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의 새 인류

2025. 1. 9. 12:00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계21:1~4)

 

지나온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의 이름을 앞세워 세상을 변화시키려 애써왔다. 훌륭한 일이었고 간지 난 일이었다. 하늘의 가치관으로 사는 이들이라면 분명 그런 노력을 해야 하고 또 그렇게 살아야 한다. 빛과 소금으로 세상 앞에 서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런 수고를 허락함은 내 능력으로 정화하려 함이 아니었다. 나의 수고와 성과로 변화시켜 좋은 세상으로 만들라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오히려 그런 것은 너희들 힘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낡은 습관과 옛 성품을 없앨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깨닫게 하려 함에 있었다.

 

1. 선한 영향력

2000년 동안 교회는 외쳐왔다. ‘성도여! 일어나 빛의 삶을 살라. 소금의 삶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라.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었나? 교회가 외치고 또 기도해 온 대로 세상이 변화되었던가?? 기독교인들의 기도와 수고로 세상이 도덕적으로, 또는 윤리적 영향을 받아서 살기 좋아졌던가? 기독교인들이 빛과 소금으로 살아내면 정말 세상이 감동을 받고 변화되는 선한 영향력, 즉 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너무 성급한 분이 아니었겠는가? 노아 당시의 세상 전체를 물로 심판했음이 분명 성급한 처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당시 사람들은 1000년 가까이 살았던 시대였다. 그러니 더더욱 아쉽지 않은가? 의인인 노아를 오래 살게 하여 그로 사람들을 변화시켜 돌아오게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왜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에게 세상에 선한 영향력으로 변화시킬 기회를 더 주지 않고 딸랑 노아의 여덟 식구만을 선택한 채 나머지 모두를 몰살시켰을까?? 이 세상은 사단의 권세 아래 있다. 그의 원리로 움직이는 거대하고 악한 유기체이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빛과 소금의 삶을 명령한 것이 아니었다. 그 사단의 세상이 얼마나 악하고 더럽고 불가능한지를 우리 삶에서 경험시키기 위함이었다. 그것으로 심판 근거 삼아 불로서 심판하기 위해 우리에게 빛과 소금의 삶을 명령한 것이었다. 빛과 소금의 삶을 보이고 권면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오히려 우습게 여기고 탄압해 왔다.. 이 사실을 하나님은 우리의 바른 행실이라는 삶을 통해 증명하고자 할 뿐이다.

 

사단 아래에 있는 세상을 불로 소멸할 것이니 옛 것들은 모두 사라질 한시적인 것들이다. 사람들이 붙들고 있는 현실의 모든 것들, 세상의 것들은 모두 옛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해 그 옛 것들을 놓아가는 훈련을 하고 있다. 옛 것이 아닌 새것을 소망하는 신인류는 해 아래 세상에는 새것이 없음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 이외 현실의 그 어떤 것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 뿐이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전1:8~10)

 

2. 새 날에 맞는 인생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 눈을 두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하며 산다‘주의 날이 도적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3:10~13) 지금을 지탱하는 이 세상은 끝이 날 것이고 새 세상은 분명 온다. 죄와 그 죄의 원리들이 만들어 놓은 현실 성과들은 불타고 심판대에 설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눈, 삶의 목적을 이 땅의 것들에서 돌려 하늘로 향해야 한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였지만 사후에 자기 해골을 반드시 약속의 땅으로 가져가라고 유언했다. 자신의 유골마저도 이 세상 현실을 상징했던 애굽에 남겨두기 싫었던 것이다. 그런 새 세상에는 어떤 인생들이 들어갈 수 있나? 이미 심판받은 이들이 들어간다. 심판의 불이 죄 위에 쏟아질 것이나 그 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이들은 심판받지 않는다. 이미 하나님은 선택한 한 무리들을 위하여 그 심판을 예수에게 쏟아부었다.. 예수는 우리의 죄에 대한 진노의 불, 심판의 불로 죽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남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우리 삶에 죄의 오염과 부패적 속성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럼에도 옛 것에 속한 그 오염과 부패를 하나님이 지속적으로 우리 삶에서 불로 태워나간다. 그 오염과 부패를 지닌 상태로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난 이후의 우리 삶에 이런저런 불 시험들이 닥쳐온다. 마지막에 있을 대심판에 들지 않게 하고자 이 땅에서 작은 불 시험들로 태우는 것이다‘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4:12~13)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사는 고난을 은혜라고 부르기도 한다‘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빌1:29) 그러니 쉽지 않은 올 한 해를 살 우리는 이런 은혜의 강을 지나가는 중이다. 그렇게 옛 것들이 모두 멸해지고 오는 새 세상은 지금의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3. 창조의 목적으로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하여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재통일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죄로 인해 훼손되고 어그러진 것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것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했다.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1:8~10) 즉 새 세상은 지금의 세상과 전혀 다른 세상이 아니라는 것, 현재의 세상이 영화롭고 새롭게 변화된 재통일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서나 계시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옛 하늘과 옛 땅이 없어진다는 말들은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죄로서 왜곡되고 훼손된 삶의 원리와 그 원리가 토해 낸 역사들, 그런 것들이 사라진다는 뜻에서 ‘옛 하늘과 옛 땅이 없어진다. 불에 탄다‘고 표현한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하나님의 질서와 평화를 깨뜨릴 어떤 요소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도 자연계가 있고 문화가 있으며 육체를 지닌 자들이 누릴 것들이 있다. 현재의 생활에서 우리를 자유케 함에 쓰이는 것들은 새 땅에 그대로 보존될 것이다. 즉 천국은 신선처럼 구름 타고 날아다니는 곳이 아니라는 말이다. 천지 창조 시 하나님은 인간과 피조물을 성령으로 묶어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게 했다. 인간을 통한 성령의 역할은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만물을 통일시키는 것이었다. 만물을 실핏줄처럼 하나로 연결했던 것처럼 이제 우리를 그 안에서 하나로 통일시킨다.

 

사단이 무너뜨린 무질서를 다시 회복시켜 재통일한 세상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 한다. 다시는 타락할 수 없는, 다시는 죄에 의해 왜곡되거나 훼손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만을 즐거워하는 자들이 존재하는 곳, 그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죄가 소멸되고 죄의 결과인 사망과 그 사망의 증상들인 슬픔과 고통과 눈물이 사라진 곳은 죄의 원리인 힘으로 운영되는 이 세상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 작동하는 곳이다. 그곳은 나를 비우고 죽여 이웃이 유익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되는 십자가 원리로 사는 곳이다. 그것이 이 땅에서 죄의 원리와 반대되는 십자가의 원리로 살아가는 우리 삶의 이유이다. 하나님은 옛 하늘과 옛 땅에서 이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게 될 새 피조물들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시간의 여정에서 그 삶을 가르치고 연습시키는 것이다.

 

결론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5:17) 해 아래 새것이 없었는데 새 인류, 즉 하나남의 백성들인 우리가 나타난 것이다‘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엡4:22~24)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 목적이었다. 장소적이고 공간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이 분명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안다면 여기에서도 그 나라 시민처럼 살 수 있다. 아니 살아야 한다. 이미 그 나라가 와 있음에도 옛 몸의 습관에 따라 옛 하늘 아래 살고자 하는 인생들에게 묻고 싶다. '2025년에도 헛된 꿈을 좇느라 스스로를 학대하며 고단한 삶을 살려는가?'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 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사35:5~10)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섭리를 믿기에  (1) 2025.01.19
전능자를 믿기에  (0) 2025.01.17
시간 위에서  (1) 2024.12.31
그날의 메리 크리스마스  (2) 2024.12.26
하늘 평강이 오시다  (1) 2024.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