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2. 21:43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 왕 제 십팔 년에 아비얌이 유다 왕이 되고 예루살렘에서 삼 년을 치리 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아비얌이 그 부친의 이미 행한 모든 죄를 행하고 그 마음이 그 조상 다윗의 마음 같지 아니하여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다윗을 위하여 예루살렘에서 저에게 등불을 주시되 그 아들을 세워 후사가 되게 하사 예루살렘을 견고케 하셨으니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사는 날 동안 전쟁이 있었더니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도 전쟁이 있으니라 아비얌의 남은 사적과 무릇 행한 일이 유다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아비얌이 그 열조와 함께 자니 다윗성에 장사되고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왕상15:1~8)
‘임하옵시며’라는 주기도문구의 원문 ‘에르코마이’를 직역하면 ‘나라가 오게 하소서’이다. 과거수동명령형이니 이미 이루어져 있는 그 나라이고 그 나라가 내 힘이 아니라 외부의 작용으로 현실화되기를 요청하는 기도이다. 이미 왔있는 그 나라, 하늘에서 이루어진 그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약함을 안고 사는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청한다. 이 두려움은 열심히 하지 않으면, 또는 성취하지 못하면 심판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런 두려움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요 사랑 안에서의 자유도 아니다. 경외심이라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다. 거룩한 하늘 차원으로의 합류, 이것이 하나님과의 연합이라는 하늘나라이다. 성경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두려워하라’는 모순적 명령은 바로 그러한 의미이다.
1. 두 개의 왕국
우리에게 임할 그 나라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나라’라는 원어 ‘바실레이아’는 ‘통치, 다스림, 주권’의 개념이다. 국가의 3요소인 국민, 주권, 영토,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주권이다. 그 주권을 ‘바실레이아’라 한다. 이 단어는 ‘왕국’이라는 뜻도 있다. 하늘나라의 통치원리는 섬김이다. 섬김과 다스림은 하늘나라에서 같은 단어인 것이다. 성경에서도 같은 단어로 쓰였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반대편 왕국을 가리키는 것에고 '바실레이아'가 쓰였다. 지상 왕국인 것이다. 이 나라의 주인공은 언제나 인간이었다. 인간들의 힘과 지혜, 행위로 구축되고 운영되는 나라이다. 반면에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움직이고 그 사랑에 의해 구축되는 나라이기에 두 나라는 충돌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도 '나라와 나라가 대적할 것이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 땅의 세상 왕국은 하니님의 생기에서 멀어진 죽은 흙들의 나라이다. 그 나라에서 사는 이들은 선과 악이라는 패러다임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뜻과 의지로 세워지는 지상왕국을 목표로 하여 산다. 지상 삶의 성공을 목적으로 사는 그 각인의 지상왕국 건설들이 모여져 거대한 세계로 건축된다. 그 동력은 선악과를 도발했던 아담들의 자존심이다. 그 아담들은 자기가 주인공이 된 자기 왕국으로 만들려 한다. 그래서 예수는 그러한 아담들을 일러 건축자라 불렀다. 그 건축자들이 돌을 버렸다. 예수라는 산 돌, 모퉁이 돌, 은혜의 돌을 자기들 울타리 밖으로 내던졌다. 자기들도 힘이 있고 지혜가 있으니 은혜라는 나약함으로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당신의 나라가 이 세상, 이 땅에 속한 나라가 아님을 분명하게 말하였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요18:36) 이 말이 의미를 제대로 이해 못 했던 성미 급한 베드로가 말했다. ‘예수여! 당신은 죽지 마시오. 내가 돕겠오. 죽기까지 당신을 쫓아가서 보호하겠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는 호통을 치며 말했다. ‘사탄아. 내 뒤로 꺼져라.’ 베드로뿐이겠는가? 오늘의 우리도 예수를 그렇게 만들면 예수는 세상 임금이 되고 세상 나라의 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율법주의의 섬김이기에 사탄이라 하였다. 하늘나라가 그런 나라였다면 예수는 복음 아닌 율법으로 주어 추종자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백성들이 왕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 드리는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왕인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섬기는 나라이다.
2. 불가피한 충돌
하늘나라의 왕은 자기 자원을 동원하여 자기 백성들을 섬긴다. 그것이 왕의 죽음이었다. 그러니 예수는 죽어야 했다. 섬기는 나라이 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라는 땅의 나라가 아니니 그 나라는 이 땅의 나라와 충돌한다. 그 왕이 십자가에서 죽기 전까지 세상 누구도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분명한 복음을 이야기했음에도 사람들에게는 그 말들이 율법으로 들렸다. 결국 왕은 그 말과 함께 죽어야 했다. 그들이 들은 율법으로 그 왕을 죽였다. 그리고 그 왕이 진리의 영으로 우리에게 다시 왔다. 그것이 우리를 섬겨주는 왕, 죽어서 우리를 살려주는 왕, 예수 그리스도이다. 한때 마귀는 그런 예수에게 땅의 나라 왕이 되라고 부추긴 적도 있었다.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며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4:8~9)
성경에서 높은 산은 항상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킨다. 고지대 산성에 예루살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높은 곳 예루살렘에서 마귀는 천하를 보여주며 세상 왕이 되라고 미혹하였던 것이다. 마귀는 이상한 혼령 같은 존재가 아니다. 나쁜 말을 가진 자,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되게 사용하도록 만드는 자가 마귀이다. 진리가 아닌 것을 말하고 전파하는 자들은 그런 마귀의 하수인들이다. 예수는 그 시험을 이겨냈다. 우리의 대표로 그 시험받았고 마침내 이겨냈다. 그러니 그 예수의 뒤를 따르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시험이 온다. 그러나 그가 이긴 것처럼 우리도 이기게 한다. 하나님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고 그렇게 신앙하게 하는 이들, 그 마귀나 하수인들의 유혹, 그렇게 하는 이들에게는 천하만국이 주어진다는 시험을 이겨내게 한다.
그런 유혹에 미혹됨은 사망이다. 장차의 세상 나라와 함께 멸망인 것이다. 예수는 그런 나라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그것은 하늘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믿음의 삶은 세상 나라에서 빠져나와 약속의 나라로 옮겨가는 출애굽 여정이다. 그리고 반드시 그 약속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약속되어 있다. 그래서 광야라는 이 삶의 여정에서 종종 실패하지만 소망이 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무엇을 했던가? 하나님과 싸운 일 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 죽였다. 세상적 시각에서 그것은 실패로 보였겠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는 성공이었다. 그렇게 죽어야 산다. 그런 의미에서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네가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한 말도 저주만은 아니었다. 원문 ’무트 타무트‘는 ’죽어야 산다‘는 진리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공급자 하나님
그런데 인간은 말씀을 왜곡해왔다. 그 왜곡의 중심에 인간의 자의식이 있었다.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 하와는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고 왜곡하였으니 죽기 싫다는 것, 하나님 앞에 꺾이기를 거부한 것, 성경은 그런 것을 죄라고 하였다. 하와뿐이겠는가? 오늘의 우리들은 매일의 삶에서 내 뜻을 내세우고 하나님 앞에 그 뜻 꺾기를 불편해하지 않는가? 그래서 전투이다. 세상과의 전투이고 내 안에서의 전투인 것이다. 이 전투는 내 삶이 다하는 날까지, 숨이 멎는 그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 그런 이 땅의 전투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것이 하늘 양식인 만나이다. 성경에서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 하늘나라의 신민들인 우리는 하늘 양식인 이 말씀을 떠나서 살 수가 없다.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마4:17) 여기 ‘천국’이라는 원문 ‘호 바실레이아 호 우라노스’는 ‘그 하늘들의 그 나라’이다. 복수이니 진리를 선물 받아 땅의 차원에서 하늘 차원으로 합류된 우리들을 가리킨다. 그런 이들이 소속된 나라를 천국이라 하니 말씀에 의해 탄생된 존재들인 우리를 가리킨다. 우리들은 그 진리의 머리인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었으니 이미 한 몸이다. 진리로 온 예수는 본래 하늘이었다. 그런데 그 안에는 이미 우리의 이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우리의 이름들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그렇게 예수를 머리로 한 하늘 지체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성전이다. 그것은 피조물인 내 행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로서 완성되어 가는 은혜의 시간들로서 완성되어 간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고전15:50) 그렇다. 혈과 육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은 행위밖에 없기에 그 나라가 될 수 없다. 그러면 늘나라는 어떻게 될 수 있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3) 어떤 자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인가? 절대적 결핍을 느끼는 인생, 그것 없으면 살 수가 없는 자, 즉 ‘프토코스’이다. 그 생명, 말씀 없으면 죽는 인생,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말씀이 갈급한 사람, 그것만이 생명이라고 자각하는 인생들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다. 그래서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했을 때 그 말이 ‘프토코스’이고 ‘너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주고 오라‘ 했을 때도 ‘프토코스’이다.
결론
그러니 ‘바실레이아’는 생명의 유일한 길이요 말씀의 화신인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키고 동시에 그 나라로 존재된 우리들, 그리스도 진리와 하나로 연합된 우리들을 가리킨다. 그 나라 ‘바실레이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공간적인 천국만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현실 역사에서 그 나라를 추측하거나 상상하여 그려낼 수 없다. 혹 그런 식으로 그 나라를 말하고 그려내는 이가 있다면 거기는 이미 그 나라가 아니다. 거기가 이 은하계 밖의 우주 어딘가에 지금 하나님이 맨손으로 가득 채워놓은 곳이라면 인간들은 로켓을 만들어서라도 거기로 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영원한 나라, 완전한 나라, 그런 나라를 우리는 다만 이 땅의 하늘살이에서 문뜩문뜩 간접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그 간접적인 경험만으로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가치관, 지향점은 날로 날로 새로워진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요18: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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