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28. 21:0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사53:10~11)
삶의 기회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할 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세월을 아껴야 함'에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는 권고까지 더하였다. '술 취함'으로 대표되는 방탕한 삶이 세월을 낭비케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믿음의 씨를 품고 사는 이들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삶을 살아내기 위해 술 취한 삶이 아닌 성령으로의 삶을 살아야 한다. 얻은 구원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은 감사의 삶을 살기 마련이다. 바로 그러한 삶을 가리켜 사는 날들의 예배라 한다.
1. 예배가 무엇인가?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12:1) 구약의 제사는 예수 안에서 완성되었기에 우리는 그런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된다. 그럼에도 그 제사에 담긴 원리와 정신은 예배와 예배적 삶에 그대로 구현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구약의 제사가 어떤 것이었고 그것을 예배적 삶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가? 원래 ‘예배’라는 말은 노예가 주인을 ‘섬기다’는 단어로 쓰였다. 고대의 주인은 자기 재산인 노예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노예는 주인 앞에서 재산, 인격, 이름조차도 주장하거나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니 하나님을 예배한다 함은 내가 하나님께 그 같은 입장에 서는 예식이다.
‘예배’라는 히브리어 ‘샤하’는 ‘부복하다’는 뜻으로서 배까지 땅에 대고 납작 엎드리는 행위를 나타낼 때 쓰였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서 나는 납작 엎드려 없어지고 오직 그 하나님만 드러나는 것이 예배인 것이다. 신약에서 ‘예배’를 뜻하는 또 다른 단어로는 ‘프로스큐네오’가 있었는데 이 단어에서 ‘프로스’는 ‘향하여’라는 전치사, ‘큐네오’는 ‘입 맞춤’이라는 뜻이니 '누군가를 향하여 입 맞추는 행위'를 뜻한다. 고대에서 이 단어는 노예가 주인의 발에 감사와 사랑의 입맞춤을 표현할 때 쓰였다. 그러니 예배는 애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발에 입을 맞추는 행위이다. 오직 그 대상에게만 관심을 두고 그 대상의 영광을 위한 행위이어야만 예배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마음을 따로 숨기고 있고 내심 다른 것들을 섬기면서 드리는 예배는 진전한 예배일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과 우상을 동시에 섬겼던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나를 버렸다’고 표현했던 것이다. 몸과 마음, 거기에다가 영혼까지 함께 하지 않은 예배는 시간 낭비요 하나님 앞에서도 위선일 뿐이다. 영어로도 예배는 worship이니 이는 '가치'를 뜻하는 'worth'와 '신분'을 나타내는 'ship'의 복합어이다. 즉 최상의 가치를 받기에 합당한 분에게 최상의 의미를 돌려드리는 것이 예배라는 말이다. 이런 예배의 개념에는 ‘나’라는 존재가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드러나야 한다는 메시지가 예배라는 말에 담겨있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대표적으로 다섯 가지 제사를 드리곤 했다.
2. 제사들로서의 예배들
구약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번제와 소제, 속죄제와 속건제, 그리고 화목제라는 제사들을 드렸다. 먼저 태워서 드리는 번제는 하나님 앞에 나를 태워서 드린다는 의미였다, 드리는 사람은 자신을 대신할 제물을 드리면 제사장이 그 제물에 안수 후 각을 뜬 후에 태워서 올렸다. 그 안수는 내 죄를 제물에게 전가시키는 일종의 회개 행위였다. 즉 나를 죽이되 생각과 마음까지도 하나님 앞에 낱낱이 내놓는 시간이 예배인 것이다. 무엇을 사용해서 나를 각 뜨고 죽일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히4:12~13)
소제에서 ‘소’는 ‘흰 소’자이다. 그래서 흰 옷을 소복이라고도 한다. 충성과 헌신의 제사이니 하나님 앞에 곡식을 희게 빻아서 드린다. 내 생각, 내 고집이 응어리져 있으면 안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빚도록 내드린다. 그런데 이 소제를 드림에서 주의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 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 (레2:11) 누룩은 빵을 부풀리는 것, 즉 헌신과 봉사를 부풀리지 말라는 말이니 자랑하지 말라는 뜻이다. ‘꿀을 넣지 말라’ 함은 그 헌신과 봉사를 포장하지 말라는 뜻이다. 반면에 이 소제에 반드시 넣어야 할 것이 있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지니라.’ (레2:12) 이는 헌신과 봉사에 녹아들어 가서 겉으로는 나타내지 않음을 상징하니 조용한 섬김을 뜻한다.
속죄제라는 것도 있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속죄의 뜻으로 드리는 제사였다. 모든 사람들, 평민들이나 성직자나 자기 죄가 드러나면 이 제사를 드려야 했다. 우리가 언제 죄를 깨달을 수 있던가?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볼 때 깨닫게 된다. 죄의 지표가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 사는 날들의 예배를 위해서는 늘 말씀 앞에 나를 비추어야 한다. 또한 속건제라는 제사도 있었다. 속죄제와 속건제의 구별이 쉽지 않지만 속죄제는 이미 저질러져 돌이키지 못할 죄에 대한 제사였고 속건제는 자기 잘못에 대한 보상 여지가 남아 있을 때 드리는 제사였다. 살인이나 안식일 침범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에 속죄제를 지냈다. 반면에 부당 이득을 취하고 죄인 줄 몰랐다가 나중에 죄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상대에게 부당이득 부분을 돌려주고 제사장에게 가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속건제였다.
3. 삶이 예배적이어야
예배는 예배당 안에서의 경건만으로는 안 된다. 그 삶이 예배적이어야 한다. 남의 돈을 사취하여 피해를 주고 자신은 죄 사함을 받았다고 감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면 손실을 입은 그 피해자가 그 모습을 보고 무엇이라 하겠는가? ‘네 하나님은 너를 용서했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용서 못 한다’ 이 땅의 교인들이 이 속건제 정신에 무지해왔기에 이 시대의 교회들이 비난을 받고 있다. ‘기독교인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세상에서도 잘 먹고 잘 살고 저 하늘에서도 자기들만 좋은 자리 차지하겠다고 저렇듯 열을 내는 이기적인 집단이라‘고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면 다른 이를 아프게 했던 것에 대한 사죄를 행위로 옮겨야 하고 부당 이득에 대하여서도 마땅히 보상과 배상을 하여야 한다. 그것이 속건제 정신이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오네시모라는 노예를 만났었다.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신자가 되었다. 알고 보니 그는 빌레몬이라는 골로새 교인의 노예였었다. 그 오 네시 모는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달아났다가 로마 감옥에서 갇히게 되었고 거기서 바울을 만나 신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주인은 자기 노예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었고 더구나 도망갔을 경우 잡히면 십자가형에 쳐해 졌었다.. 바울은 그런 처지의 오네시모에게 다시 그 주인 빌레몬에게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가 훔친 재산에 대해서는 바울 자신이 대신 갚아 주겠노라고 빌레몬에게 편지하였다. 바로 이런 것이 예배적 삶으로 구현되어야 할 속건제이다. 이는 단지 돈을 갚는 것 그 이상의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과 이웃의 관계를 바르게 정립하고 그 관계가 요구하는 것을 성실하게 수행해 내라고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런 삶이 ‘의’이다. 그러니 남은 불행하게 만들고 자기만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이들은 가짜 구원팔이들이다.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마5:23~24) 그런데 만일 나의 허물을 갚아야 하는 상대방을 찾을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죄값 받을 사람을 찾지 못했을 때는 헌금한다 ‘로‘ 적용하면 될까? 그렇다면 교회로서는 환영할 일이겠지만 꼭 그런 뜻만이 아니다.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25:40) 신앙생활을 하니 오래전에 죄인 줄 모르고 저질렀던 많은 일들이 생각날 때가 있다. 그런 죄들은 어떻게 속건 하나? 주변의 어려운 이들에게 나누고 베풀어야 한다.
결론
모든 제사는 화목제라는 제사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는 잔치로서 다른 제사와는 달리 드려진 제물의 고기를 성직자와 제사를 드린 이들, 더 나아가 이웃들까지 함께 먹게 되어 있었다. 보통 소를 한 마리 잡으면 약 800kg의 고기가 나온다. 거기서 기름은 떼어 태우고 가슴살과 뒷다리 한 개만 제사장에게 주고 나머지는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먹는데 보통 400kg 정도 되는 양이었다. 유대인들은 해가 지면 다음 날이 되기 때문에 해지기 전까지 먹어야 했다. 제사 예식이 끝나면 해 질 녘까지 남은 두세 시간 동안 고기 500kg을 먹어서 없애려면 나눠줘야 했다. 좋아하는 사람만 나누어서는 소화할 수가 없었다. 미워하는, 아니 원수까지 주어야 가능했다. 그러니 그 화목제를 지내면서 이웃, 더 나아가 원수까지도 섬기는 삶을 배우는 것이다. 구약의 이 제사 정신이 오늘날 예배와 삶에도 그대로 이어져야 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엡5: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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