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 18:28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의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저희가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더불어 말씀하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저희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저희가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 (막6:45~52)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동행을 경험할 기회는 잘 나갈 때보다 어려울 때, 특히 절망적 상황에서 더 많이 갖는다. 예수가 물 위로 걸어오는 기적 이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반나절 전에 있었던 오병이어의 기적과 연결되는 사건이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오병이어의 기적 바로 다음에 이렇게 나온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막6:45) 예수는 오병이어 기적 현장에서 서둘러 제자들을 배로 태워 벳새다로 보냈다. 날은 저물었고 밤이 찾아왔다. 제자들은 이미 10리 정도를 간 상태였다.
1. 어깨 힘을 빼고
그 밤바다를 노 저어 가던 중 제자들은 난제를 만났다. 반대편에서 역풍이 불어온 것이다. 그렇게 역풍이 부니 제자들은 괴로웠다. 한 밤중인 데다가 등불도 없는 바다 한가운데서 역풍에 표류하는 처지의 제자들, 그런데 그 장면을 산 위의 예수가 보고 있었다. 10리면 4km가 거리인데 그 밤중에 그 먼 거리를 어떻게 보았을까? 조금 전까지 오병이어 기적으로 제자들은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당시 한 부락 인구가 평균 3000명 정도였는데 2만 명 넘는 사람들이 모였었으니 인근 많은 부락들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혼잡하고 시끌벅적했을 것이다. 빵을 먹고 물고지를 나누어 먹은 사람들은 그 빵과 물고기가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 누구에 의해 조달되었는지 잘 몰랐다. 다만 직접 그 빵과 물고기를 떼어서 나누어주던 그 제자들은 똑똑히 보았다. 기적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그들의 힘, 그 허세를 빼기 위해 그 밤중의 바다로 내몰았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들의 힘과 인기로 되는 것이 아님을 그 밤바다의 폭풍에서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먼저 제자들을 보낸 예수는 산으로 올라가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이 출발할 때 이미 그들과 함께 있었던 것과 같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역풍을 만나자 물 위로 그들에게로 걸어와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 장면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삶이라는 폭풍의 바다를 건너 약속의 땅에 도착하고자 하는 우리의 신앙 여정, 그 과정에서 나의 힘, 내 지략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 예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로만 되는 것임을 물 위를 걷는 사건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마치 노아의 방주처럼 모두가 빠져 죽었던 그 물, 바로 그 물 위를 예수가 밟고 선 것이다.
그 풍랑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제자들은 있는 힘을 다하였고 있었다. 2만 명 넘는 사람들에게 빵과 생선을 떼어주던 그 손으로 지금은 살아남고자 열심히 노를 젓고 또 젓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 제자들의 처지처럼 우리는 살면서 많은 내적 외적 역풍들을 만난다. 사업이 망하고 자식이 속을 썩이며 급기야 병이 드는 등,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외풍에 시달린다. 뿐만 아니라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죄로 인한 역풍도 나를 괴롭게 한다. 원만치 못한 성격, 불안, 우울, 염려, 욕심이 나를 흔들 때마다 힘들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알고 우리와 함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그 어두운 세상과 암담한 현실에서 오직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를 건져내주는 예수를 경험케 한다.
2. 하나님이 함께 하니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41:10) 우리가 오늘 어떤 상황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그 풍랑 속에 함께 계신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43:2) 그런데 어떤 이들은 불만이다. '함께 있기만 하면 무엇을 하겠는가? 능력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예수가 물 위로 걸어왔다. 힘겨운 처지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와 함께하려고 그 물 위를 걸어온 것이다. 이는 그가 하나님이었음을 말해 준다.
피조 세계에 제한된 우리 피조물들은 자연법칙을 거스를 수 없다. 하나님도 자연을 창조하고 법칙을 만들어 그 법칙으로 운영하신다. 법칙을 만든 창조자가 그 법칙에 스스로 매이는 것이 ‘공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창조자 하나님은 때로 당신이 만든 자연법칙을 유보시키기도 한다. 여호수아 10장에는 이스라엘과 기브온 민족의 전쟁이 묘사되어 있다. 그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기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해가 지려는 중이었다. 그래서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태양을 멈추게 명령하니 태양이 멈추었다. 히스기야 왕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이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10도 물러가게 만들기도 했다. 성경에는 이처럼 하나님이 자연법칙을 초월한 예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하나님만 할 수 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질량불변의 법칙을 넘어선 사건이었다. 물 위를 걸은 것은 만유인력의 법칙을 초월한 사건이었다.
우리와 함께 있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연법칙을 극복할 능력의 하나님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고도 재미있는 장면을 연출시켜 우리를 당혹게 한다. ‘바람이 거스리므로 제자들의 괴로이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 즈음에 바다 위로 걸어서 저희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막6:48) 밤 사경은 새벽4~6시에 해당되는 시간이다. 초저녁에 떠난 제자들이 그 새벽까지 사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가 물 위를 걸어왔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고 안심되는가? 그런데 그냥 지나가려 했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성경이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사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지나간다’는 표현들이 몇 군데 나온다. 그런 표현들은 대체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때 사용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하나님 한 것,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예수가 십자가를 진 현장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도 하였다.
3. 시련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어떻게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는가? 죄와 공존할 수 없는 분, 그 죄를 저주하여 죽일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거룩이 십자가에서 공의로 나타났다. 그 십자가에 하나님의 신실함이 나타난 것이다. 십자가는 창세기부터 약속해 온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하게 이루어지는 현장이었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나타난 것,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이었던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지나간다'는 표현은 이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표현이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영광이 왜 역풍이 부는 풍랑 현장에만 나타나는가? 멋있고 우람한 현장에는 나타날 수 없는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가서 여호와의 앞에서 산에 섰으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왕상19:11)
인생의 고난, 죄로 인한 내 부실과 갈등에서 오는 고통은 견디기 힘들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현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버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내 곁에 계심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인생들은 세상 역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배우며 믿음이 탄탄해진다. 구약에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이 구체적으로 묘사된 대표적인 두 곳이 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사6:1~3) 웃시야 왕이 죽저 남유대 왕국은 영적으로나 국가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을 때였다. 그 바닥에서 예언자는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아니, 더한 상황도 있었다. 이미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모조리 끌려가고 처참하게 황폐화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1:26~28) 이미 나라는 망하였고 주요 백성들은 적국의 포로로 끌려간 지경이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장난 바벨론 제국의 그발 강가에서 예언자 에스겔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이다. 이렇듯 이스라엘의 상황처럼, 우리 사는 날들의 역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다. 하나님은 우리의 처지나 상황을 통해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다.
결론
생존본능으로 살아온 우리들, 학교 교육을 통해 훈련된 상식으로 무장되어 온 우리들은 은연중에 진화론에 물들어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다. 그래서 ‘적자생존, 뛰어난 자가 살아남고 존경 받는다’는 진화론적 삶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 결과, 가난하고 못생겼으며 잘 안 되는 인생을 실패자라고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낙인을 찍곤 하였다. 그러나 거듭난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창조물이 하나님의 목적 속에 지음 받았고 그분의 계획 아래 지금을 지나가고 있음을 믿는다. 그러니 다소 못났던 잘 났던, 잘 풀리던 넘어지던 그 모양 그대로, 자체가 하나님의 귀한 자산들인 것이다. 그 하나님은 당신의 자산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보고 계신다. 절망일 것 같은 삶의 풍랑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광을 드러낼 타이밍을 찾고 계신 것이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사4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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