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7. 23:43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끝났다. 이젠 가망 1도 없어.' 오래전 바벨론에서 살전 히브리인들의 심정이 그랬다. 그들은 제국에 잡혀와 꿈도 비전도 다 잃어버렸고 선민이라는 자존감은 더욱 희미해졌다. 그런 그들에게 야훼는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아니다. 아직은 아니다. 너희가 포기보다는 차제에 새 각오, 새 영으로 다시 살기를 원한다. 나는 너희가 살기를 원한다'(겔18:30~32)고 말했다. 망친 인생, 무너져버린 세상을 향한 신의 진의는 그런 것이었다. 부서진 채로 그대로 죽기보다는 이참에 정신 차려 제대로 살기를 바라는 그 심정이야 오늘의 우리를 향한 마음에서도 다르지 않다.
사람을 구하고 살려야
눅5:1~11에는 광야 시험 후, 예수가 갈릴리로 돌아가 복음 전하는 공생애 시작에 제자들을 모집하는 사건이 소개되어 있다. 예수가 갈릴리 바닷가를 걷고 있었는데 그 바닷가에 배 두 척이 있었다. 어부들이 그 배에서 나와 그물을 씻고 있었는데 그중 시몬이라는 어부의 배에 앉아 무리를 가르치셨다. 강론을 마치시고 밤새 고기 한 마리도 못 잡은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하여 그렇게 하니 잡은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놀란 시몬이 예수가 보통 사람 아님을 알고 그 발아래 엎드렸다. 그러자 예수는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며 그를 제자로 삼으셨다.
어부로 사람을 구하고 살리는 일은 이미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관용어구였다. 렘16:15-16에 언급된 내용도 그 한 배경을 이룬다. 나라가 망해 그 땅에서 쫓겨났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다시 불러 모으실 때 "보라! 내가 많은 어부를 불러다가 그들을 낚게 하리라"라고 하셨던 것이다. 여기 어부의 일은 흩어진 이스라엘을 한 데 모아 그들을 본래 땅으로 데려오는 사역을 말한다.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상한 것을 치유하며 죽어가는 것을 살리는 회복의 사역인 것이다. 바로 그 일을 이제부터 시몬이 하게 된다는 말이다. 예수 역시도 당신 사역에 제자들을 모집하여 함께 하고자 하셨다. 그들을 부르신 목적은 분명했다. '사람을 구하여 살리는 일' 그 사역을 감당케 하기 위함이었다.
목적을 분명히 하여
전염병의 위기 시대에 교회가 초점을 맞추어야 할 방향은 분명하다. 예배당에서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나 교세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나 그 보다 더 중요하고 분명하게 해야 할 일은 시대 아픔과 고통, 위험에 처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살리는 일이다. 그것이 부르심을 이들, 그런 이들이 모인 교회가 할 일이다. 적어도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의 경우, 그들은 그 반응에 명확했다. 그들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에는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 (마4:22) 했고 마가복음에는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막1:20) 했다. 어부에게 배는 생업이었고 심지어 가부장적 당시 사회에서 아버지까지 두고 따랐음은 누가의 말처럼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랐다는 말이다.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전염병 사태에서 오늘의 교회가 힘들어하는 이유는 복잡하지도 않다. 그냥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이었고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결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만나기 전, 제자들은 그때까지 붙잡고 살아온 것만이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예수를 만나자 그 모든 것을 두고 예수를 따라갔다. 소중히 여겨왔던 많은 것들을 버려야 예수를 따를 수 있는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면 이전 같은 일상의 회복이 아니라 다른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 것이다. 교회 안에서의 예배와 친교라는 전통적 모습들은 점점 약화될 것임이 틀림없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들은 여전히 '예전의 교회, 의전적 신앙생활 그대로 회복되기를 원하고 있다. 이전 방식에 여전히 미련을 두고 있는 것이다.
미련 따위는 버리고
창12:1~2에는 아브람에게 이르는 신의 약속이 묘사되어 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의 인생 전환점이 되는 부르심이었다. 부르신 후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라고 언약하셨다. '복을 많이 받을 것이다'가 아니라 ‘복이 될지라’. 즉, 너로 인해 너의 가족, 너로 인해 너의 이웃, 너로 인해 세상이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 신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떠나라 하신다. 죽을 악에서 떠나 마음과 영으로 새로 살라 하신다. 죽는 줄도 모른채 우리 인간의 악은 역사의 각종 전염병들을 야기시켜 왔다. 단지 우리 인간의 편리와 욕심을 채우고자 서슴없이 파괴하였기에 여러 바이러스들이 창궐하였다. 그 이기심을 멈추지 않으면 우리는 더 큰 위험에 빠질 것이고 더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
그럼에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라는 하늘 탄식을 외면하고 있다. 우리의 악으로 모든 피조물들이 여전히 고통을 겪고 있음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 사유 구조, 당연시 해왔던 생활 습관들을 코로나19 이후에도 지속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제는 하늘의 탄식과 피조물들의 고통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나를 따르라’는 신의 그 부름에 주저할 이런저런 현실 이유는 수천가지일 수 있다. 그런 자들에게 예수는 단호히 말씀하셨다. "죽은 자들이 그들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마8:22).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작은 빵을 나누는 미미한 것일지라도 약한 자를 불러 하늘 뜻을 이루시는 이는 그 소소한 행위 하나로 큰 기적을 이루신다.
마무리
여전히 이전 삶을 고집하면서 하늘 시민이 될 수는 없다. 이전 방식을 버려야 새 사람이 된다. 시몬과 야고보와 요한처럼 제자들은 예수를 따르기 전후가 분명히 달랐다. 이전 의전에 집착치 않아야 새 문명을 읽고 해석할 수 있다. 나 하나만, 내 가족만, 내 나라만을 고집하는 많은 기도에 이제는 신도 지치셨다. 예수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5:15)고 바울도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을 취하여 그와 그 주변 사람들을 살게 하시는 하늘 소리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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