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과 유혹 사이에서

2021. 2. 28. 23:09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어려움이 닥치면 사람들은 곧잘 말한다. 내가 지금 유혹에 빠졌다고. 그런데 신앙인들은 그런 경우 자신이 시험에 들었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삶에서 겪는 일상의 유혹이나 시험이 무슨 차이가 있으랴? 하지만 한두 달도 아니고 1년을 넘기는 코로나 19 펜데믹 현상에서, 그것도 전 지구적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작금의 이 현상에서 인류의 이 고통은 시험인가 유혹인가? 성서 마4:1~11을 볼 것 같으면, 신의 편에서는 '시험'일 수도 있고 인간의 편에서 보면 '유혹'에 빠진 것이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이후, 예수는 성령에게 이끌려 광야로 나갔다. 마귀에게 시험을 받기 위해서였다. 광야는 고독과 위험과 고난을 상징하는 장소이기에 힘들고 고독하며 때론 위험까지 겪는 우리 삶이 종종 그 광야에 비유되곤 한다. 그 광야에서 예수는 40일을 금식하셨다. 이스라엘 광야 생활 40, 노아 홍수 기간 40, 엘리야의 광야 피난 40, 부활 후 예수가 제자들과 보낸 기간 40, 성서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잘못된 것을 끊고 새 것을 준비하는 메타포로 자주 쓰인다. 그 40일을 금식하신 예수에게 시험하는 자가 다가왔다. 인간 예수를 향한 그의 유혹이 시작된 것이다.

 

먹고 사니즘의 문제

 

마귀의 첫 유혹은 먹는 문제, 즉 경제적인 것으로 시작되었다. 사람에게 떡은 필수적이다. 더구나 40일을 굶주린 예수에게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런 기본 욕망에서 유혹거리를 찾아내는 게 마귀의 기술이다. 마귀가 말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더 원문에 가까운 번역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즉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니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도발이었다. 신의 아들에게 그런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뒷날 오병이어 기적으로 주린 이들을 먹이신 예수, 맹물로 포도주까지 만들었던 예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느 자신의 신적 존재를 증명하는 것에 그런 능력을 쓰지 않았다.

 

대신에 성서 인용으로 대응하였다."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8:3). 떡은 물질적이지만 정신적인 문제로 연결되기도 한다. 인간 죄의 기원도 따지고 보면 먹는 것과 관련이 있었다. 유혹에 흔들렸던 인간이 바라 본 금단의 열매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3:6) 떡이었다. <네가 무엇을 먹는지를 말해주면 나는 네가 어떤 인간인지를 말해줄 수 있다>는 말처럼, 어떤 음식을 어떻게 얼마나 먹느냐가 그의 존재인 것이다. 먹는 것으로 처음 인간을 무너뜨렸던 마귀는 예수에게도 그 방식으로 접근하였고 같은 방법으로 오늘의 우리를 도발하고 있다.

 

하지만 먹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예수는 그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니라"(6:35). 무엇보다도 신의 나라와 신의 의를 구하면 모든 필요가 더해질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인간들이 마귀의 유혹에 빠지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떡으로만 살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먹고 사니즘 때문에 공중 새를 돌보시는 신을 잊어 버렸고 이름 없는 들풀까지 입히시는 이를 의심하였다.

 

영웅 탄생을 대망하며

 

첫 도발이 여의치 않자 마귀는 예수를 성전 꼭대기로 데려 갔다. 예루살렘 도성 자체가 고지대인데 성전은 도성에서도 산꼭대기에 있었다. 이 꼭대기는 제사장이 나팔을 들고 매일 새벽마다 오르는 곳이었다. 새벽 빛이 비칠 때 아침 제사 시간을 알리고자 거기서 나팔을 불었던 것이다. 그러니 새벽 나팔소리가 울리면 많은 경건주의자들이 모여들곤 하였는데 바로 그 자리에 사람이 운집한 성전 뜰로 뛰어 내려 보라고 유혹하였다. 실제 유대인들이 권위를 둔 랍비 유전에는 '메시아가 오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림으로써 자기 존재를 증명할 것'이라 했다. 그러니 메시아를 손꼽아 대망하는 그들의 기대를 한껏 만족시켜 보라는 유혹이었다.

 

이때 마귀는 성경 91편 일부를 인용하였다. "기록되가를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귀는 성서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적절하게 사용하였고 자기 목적에 따라 왜곡하였다. 그런 마귀에게 예수역시 성서 인용으로 되받아쳤다.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6:16).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불평하며 모세와 다투었던 므리바’ 사건, 즉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던"(17:7) 그 배경 구절을 인용하신 것이다.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만 선택하여 성경 전체를 왜곡하는 일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성경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로 해석해야 한다. 문자적으로가 아니라 맥락 속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은 예수에게 '내가 바로 너희의 메시아다'라고 대중 앞에서 과시하라는 제안이었다. 세상의 환호와 갈채를 받을 절호의 기회를 잡으라는 것. 하지만 예수는 이 유혹도 거절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라고" 말한 예수로서는 당연했다. 사악하고 건강치 못한 세대는 기적, 성공, 이김, 찬란함을 원한다. 그리고 그런 요구에 부응하여 이긴 자, 성공한 자, 현란한 테크닉의 사람들을 출세한 자라 인정하고 환호하며 찬사를 보낸. 진짜는 요나의 표적이다. 출세가 아니라 고난의 자리로, 성공이 아니라 희생의 자리로 가셨던 예수의 삶이 그러하였다. 표적과 이적에 의존하는 신앙이 진짜 신앙이랄 수 있는가? 표적을 구하는 마음, 영웅 탄생을 요원하는 마음 자체가 실은 불신앙의 행위이다.

 

영끌을 해서라도...

 

집요한 마귀이다. 그는 포기치 않고 다시 예수를 이끌고 갔다. 이번에는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려가 만국과 그 영광을 보이며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라고" 제안하였다. 이 유혹은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2:8)의 패러디였다. 마치 자신이 줄 수도 있고 앗아 갈 수도 있는 하나님인양 말하는 소리에 예수는 분개하였다. 그래서 "사탄아! 꺼져라"라고 호통을 쳤. 마귀 이름 '사타나스'는 ‘참소자, 대적자라는 뜻인데 예수는 마귀의 개인적 이름까지 소환하며 신6:13을 인용하셨다. "기록에,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엎드려 경배할 이는  하늘의 신 한분뿐임을 성서 인용으로 되받아 친 것이다.

 

인생들이 현실 삶을 사노라면 이런 마귀의 유혹과 거래 시도를 수없이 받는다. '하나님 뜻을 너무 내세우지 말고 적당히 좀 하자.'라는 제안에서부터 '손에 피 한 방울 안 흘릴고 어떻게 다 얻을 수 있나!'라는 사악한 유혹에 이르기까지 영광을 위해, 권력과 소유를 위해 영혼을 팔라고 유혹한다. 자족과 절제를 모르는 인간들에게 이런 유혹은 치명적이다. 힘에 대한 욕심과 소유에 대한 탐욕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채울수록 오히려 더 부족함을 느끼게 한다. 존재의 허기는 소유로 채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것에 집착하고 영혼까지 끌어 모아 자기 삶을 확장하려 하니 삶이 흉포하고 피곤할 따름이다.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14-15). 우리에게 탐심이 존재하는 한 유혹은 계속된다. 마귀는 바로 그런 우리의 내면을 파고들기 때문이다. 탐심을 버려야 하늘이 열린다. 우리는 하늘 소리와 지옥의 소리를 들으며 광야에 살고 있다. 이 광야에 유혹과 시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