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21. 20:1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성경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예수가 확대된 70명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전국 지방과 촌락으로 보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자기보다 앞서 가서 아픈 이들을 고치고 신의 나라가 다가왔음을 알리라는 임무를 지워 파송하였다. 이런 일에는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예수는 느닷없이 파송하였다. 그들은 방어할 무기도, 돈도, 예비 식량도 없이 떠나야 했다. 무전 선교사역이었고 목숨을 걸 수도 있는 전도여행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대접해 줄 사람들에게로 가는 것이 아니라 이리 같은 사람들이 사는 세상 한가운데로 파송을 받은 것이다.(눅10:1~24)
이리들의 세상
이리 와 같은 사회, 그것은 자기와 다른 것을 용납하지 않는 사나운 사회이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고 외모가 다르며 삶의 방식이 다르면 그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적대시하는 폭력적인 세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도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그들이 겪을 어려움을 예측하여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하셨다. 동시에 제자들이 이 일들을 잘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신이 일을 맡길 때는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함께 주심을 믿기 때문이었다.
과연, 제자들은 전도 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큰 기쁨으로 돌아왔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이 사역하는 곳에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역하는 도시나 시골 어디에서도 동역자들을 발견하였다. 그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공감하며 기꺼이 협조하고 후원해주는 신의 자녀들이 '이리들의 세상'에도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전적으로 예수를 따라나서지는 못하지만 그 삶과 가르침에서 빛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은 오늘에도 곳곳에 있다. 그러니 진리의 길이 고독하다느니 '나 혼자만, 고작 우리들만'이라는' 생각은 큰 오만이다.
엘리야는 야훼의 선지자로 신의 일을 하다가 이세벨의 흉계로 광야에 숨어 죽고자 하였다. 갈멜산에서 수백의 사이비 사제들을 처단할 때 환호하던 그 지지자들, 환호하던 그 무리들이 다 사라지고 따르는 사람 하나 없이 자기만 남았다고 죽으려 하였다. 그러나 야훼가 바알신과 아세라 신을 따르지 아나한 7000명을 남겨 두셨음을 그는 몰랐다. 뜻을 함께 하는 7000명의 사람을 보았다면 그가 맥이 빠져 있지 않았으리라. 그 7000명 속에는 위대한 엘리사도 있었고 훗날 아합 왕조를 무너뜨리는 예후도 있었다.(왕상19:1~18)
여전한 가능성
어느 시대에나 바알에게 무릎을 굽히지 않는 사람들은 있다. 세태의 흐름을 거슬러 새 하늘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고 새 땅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들이 있다. 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함을, 이념보다 인간성이 더 소중함을, 약자들을 신의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사는 이 세상 곳곳에 있다. 하나님이 그런 이들을 남겨 두셨다. 세상이 어두워도 등불 밝혀 살아가려는 이런 사람들이 있어 우리 삶의 희망 가능성은 여전하다.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지니 때가 이르매 기쁨으로 열매를 거두리라(갈6:9' 온 세상을 다 비추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자리 나마 밝히고자 등불 하나 켜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아름답다. 그 삶이 행복하다.
그런데 파송받았던 제자들에게는 동지를 얻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이 있었다. 귀신들도 그들에게 복종했다는 사실이었다. 귀신은 '분열의 영'이다. '나와 너'를 갈라놓았고 '우리와 저들'을 편 갈라 왔다. 우리 속에 다른 사람에 대한 의심과 증오와 질투의 독을 뿌리는 존재가 귀신이다. 변신에도 능하여 돈의 모습으로, 이념의 모습으로, 체면이나 자존심의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돈, 이념, 체면, 자존심이 귀신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것들을 통해 귀신이 우리 삶에 침투한다는 말이다. 돈과 이념, 체면과 자존심, 그런 것들이 우리 삶을 사람답게 살도록 돕는다면 그것은 신의 선물이나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귀신의 덫인 것이다.
의심과 증오와 거짓은 우리 사는 세상을 오염시키는 독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 삶을 공허하게 만들고 이리가 득실대는 환경을 만들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내 것을 지키기 위해 담을 더 높게 쌓았다. 빈틈없는 보안장치를 이중삼중으로 해놓고도 안심하지 못한다. 이런 오늘의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살아감에 미숙하고 세계 연대에도 생경하다. 그러다 보니 세상은 뱀과 전갈이 득시글거리는 사막이 되어 버렸다. 뱀과 전갈을 잘못 건드리면 물거나 쏘아댄다. 그리고 그 독은 치명적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이리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행복을 경험하는 복
그런데 파견된 제자들은 또 다른 경험도 하였다. 새로운 세상을 보았고 또 그렇게 살았다.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신의 사랑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새 관계를 경험하였던 것이다. 이런 세상은 낙원에서 추방된 이레,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었다. 그러나 야훼가 계신 곳, 예수의 마음이 있는 사회, 신의 정신이 살아 있는 공동체에서는 불가능했던 세계가 가능할 수 있음을 몸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기뻤고 행복했다.
이런 일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능하다. 그 이름에 어떤 주술적인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이름이 그 존재 자체에게 때문이다. 유다 하면 배신자, 히틀러 하면 정신병적 독재자가 떠오르듯, 이름은 존재, 바로 그 자체이다. 예수, 그는 자기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사셨던 분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기를 철저히 비우셨던 분이었다. 그러니 그 예수의 이름이 가치 있는 곳, 그의 삶을 따르려는 이들의 공동체에는 귀신은 힘을 잃는다. 권력의 귀신, 이기심의 귀신이 발붙일 곳이 없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서 예수의 꿈이 실현되고 그 영이 숨 쉬는 곳에서 새 삶이 출발한다.
이런 삶을 추구하고 그런 세상을 경험함은 정말 행복한 인생이다. '행복하도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이여! 솔직히 너희에게 말하거니와 많은 예언자와 왕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도다.'(눅10:24) 사람이 살만한 세상을 이루어 보라고 지금도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가 행복한 순간, 귀신이 망하였고 마귀들이 하늘에서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셨다는 예수의 선포에서 이미 그 나라는 시작되었다. 그 행복한 삶을 경험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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