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평강이 오시다

2024. 12. 23. 12:46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9:9~10)

 

 

요즘 어떤 무리들의 행태를 보노라면 무엇에 씐 집단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닌 줄 알면서도 저러는 것일까? 혹은 정말 몰라서 저러는 것일까? 하기야 기득권과 권력이라는 마술에 걸리면 상식이 무시되고 대의명분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는 인간의 행태가 어제오늘의 일만은 아니었다. 인간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 집단이라는 사회관계를 이루어 온 이레 반복되이 보여 온 행태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예수의 전기를 기록한 제자들 중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론에서 빛이 세상에 왔는데 아무도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선포한다. 죄를 죄로 보지 못하고 사는 인생들은 그 빛을 알 수가 없었고 또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았다고 선언했으니 말이다. 이렇게 욕심의 화신, 권력의 망나니로 아귀다툼하는 인생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심정은 어떨까?  

 

1. 하나님의 눈물이라

하나님은 메시아라는 빛에 앞서 그의 사자로 세례 요한을 보냈다. 그로 하여금 그 빛을 설명하게 하였지만 달라지지 않았다. 이해관계로 얽힌 기득권자들은 자기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자기들 보고 싶은대로 보았을 뿐이었다. 그 양상을 누가는 이렇게 표현하였다‘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눅19:37~42)

 

예수가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 흘렸다. 아마도 그것이 하나님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죄인들은 하늘 평강을 원하지 않았다. 아니 그 평강을 알려하지도 않았다. 인생들의 그런 모습에 하나님은 안타까웠다. 죄 중에 살고 더 나아가 그 죄를 무기로 사는 이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관심도 없다. 그러기에 예수는 복음서 곳곳에서 당신의 나라, 즉 천국을 비유로만 말했다. 진주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등불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비유 등, 특히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을 비유했었다. 복음의 씨가 모든 인생들에게 떨어졌다. 길가밭 같은 인생들에게, 가시떨기 같은 인생들에게, 심지어 자갈밭 같은 인생들에게도 떨어졌다. 하지만 결국 결실 맺는 것은 좋은 땅뿐이었다는 것이다. 왜 예수는 천국을 굳이 비유로만 설명했을까?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13:13~17) 무서운 말이다. 제 눈에 씌어서 스스로 망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말이 아닌가?

 

2. 하늘의 평강을

성경은 분명하게 선언한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이 말하는 평강을 얻을 수 없다고 말이다. 또한 그런 평강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고 말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세상 일이 잘 풀렸을 때 오는 정서적 안도감을 ‘편안’이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좇아 그분의 뜻으로 사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평강은 그런 평안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은 흉내 낼 수도 없는 것, 아니 답답한 현실의 한가운데서도 경험할 수 있는 평강이다. 믿음의 세월을 사노라니 어느 순간부터 삶을 간섭하는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에 순종하며 '아멘'하여 사는 것이 하늘의 평강이다. 이런 평강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서, 우리의 바람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오늘의 현시국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믿고 맡김에서 오는 담담함이다. 이러한 평강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졌던가?

 

성경은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스도에 의해, 오직 그리스도의 삶으로서 주어졌다고 말이다. 그것도 아무 대가 없는 선물로서 주어졌다고 말이다. 이 선언이 믿어진다는 사실이 은혜이고 기적이다. 짧은 한 세상을 살다 갈 우리 인생들에게 이 믿음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죄에 오염된 채 살아왔기에 죄가 죄인 줄도 모른 채 살아온 인생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는 인생들은 이 믿음과 이 평강을 모른다. 바라지도 않으니 관심도 없다. 그러니 보지 못했고 경험한 바도 없었다. 그런 인생, 그런 상태의 예루살렘을 보는 메시아 예수가 눈물로 안타까워했다. 사람들은 돈이 떨어지면 비통해하고 병을 얻으면 심란해하며 자식 일이 막히면 허둥대며 안절부절못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런 일들 하나하나에 구체적으로 연연치 않는다.

 

하늘 평강을 경험한 바 있는 이들, 온전한 평강의 도래를 소망하며 살고 있는 이들, 이들은 힘든 삶, 만만찮은 현실의 와중에도 말씀과 기도와 예배로 하늘 평강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 그 힘, 그 담담함과 그 담대함, 그 항상성이 기적인 것이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런 평강은 하나님이 창조하는 것이지 사람들이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라고 증언하고 있다“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사45:7) 죄로 탁해진 이 세상에 평강은 없다. 혹여라도 이런 세상이 말하는 평강이 있다면 그것은 상대적인 평안일 뿐이다. 오염되어 이해관계에 얽힌 인간들은 진짜 평강을 모르니 하나님과 평강을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평강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 이를 제대로 인식한 이들에게만 성경의 말씀이 복된 소리로 들린다.

 

3. 나귀 새끼를 타고

도무지 평강을 찾아볼 수 없었을 같고 벗어날 수도 없을 것 같은 오늘의 현실과 지금의 이 캄캄함, 이 혼돈 속에도 하나님의 평강을 소망하는 이들에게는 복음이 들려온다. 이는 이미 오래전 예언자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 일단이 이루어졌으며 그 마무리를 향하여 여전히 우리 가운데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사9:6) 평강을 모르기에 평강이 없는 세상에 진짜 평강인 하늘 평강을 주는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방법이라는 것이 영웅의 출현이나 슈퍼맨이 아니라 한 아기를 통해서라니! 사실, 성경 곳곳에서는 하나님의 황당한 약속들이 이 같은 방식으로 선포되어 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9:9~10) 평강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라는 이 말씀, 그 예수로 시작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평강’ 즉 ‘샬롬’이 전해질 것이라 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평강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선물로 주어졌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사53:5)

 

선물로 주어진 십자가, 그의 찔림이 없었으면 우리에게 하늘 평강이 올 수 없었다. 그의 상함이 없었다면 죄의 해방에서 오는 하늘 평강이 우리에게 올 수 없었다. 탁해진 영에 중독되어 살던 인생이 십자가로 평강이 가능했다. 유난히 평강을 강조하는 에베소 편지는 바울이 감옥에서 썼던 옥중서신이었다. 지저분하고 냄새나며 불편하기 그지없던 그 현실에서도 바울은 이런 평강으로 충만했었다. 감옥에서도 누렸던 평강, 그 평강이 만만찮은 현실을 사는 오늘 우리의 평강이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우리를 메시아가 당신의 십자가로 평강의 다리를 놓았다. 거기에서 오는 위로, 그 함께 하심에서 오는 평강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가? 이런 평강을 누리는 오늘의 우리에게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부탁하신다‘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3:15)

 

결론

수직적 평강의 장으로 들어간 우리에게 수평적으로도 평강의 장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 그렇게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으니 우리끼리도 화목케 지냄은 당연하고도 자연스럽다. 이 평강의 인생들은 한 몸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니 서로의 관계에도 하늘의 평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런 관계로 초대받은 우리의 오늘은 평강 한가?? 평강 하다면 그 하늘 평강을 연대하여 나누고 있는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엡2: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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