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17. 12:1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1:1~3)
신학적으로 건강한 교회들은 예배 순서에 사도신경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순서가 들어있다. 사도신경이 기독교가 믿는 바를 가장 잘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고 또 사도들 가르침 위에 선 교회라면 마땅히 동의하고 숙지해야 할 핵심이 모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크게 몇 개 항목으로 제목화한 것이 사도신경이다.
1. 믿음의 정체
사도신경에서 ‘신경’이라고 번역된 라틴어 ‘creed’는 ‘내가 믿는다, 마음을 두다’는 의미이다. 즉, ‘사도들이 믿었던 바, 사도들이 마음을 두었던 것’이라는 뜻이다. 사도들이 가르친 성경 내용이 그러하다는 의미에서 사도신경이었으니 오직 성경, 사도신경으로 요약되는 성경의 교리와 신학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시대 이후 오늘날처럼 다변화 시대에서는 믿는 바를 정확히 함은 중요하다.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고 절대적일 수 없다는 사고들이 만연한 오늘날이다. 그러기에 절대 진리가 상대적인 것에 밀리면서 이단, 거짓 사상, 사이비 기독교들의 준동에 현혹되고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신경은 사도시대에 만들어졌기 때문이 그들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미 여러 종류의 신앙 고백들이 교회 안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어 왔었다.
그러다가 7세기 초에 어느 정도 확정되었고 9세기경에 로마 교회에 의해 정식으로 정착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사도신경은 초대교회 때부터 뼈대가 만들어져서 교회 안에서 고백되어 오다가 역사 속에서 정착된 교회의 핵심 신조인 것이다. 교회들이 사도신경이라는 신조를 예배에 고백하고 합송 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여러 이유들이 있었지만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이단들의 사상에 경계시키기 위함이었다. 초대교회 때는 물론이고 2,000년 교회 역사상 이단과 거짓 교사가 없던 시대가 없었다. 예수의 신성을 부인한 아리우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지 않은 펠라기우스, 영지주의와 신비주의, 세속주의와 기복주의 등 매 시대마다 이단들은 쉬지 않고 미혹한다.. 교회는 사도신경에 비추어 그 고백에서 어긋난 이들이나 집단들을 이단으로 규정해 왔다..
교회는 한 하나님을 향한 한 믿음,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이다. 오늘날에도 교회가 믿는 믿음이 여러 종류인 것 같고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 다양한 것 같으나 믿음과 소망이라는 신앙고백에서는 하나이다. 교회의 믿음과 소망이 결국 하나님과 그 나라로 귀결되고 지향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의외로 믿는다는 이들에게 믿음의 내용을 물으면 머뭇거릴 때가 많다. 자신들이 믿는 바가 정확하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자신은 믿는 신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자신이 믿는 바의 구체적 내용과 과정도 모르는 채 믿는다고 함은 맹신일 수 있다. 신앙은 내용이 있어야 한다.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나는 믿는다’는 결단만으로 되지 않는다. 마음으로 믿어 입으로 시인함까지 이르러야 믿음이라 할 수 있다.
2. 인식의 축복
믿는 바의 내용이 이성이나 감성에만 머물지 않고 삶으로 고백되고 전파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10:9~10) 여기 ‘마음으로 믿는다’ 함은 지식을 포함한 마음이다. 성경에서 '마음'이라 함은 지식을 제외한 마음이 아니라 '지식을 포함한 마음'이다. 기독교는 무엇을 믿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믿는 종교가 아니라는 말이다. ‘당신은 무엇을 믿는가?’ 하고 물으면 ‘예수를 믿는다’고 대답함과 동시에 그 예수가 누구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을 했는지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자세한 것은 몰라도 돼! 믿기만 하면 돼!’ 이런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사람들이다.
모든 신비들 가운데서 가장 큰 신비는 만물이 존재한다는 것과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중에서도 오늘 내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인간이 존재하게 되었나? 어떻게 태양과 달, 별, 바다, 산, 짐승, 식물 같은 것들이 존재하게 되었나? 일단 이런 것들에 대한 의문과 궁극을 해결하지 않고는 삶의 의미나 목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무의미하다. 그런데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함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존재를 전제하고 시작한다. 그래서 성경 기록의 첫 장 첫 구절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로 그 출발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능하신 창조자 하나님은 다른 것들이 존재하는 방식으로의 존재가 아니라 영원 전부터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이 원인자로 하여 다른 모든 것들이 존재케 되었음을 믿는다. 하나님에 의해 모든 창조와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관점이 아니고는 인류와 역사에 대한 설명들이 명쾌하지 않다.
그럼에도 현대인들은 ‘하나님’이라는 가정 없이도 모든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 자신하는 연구와 추론으로 오늘의 모습까지를 설명하는 진화론에 의하면 만물과 인류의 역사는 우연이었고 우발적이었다는 것이다. 논리와 상식을 공부해 왔고 또 그렇게 길들여진 같은 인간 입장에서 이 가설이 대단히 설득력 있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선물 받아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믿는 이들에게는 동의되지 않는다. 믿음이라는 관점에서 인류 역사와 인생의 목적을 판단하고 믿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렇듯 명확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을 복 받은 인생들이라 한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을 믿는다. 처음 거기에는 혼돈과 공허뿐이었지만 주목해야 할 점이 있었다. ‘혼돈’이라는 원어 ‘토후’는 ‘틀이 없는 상태’, ‘공허’라는 원어 ’보후‘는 ’내용이 없는 상태‘, 즉 '틀'이라는 그릇도 없고 '내용'도 없는 것이 무(無)라는 상태였다.
3. 우선 순위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졌다. 말씀이란 곧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였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존재'라는 것이 생기게 되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3) 그 창조자를 나의 하나님으로, 우리의 아버지로 고백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그 과정에 예수의 그리스도 사역이 있었다. 즉 창조자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로 인한 새 창조의 완성까지 믿는 것이다. 무에서 존재를 창조한 전능자가 예수라는 그리스도를 통해 무의미한 나를 의미 있게 창조했고 또 창조해 나갈 것이라는 것, 이 믿음이 창조신앙이니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내 존재론의 기초이다. 티끌이었던 우리에게 말씀인 예수가 임하자 창조자를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새 창조가 되었고 되어 가고 있으며 결국 그렇게 완성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인생이 우발적이라고 생각지 않으며 또 우연적으로 흘러간다고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 인생이니 내 스스로 책임지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시작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일일 뿐이다. 그러기에 인생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고 절망하지도 않는다.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계획, 내 야망, 그리고 거기에 소용되는 필요를 내가 걱정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1~33) 하나님은 이미 나의 새 창조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준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만 여기 ‘먼저’라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이 '먼저'는 시간의 우선순위가 아니라 관계의 우선순위이기 때문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뒤에 현실의 필요를 공급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에 우선하면 그 관계회복에 필요한 모든 것이 공급될 것이라는 말이다. 하늘을 추구하는 삶에 궁핍이 사라진다는 말이 아닌 것이다. 그러니 인생의 목적이 새 창조의 완성, 즉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있는 이들은 자기 상태나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다. 이를 자족이라 한다. 상태가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관에 순종함이 자족인 것이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1~13) 전능자의 계획에 필요했기에 자신을 감옥에 던졌다는 고백, 그러니 자족은 상황에 대한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이다.
결론
오늘 우리의 딜레마는 하나님의 기대와 우리의 기대가 다르다는 것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바는 순종으로 인한 당신의 새 창조 완성이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그려놓은 내 계획과 야망에 하나님을 조력자로 부르짖는다. 이런 것이 오늘 기독교의 딜레마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강함을 자랑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약함에서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려 한다. 우리는 부자가 되어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세상에게 하늘 신분을 자랑하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궁핍 속에서도 당신으로 인한 당당함을 드러내려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통치의 개념이다. 그 통치에 순종하는 피조물들의 관계인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구하라’ 시제가 현제시제이다. 즉 구하는 일의 반복과 지속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로 지어져 가고 완성되기를 지속적으로 구해야 한다. 그러면 얼마든지 구하는 대로, 찾는 대로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무에서 천지를 창조한 하나님이 쉽지 않은 우리 인생에 아버지로 개입하고 있다. 그런 분이 오늘의 내게 어려움을 허락함에는 그분대로의 이유가 있다. 창조자의 자녀인 우리를 그분이 어련히 알아서 인도해 가시겠는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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