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20. 16:40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21:25)
구원을 얻은 우리는 내 현실에 침노해 온 나의 천국을 어떤 모양으로 살아내야 하나? 사사기는 그런 삶의 성공 가능성과 실패의 참담함을 계시해 주는 책이다. 이 책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약속의 땅은 궁극적으로 완료된 하나님 나라를 지칭한다. 하지만 구원받은 후에도 여전히 육신을 입고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들, 그런 우리가 살아내는 현실에 숨어 있는 천국의 모습을 지칭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 들어와 있는 천국을 살면서 어떤 영적 전쟁을 어떻게 치러내야 하는지를 사사기를 통해서 적나라하게 볼 수 있다.
1. 자기 옳은 대로
사사기를 읽다 보면 마치 후렴구처럼 반복되는 어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이 사사기의 저자를 사무엘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이 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속의 땅에 들어와서도 자기들 마음대로 살았던 그들이 어느 날 사무엘에게 와서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였던 것,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된 이스라엘의 모습을 사무엘이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삼아 살아야 하는 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살아간다는 것, 그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스스로 그들의 왕이 되어 그들 삶을 당신의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 그런 전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이 사사기를 통하여 보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광정을 통하여 우리의 불가능과 무력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도 있다. 아울러, 그런 어두움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는 장면들도 보게 된다. 그러니 이것은 비단 사사기만의 내용이 아니다. 모든 성경의 내러티브이기도 하다. 성경은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지만 전체를 하나로 묶으면 ‘언약’이라는 주제 하나이다. 그 언약 내용을 한 문장으로 잘 표현을 해 놓은 곳이 출애굽기 19장이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출19:5~6) 이는 하나님이 세운 만고불변의 언약이었다.
이 언약이 창세기에서 어떻게 주어졌던가? 선악과나무와 영생나무로 나타났다. ‘내 말을 잘 듣고 순종하면 생명나무 실과를 먹고 영생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이 제시한 몇 가지 규율 항목을 잘 지켜내는 정도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티끌에 불과한 자기 존재를 자각하고 인정함을 말한다. 그렇게 지워내고 비워진 내 속에 하나님이 담기는 것을 ‘연합’이라 하고 그 상태를 ‘순종’이라 한다. 그때에야 피조물인 우리는 바로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성경은 그 상태를 살아있는 상태라 하고 그렇지 못한 상태를 죽은 상태, 사망이라 한다. 그러니 존재라는 것은 하나님과 연합이 된 상태에서만 존재일 수 있다.
2. 근본을 망각한 채
그런데 피조물인 우리에게는 창조자와 완전하게 연합될 능력이 없다. 그것은 창조자인 하나님 쪽에서의 능력이 피조물인 우리 삶에 개입해야만 가능하다. 그런 신의 개입이 내 힘으로 신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다는 인간의 교만을 깨고 창조자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만드는 것을 구원이라 한다. 이 이야기의 시작이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이었다. 그 동산에서 처음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했다. 하나님은 순종치 못한 그들을 죽여야 했다. 당신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연 짐승 가죽으로 만든 치마가 등장하고 그 치마라는 은혜에 의해 인간의 사망이 덮여버렸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10)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존재, 그렇게 무력한 존재로 살도록 지어졌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 앞에 순종하는 자로 설 때 의의 옷을 입히고 당신 백성으로 삼는다. 그런 피조물이 언제부터인가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게 되었음은 자기 자존심을 세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것을 죄라고 한다. 피조물이 창조자 앞에 ‘나도 자존심이 있다’고 자기주장을 한 것이다. 그 상태를 죽음이라 하니 아담은 그때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죽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담의 실패를 은혜로 덮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창3:21) ‘정녕 죽으리라’는 당신의 언약에 의해 반드시 죽어야 할 자들의 사망,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덮이는 이야기가 성경 전체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담과 하와를 통해 당신의 언약 성취라는 은혜를 설명하였고 그들의 자손을 통해서 거듭 덮으심의 은혜를 계시해 주었다.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보내어 그의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창3:23) 인간에게 근본 된 토지를 갈게 함은 ‘너희가 어떤 존재인지 잊지 말라’는 것, 그러니 흙에서 만들어진 존재에게 그 흙을 갈게 함은 배려였다. 그래야 자기 실체를 깨달아 순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간들 속에는 그 근본 됨을 잊고 사는 이들이 많다. 아니, 대부분인 듯하다. 자신의 티끌 됨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 할 아담들이 오히여 자기를 내세우고 자기 외의 형제들을 죽이는 살인자의 길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죽임을 당한 동생 ‘아벨’은 그 이름의 의미는 ‘허망, 덧없음’이었다. 근본 된 토지를 가는 존재들, 자기 한계를 아는 이들의 자기 인식이 ‘아벨’, 즉 허무함, 없음'인 것이다.
3. 두 종류의 인생들
자기 존재, 자기 제사를 지키겠다는 ‘있음’의 대명사 가인이 ‘덧없음’을 알고 사는 아벨을 죽였다. 그때부터 세상에 존재하게 될 두 종류의 인간이 분리되어 서로 다른 삶을 살았다. 그 한 종류는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웃을 살해하는 부류들이고 다른 한 종류는 그들에게 죽지만 덮음의 은혜로 부활하는 은혜의 사람들이다. 전자는 그렇게 살다가 영원한 사망으로, 후자는 죽어서 살아나는 역설의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통하여 당신의 은혜를 설명해 주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외 당시 모든 인간들은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로 살았다.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6:4~5) 은혜를 입은 자 노아, 그런데 그 은혜를 입은 노아가 120년 동안 어떻게 살았던가?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살았다. 노아 그 개인의 삶은 현실적으로 죽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노아만 살려냈다. 네피림, 거인, 용사 모든 유명한 자들은 죽였다. 대체로 세상 힘을 소유한 자들, 그 힘을 의지하여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싫어한다. 전능자 앞에 자신들의 한계와 약함이 드러남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벨탑 사건으로 인간의 가능성과 열심을 무너뜨린 하나님은 그런 인간들 중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통해 당신의 구원이 어떻게 은혜로만 주어지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구원의 시작과 끝이 모두 하나님이었음을 그의 생애로 계시해 준 것이다. 구원은 우상물에 기대어 살던 인생에게 하나님 편에서 먼저 찾아감으로 시작된다는 것, 그래서 모리아산의 결단이라는 예수 십자가로 완료된다는 것을 계시하여 보여주었다.
솔직히 아브라함은 그 와중에도 인간적 계산과 비겁함, 실수와 실패의 삶이 여전하였었다. 그렇게 성경은 그 아브라함이 나이고 우리들이 그 아브라함임을 암시해 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통해 구원과 영생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자 그의 후손들을 애굽으로 들여보내 거기서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힘의 세상을 상징하는 그 애급에게 당신 백성들이 핍박받는 모습을 연출해 낸 것이다. 그 세상의 장자들이 살해당하였고 그들의 힘을 상징하는 애급 군사들이 홍해에 수장당하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눌려 살던 이들은 덮음의 은혜로 살아났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한 것은 불평과 원망뿐이었다. 그랬음에도 은혜로 그들을 이끌어냈다. 이후 광야 40년 고생은 불신앙의 결과였다. 가나안 땅의 거인들을 두려워하여 자신들은 그곳에 들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함은 자기들을 지금까지 이끌었고 또 이끌어갈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다.
결론
오늘이라고 다를까? 하나님의 판단보다 내 판단을 더 의지함이 선악과 도발이다. 하나님은 그런 아담들을 광야로 내몰아 자신들의 한계를 체험케 한다. 우리에게 삶이라는 광야를 허용함은 내가 자력으로 설 수가 없음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인생이라는 이 광야는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그래서 스데반도 그 광야의 이스라엘을 '광야 교회'라고 불렀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교회의 모형이었다. 하나님은 그 광야에서 율법을 주었으니 이는 우리에게 한계를 깨달아 희생제사로 상징되는 십자가의 필연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는 약속의 땅에 들어온 우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과정과 사건과 사연 속에서 어떻게 당신께 향하고 있는지를 보고 계신다.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행7: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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