하는 시각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다. 과거 에는 과학을 절대 불변의 객관적 진리라 믿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과학은 결코 객관적인 지식이 아니요 절대 불변의 법칙도 아니었다. 단지 세계와 현상에 대한 한 해석의 한 방법일 뿐이었다. 동양에서는 사람 건강을 동양철학적으로 해석해왔었고 이 해석에 대해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요즘은 실증주의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접근조차도 하나의 방법에 불과하다. 근본의 완전한 변화, 거기에서 진짜 새로운 것이 가능한 것이다.
야훼의 기회는 변화로
이스라엘 역사에도 혁명적인 변화의 시기들이 있었다. 그 변화는 잘 나갈 때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절망의 역사 속에서도 일어났다. 신명을 따르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타락했을 때, 그들에게 새로워질 가능성이 없었다. 우상을 야훼처럼 섬겼고 야훼를 우상 취급 하였기에 이스라엘은 북과 남으로 분열되었다. 그후,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정복당하여 완전히 망한 채 백성들은 전 세계에 흩어졌다. 남왕국 유다마저 바벨론에게 정복을 당하여 그 나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야훼는 앗수르와 바벨론이라는 대국을 이용하여 그들을 심판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했다. 역사 속에서 자기 존재 가치를 주장할 수 없는 민족이 되었다.
그런데 이들 중 잡혀왔던 소수의 사람들로 하여금 다시 야웨 신앙을 회복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으로 귀환까지 이루도록 하였다. 출애굽이 이집트로부터의 노예탈출 이었다면 예루살렘으로의 이 귀환은 포로 된 자들의 귀환으로서 제2의2 출애굽이었다. 완전히 망하고 나서 새 출발을 하는 것이다. 악한 이스라엘을 무에서 창조하듯이 새롭게 하실 때 야훼는 그들을 완전하게 새롭게 출발시켰다. 이집트 노예들에게 새 나라를 주시듯이 바벨론 포로들에게 새 나라를 주신 것이다. 어둠에 있는 이들을 빛으로 부르시는 야훼, 그래서 새롭게 하시는 그 야훼가 말씀하셨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사60:4~5)
완성자 예수
예수는 새 창조의 모범이고 그가 오신 목적 또한 세상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 모든 문제에서 야훼의 나라로 새롭게 하고자 오셨던 것이다. 새 것은 옛 것과 갈등 관계에 놓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필연 새 법은 옛 법을 어길 수밖에 없다. 예수는 율법을 어겼다. 예수와 제자들도 금식하지 않았다. 안식일 규칙까지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하여 체제 주의자들은 비난하였고 기득권자들은 그것을 빌미로 예수를 몰아 죽이기까지 하였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의 목표를 그들이 몰랐기 때문이었다. 예수의 목표는 율법의 준수가 아니라 율법의 완성이었음을 그들은 몰랐던 것이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면 병들린 자들이 다가와 치유를 받는다. 당시의 병자들이 어떤 신분이었던가? 율법에 의하면 병자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멀어진 징벌받은 죄인들이었다. 그런데 예수 안에서 병자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더 많이 입은 사람들이 되었다. 귀신들까지 소리를 지르며 절규했을 정도였다. 예수의 오심은 이 세상의 표면만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계를 새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야훼를 믿는 신앙의 내용과 틀을 동시에 바꾸라는 말이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막2:22)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 삶은 단순한 교리의 배움이 아니라 사랑의 완성이어야 한다. 완전히 죽고 완전히 다시 사는 기적이 있어야 한다. 구원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해야 한다. 선하고 도덕적으로 살며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정도 그 이상이고 교양과 지성인으로 살아가는 차원 그 이상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인간으로서 고상하게 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삶인 것이다. 죽기를 싫어하면서, 아니 죽은 적이 없는데도 다시 산다는 위선을 버리고 정말 죽어야 한다. 죽어야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의 부활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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