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위에서

2024. 12. 31. 13:19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내 아들아 또 경계를 받으라 여러 책을 짓는 것은 끝이 없고 많이 공부하는 것은 몸을 피곤케 하느니라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전12:11~14)

 

한국인 최초의 노벨문학상, 성렬이의 난동 등 이런저런 일들로 어수선한 가운데 2024년도 이제 끝이 다가왔다.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적은 시간뿐이다'는 말처럼 시간을 이겨낼 장사는 없다. 사람들은 그 한정된 시간 소비가 아까워 상상으로, 또는 기발한 발상으로 시간 연장의 로망을 갖는다. 바쁜 현대인들 시간을 줄여주고자 등장한 편의점 이름 <25>, 어떤 이의 소설 제목 <8요일> 등은 그런 희망들의 표현들이다. 어떤 이들은 연말을 맞이할 때마다 ‘13월이 있었으면하는 아쉬움을 느낀다고 한다. 흐르는 세월이 두려워서가 아니요 나이가 더해가는 것이 서러워서도 아니다.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채 또 한 해를 보냄이 안타까워서, 귀한 세월을 허송했다는 죄책감 때문인 것이다.

 

1. 시간이 무엇이기에

한없는 아쉬움을 남겨주고 흘러가는 이 시간이라는 것, 정말 시간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현자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말했다. ‘정말 시간이란 무엇인가? 알 것 같다가도 모르겠다. 막상 묻는 이가 있어 그것을 설명하려 하면 아무것도 말할 수가 없다.‘ 시간은 물리적 길이도 없고 형태적  넓이도 없으니 그저 신기하고 신비할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 인생들은 그 신비스럽고 신기한 시간의 지배를 받고 산다. 흐르는 시간에 초조해하고 때로는 너무도 천천히 가는 시간에 갑갑해하기도 한다. 각자의 삶에 찾아드는 상대적 처지와 이유들이 다르기에 시간에 대한 감흥 또한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모두에게 예외 없이 다가온 이 연말에 또 한 해를 넘기는 이 아쉬움은 누구도 피해가지 못한다.

 

비행기는 이륙하기 전에 철저한 정비를 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비행 중 고장을 일으킬 때는 이미 대형사고의 위험에 노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행기의 정비에는 반드시 체크리스트가 있다고 한다. 항공 정비사들은 그 체크리스트의 점검기준이나 표에 따라 일일이 점검하고 정비를 하되 또 정비를 한다고 한다. 이것은 항공정비사들의 업무준칙이지만 이 땅에서 하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준칙이다. 하나님의 역사에서 죄인으로 남지 않기 위해 우리는 오늘을 점검하고 다듬으며 살아야 한다. 영으로 살아 있는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하늘 시민으로서의 기준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즉 체크리스트에 의한 신앙적 삶의 점검과 정확한 정비가 필요한 것이다.

 

살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의 경험해 왔다.. 그 숱한 실패와 시행착오의 원인들이 여러 가지 있겠지만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분석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전체적인 면에 대한 배려를 중시하다가 세세한 부분을 등한시한 것이요 둘째는 작은 부분과 세부적인 것을 너무나 중시하다가 전체적인 것을 등한시한 것이다. 소위 균형상실이었다. 한정된 자원과 제한적인 시간을 살고 있는 인생이기에 전체를 보는 것과 부분을 보는 것, 이 양자는 모두 중요하기에 적절하게 조정되어야 했다. 작은 부분도 보아야 하지만 저 높은 곳에서 전체를 살피고 전체를 보는 눈이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 해의 마지막이 다가온 이 시즌에는 세세한 부분보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내 삶을 돌아보고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2. 관계를 점검하여

우리는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고 든 시간을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주어진 삶의 기회, 허락된 인생 자원을 전략적으로 선택하고 관계 하며 살아야 한다. 부분과 전체의 조율이 필요한 것이다. 그럼에도 근본이 되는 것, 즉 원칙이 되는 관계를 상실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이다. 이 관계에 대에서 전도자는 오래전에 말한 바가 있었다‘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라.’ (전112:13)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는 말이다. 전도자는 이 말을 하면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라고 말했다. 이 말이 실상 전도서의 모든 것을 뜻한다.

 

전도서는 솔로몬 노후의 인생 회고록이다. 그의 부귀와 파란만장의 생애도 하나님이 없을 때는 헛된 것이요 무익한 것이라 했다. 인생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그 본분이라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때만 바른 인생, 곧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수도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6:33)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맺으면 거기에서 파생되는 모든 것이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그 정상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죄라는 것의 준동, 그 마귀의 준동 때문에 세상이 불행한 곳이 되었고 인생은 고통스러운 것이 되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이 되려면 먼저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너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이 네게 임하리라'  (욥22:21)

 

인간은 나름 능력있는 존재이다.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죄의 문제만큼은 인간 스스로의 해결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작고 가벼운 죄일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없앨 수가 없다. 방법은 단 한 가지, 하난미 앞에서의 회개이다. 죄인인 인간은 죄와 상관없는 구원자 예수를 믿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9:1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1:9)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가 인생의 기준이기에 그 방법을 하나님 쪽에서 내놓은 것이다.

 

3. 기회는 늘 있지 않아

단추는 첫 번째 것이 잘못 끼워지면 내리 잘못 끼워진다. 하나님과 관계도 그 첫 단추를 바르게 끼우지 않으면 잘못된 신앙, 이상한 믿음 양상으로 빠진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되 제대로,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회복이 없는 삶은 헛것이요 무의미할 뿐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를 소홀히 여긴다. 한 해가 가면 또 다른 한해가 오니 다음 기회가 또 있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의 순환은 언제까지나 반복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할 때, 소위 종말이라는 때가 반드시 온다. 종말은 크게 두 가지 의미에서 다가오고 있다. 그 하나가 개인의 종말, 즉 내가 죽는 것이다. 어느 인간도 천년만년을 살지 못한다.

 

전도자는 말하기를 무릇 산자는 죽을 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성경에도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 선포하고 있으니 인간은 사후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죽음이 언제 올지 항상 준비하여 비록 내일 끝난다고 할지라도 후회가 없어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우주적 종말인데 내가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 그때 우리 삶은 우주의 종말과 함께 끝장이다. 성경은 그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곳곳에서 경고하고 있다. 우리는 끝을 향한 하나님의 시계,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보는 믿음이 필요하다"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마24:42) 만일 이번 주에 예수가 재림한다면 2,025년은 없다. 오늘 밤 부름을 받는다면 내일은 없다.

 

그러니 이 해가 가면 또 다른 한 해가 다시 오니 순환이 계속되리라는 장담은 안일한 삶의 자세요 위험하다. 우리는 주어진 날 하루하루를 귀하게 여겨 소중히 쓰며 이 삶의  기회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생애를 시간으로 계산한다면 예배드리는 시간 합산은 몇 번째 정도가 될까? 아마도 세상 자기 볼 일을 보았던 시간들에 훨씬 못 미칠 것이다. 오늘의 인간 들 만이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인간이란 존재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바울이 말했다. ‘세월을 아껴라 때가 악하니라’ (엡5:16) 우리가 현실 문제, 먹고사니즘에 정신을 팔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의 전한 시간들은 다가오고 있다. 세상 즐거움이 그것을 느끼지 못하게 할 뿐이다. 노아시대의 홍수가 그 예이고 소돔과 고모라성의 불이 그 그림자들이었다.

 

결론

망하고 싶어 망하는 사람 없고 지옥 가고 싶어 하는 인생은 없다. 모두들 나름대로는 제대로 살고 있다고 자위하고 자평하며 산다. 그런데 무엇에 근거하여 자위하고 자평하며 사는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데 내 삶의 평가 기준이 되는 세상이 악하다면?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모른 채, 아니 무시하며 살고 있다면? 노아의 홍수 심판 때도 그랬고 소돔과 고모라 불심판 때도 그렇게 망하였다. 우리는 관성적 사고에 길들여진 옛사람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간은 순환이 아니라 직선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한 걸음씩 내딛는 선택과 삶에 예고 없는 죽음이 함께 걷고 있다. 오늘이 내 끝날 일 수도 있고 다음 달이 우리에게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오늘이라는 기회, 허용된 시간의 은혜에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5: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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