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의 불마차처럼

2024. 5. 19. 17:24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선지자의 생도 오십인이 가서 멀리 서서 바라보매 그 두 사람이 요단가에 섰더니 엘리야가 겉옷을 취하여 말아 물을 치매 물이 이리 저리 갈라지고 두 사람이 육지 위로 건너더라 건너매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이르되 "나를 네게서 취하시기 전에 내가 네게 어떻게 할 것을 구하라." 엘리사가 가로되 "당신의 영감이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하나이다." 가로되 "네가 어려운 일을 구하는도다. 그러나 나를 네게서 취하시는 것을 네가 보면 그 일이 네게 이루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고 두 사람이 행하며 말하더니 홀연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격하고 엘리야가 회리바람을 타고 승천하더라 엘리사가 보고 소리 지르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 마병이여!" 하더니 다시 보이지 아니하는지라' (왕하2:7~12)

 

설교의 1차 대상은 설교자 자신이다. 설교문 작성 후 목사는 먼저 자신에게 설교해야 한다. 그 설교로 영혼이 거룩한 삶을 사모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야망을 부추겨진다면 그 설교문을 파기해야 마땅하다. 하나님의 말씀만큼은 불순물이 섞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성경의 저자는 모세가 아니고 요한도 아니며 바울도 아니다. 성령이 저지이다. 성령 하나님이 각인의 성품과 지식, 그들의 사회적 배경을 도구로 하여 저작한 것이다. 그러한 성령은 설교에도 간섭하기에 사람들 듣기 좋은 말, 사람들 듣고 싶어 하는 말만 해 줄 수 없다. 그래서 성경은 그 성령 하나님을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라 묘사하고 있다.

 

1. 거짓 영을 조심해야

그런데 마귀에게 속한 영도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일4:1) 마귀가 보낸 자들, 거짓 선지자들이 말씀을 전하는 교사로, 목사로, 선교사로 일한다. 그들은 복음에 불순물을 집어넣어 세상을 미혹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흔들기도 한다. 어떤 권사가 자기 교회 상황을 하소연하였다. 교회의 목사가 복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 ‘헌금 많이 하면 복 받는다, 봉사하고 헌신해야 잘 산다이런 설교만 한다는 것, 그리고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무슨 구실을 대서라도 쫓아낸다는 것, 도저히 더는 안 되겠기에 목사께 항의하려 하는데 사람들이 만류하며 하는 말 그래도 기름부음 받은 목사님한테 대들면 저주를 받을 텐데’ 하며 선뜻 나서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목사들 중에도 마귀의 영을 받아 속이러 온 거짓 선지자가 있다. 그만큼 교회를 선택하고 목사를 분별하는 것은 내 영혼을 맡기는 중대한 사안이다‘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2:10) 우리들은 이 땅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 선한 일이란 '토브즉 ’보시기에 좋았더라‘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 그분의 영광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함이 선한 일이다. 그런 삶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를 믿는 것이니 그것을 하나님의 일이라 한다. 그러니 선한 일하나님의 일’, 그리고 믿음은 모두 같은 말이다. 우리는 이 땅에서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 하다가 가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큰 착각을 하며 산다. 하나님의 일 하다가 가는 인생이라는 이 간단하고 기본적인 사실을 잊고 산다는 말이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그 예를 읽을 수 있다. 어떤 부자가 소출이 많아지자 곡간을 더 크게 만들고 소출을 거기에 쌓아두고 이제 여러 해 쓸 물건을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라 하였다. 대체 그 부자가 무슨 큰 잘못을 했나? 열심히 일해서 벌었다. 그리고 남을 속이거나 도적질을 한 것도 아니었다. 창고에 잘 쌓아두고 노후를 행복하게 즐기겠다는 것이었다. 그런 인생을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부른 것일까? 솔직히 그런 부자의 노후 대책은 우리 모든 인간들이 원하는 보편적 로망이여 노후대책이 아니던가?

 

2. 착각에서 벗어나

하지만 세상사는 모든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이라'는 착각에서 비릇된다. 보이는 자기 소출이 많아졌다 하여 그것이 자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 그렇게 생각하는 자들은 모두 어리석은 자들임을 성경의 부자 비유는 말해 준다. 대체로 그런 착각으로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청에 잘 응하지 않는다. 마태복음에는 이에 해당하는 비유가 나온다. 어떤 주인이 잔치를 열고 사람을 초청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 새로 산 밭에 가야 했고 새로 산 소도 시험해 봐야 했으며 시집가고 장가도 가야 했기 때문, 그들 모는 땅의 것에 관심을 두고 사는 이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주인의 마음이 어떠하며 그 잔치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자신들의 소유인 밭이나 소가 더 중요했다. 땅의 일에 열중하느라고 하늘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주인은 종들을 시켜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불러 모았다. 이들은 이 땅에서 자기 소유나 소출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세상의 재산이나 고소득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 하나님의 초대에 응한다는 것, 그러니 너무 바쁜 삶이 바람직하기만 할까? 사업이 너무 잘 되고 확장되는 것이 좋기만 할까? 물론 안 되는 것보다 좋은 것이고 할 일이 없는 것보다 있는 일들로 바쁜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내 신앙생활에 방폐를 가져오면 그 성공을 재고해보아야 한다. 장사가 가장 잘 되는 주일날 가게 문을 닫는 교인들이 있다. 주일날 가게 문을 여니 예배당에 와서 앉아 있어도 온통 매출 생각뿐이라는 그들의 고백,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않는 것도 아닌, 아닌 것도 아닌 것이 점차 교회 생활이 소홀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차 없이 문을 닫았다고 한다. 물론 세상적으로 따져 볼 때는 엄청난 손해일 것이다.

 

하지만 신앙생활에 방해가 된다면 어떤 손해라도 감수하겠다는 결단이 필요하다. 그렇게 우리는 이 땅에서 죄로 오염된 내 육신을 죽여가야 한다. 신앙생활은 내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빼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어리석은 자여 너의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또 너의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15:35~38) 성경은 우리 육신을 라 하였다. 가 죽지 않으면 부활의 몸을 입을 수 없다. 육신의 탐욕, 세상을 향한 집착을 죽이지 않으면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 땅에서 죄된 육신의 것들을 죽여가야 한다. 그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옛사람 60만 명이 죽고 새 사람 60만 명이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3. 고난을 통한 영광으로

현실의 이 세상 땅에서 내 육신이 죽는 것을 순종이라 한다. 그리고 성경은 그 순종을 거룩이라고도 부른다.’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2~44) 우리가 예수처럼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십자가의 삶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과해야 할 사람들이지 예수 믿어서 만사형통을 증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마태복음 17장의 예수의 변화산 사건은 그 예를 보여 준다. 예수가 변화산으로 제자 세 명을 데리고 올라갔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였다. 거기서 부활의 몸으로 변모한 당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그런데 왜 12명 모두가 아니고 세 명만 데려갔을까? 변화산에서 변모한 예수 영광을 본 자와 보지 못한 자의 차이가 어떠한지를 알려 주기 위함이었다. 예수는 변화산에서 장차 당신이 빛나는 영광으로 이 땅에 올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런데 그런 영광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관정 없이는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는 자신이 죽고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 산에 함께 올랐던 그 제자들에게 본 것을 말하지 말라 했다. 대체로. 사람들은 영광은 좋아하나 그 열광에 이르는 십자가 과정을 싫어한다. 그러니 그 산에서 변모된 예수를 보았던 베드로도 여기가 좋으니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이대로 살자고 했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 바로 영광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그런 것이다. 그런데 죽음, 즉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 영광 속에 하늘로 올라간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엘리야였다.

 

엘리야는 십자가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영광만 누리려던 유대인들의 선망이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예수는 변화산에서 내려오며 그 엘리야가 벌써 왔다고 말했다. 이 말에 제자들이 놀라워하며 다시 물었다. ‘우리가 그토록 선망하던 엘리야가 정말 왔습니까?‘ 예수는 다시 대답하였다. 엘리야가 이미 왔는데 사람들이 그를 임의로 대하였다’ 다소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와 함께 산에 올랐던 세 제자들은 '그 엘리야가 세례요한인 줄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세속적 사람들 사고방식으로는 불병거를 타고 산 채로 하늘로 올라간 멋진 엘리야, 그랬던 그가 헤롯에게 붙들려 참수당한 세례요한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변화산에서 예수의 영광을 본 세 제자는 세속적 믿음의 방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엘리야의 영광은 세례요한의 삶, 즉 십자가를 통과해야만 얻을 수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

믿음의 사람들은 다가오는 하늘나라 원리로 현실을 산다. 그런 삶의 원리로 살기에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기도 한다. 나를 비우고 죽여서 하나님과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삶, 그것이 십자가의 삶이다. 지금이라도 당장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내 속에 들어와 계신 예수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그 예수와 함께 하늘 삶을 연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가 다시 오는 그날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내 안에 있는 예수,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지만 종종 체감케 하고 비움에서 채워지는 은혜의 순간들, 그때가 예수의 재림이다. ‘재림이라는 원어 파루지아뜻이 나타나다이다. 그렇게 내 삶에 나타나는 예수의 삶이 재림인 것이다그런 우리들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주저 없이 고백할 수 있다.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22: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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