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5. 20:1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1~7)
5월 가정의 달, 특히 그중에도 어린이 주일에 교단이나 강단, 모든 주제들이 우리 아이를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집중되는 시즌이다. 한 가정에 찾아온 귀한 생명을 제대로 키우는 일은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나름이 비법을 찾는다. 유대식 탈무드 교육법으로부터 시작하여 몬테소리 교육이니 유아영어교육이니 글로벌인재 조기교육이니 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사랑하는 어머니 밑에서 사랑하는 딸이 자라고 기도하는 아버지 아래에서 신실한 아들이 자라감을 왜 모를까? 그런 부모의 가정에서 이가 예수가 태어났고 30년을 메시아 소명자로 성장하였다.
1. 사랑의 가정에서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가장 간과되는 인물이 있다면 그의 아버지 요셉일 것이다, 마리아, 천사, 동방박사, 심지어 헤롯까지 모두 주요 등장이지만 요셉은 대사가 거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요셉을 메시아 탄생 이야기에서 단역이나 조연 정도로 여기기도 한다. 그에게 약혼자가 임신했다는 것은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당장 파혼감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묘사하였다. 과연 그의 그런 심성이 마리아에 대한 태도로 나타났다. 그래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아마도 마리아를 깊이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더욱 신중하게 배려한 결론이었을 것이다. 그때 꿈에 천사가 나타나 말했다. ‘그녀의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
아무리 천사가 출현하고 신의 고지였다 할지라도 요셉은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며칠을 심각하게 고민하고 또 생각했을 터, 쉽지 않았을 일이지만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결국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이는 마리아에 대한 요셉의 사랑이 깊지 않았다면, 또 그가 기도하는 신실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랑하기에 거기에 따르는 아픔과 수모를 묵묵히 짊어졌다. 이런 요셉의 '사랑에 대한 아픔'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에게 메시아 탄생의 기쁨도 주어졌다. 그러니 요셉은 메시아 탄생 이야기의 단역이나 조연이 아니라 당당한 주연이었다. 이후 하나님의 소명으로 산 예수, 그 그리스도적 소명을 다하고 떠난 사랑의 삶을 바울은 어떻게 회고했던가?
바울은 그 사랑을 '아가페'라는 단어로 정의하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에만 독점적으로 적용되는 단어로 알고 있다. 그런 인식에서 아가페 사랑이 아닌 남녀의 사랑 '에로스'나 친구의 사랑 '필리아'를 질적으로나 수준이 낮은 다른 사랑이라 여겼다. 그러나 본래 헬라어 자체에는 '아가페'라는 명사가 없었고 또 그런 뜻이 없었다. 고전 헬라문학에 '사랑하다'는 뜻의 동사는 가끔 등장하지만 명사 '아가페'는 오직 성경에서만 쓰였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바울이 '기독교적인 사랑'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쓴 용어였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하나님 사랑을 넘어서 그 사랑을 받은 우리 인간들 사이의 사랑에도 적용하여 사용한 것이다.
2. 사랑의 정의
바울은 고린도에 보내는 편지에서 사랑을 언급하는 서두에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괭과리’라는 표현을 하였다. 그것이 무슨 말일까? 바울 당시 이교도 예배, 특히 디오니소스 예배 특징은 요란하였다. 시끄럽게 꽹과리를 치거나 요란하게 나팔을 불어대는 의식이 다반사였다. 이는 신의 관심을 끌어내거나 귀신을 쫓아내고자 하는 일종의 포퍼먼스였다. 그러나 그런 요란스러운 퍼포먼스라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설령 자신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전제되지 않으면 이교도 예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었다. 또한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 했다.
바울이 말한 예언이란 설교를 말한다. 그런데 사랑 없이 정죄만 있는 설교는 두려움을 줄지는 모르겠으나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도 마찬가지이다. 많이 아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만큼 알지 못하는 이를 우습게 볼 위험이 있다. 그런 사람이 혹 교회생활에 들어서면 정말 잔인해질 수 있다. 사랑 없는 믿음으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 아픈 곳을 찌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가진 것으로 구제하는 것은 윤리적 행위이나 사랑 없는 구제는 사람에게 모욕감을 줄 수도 있다. 자기 우월감이나 구제하는 자신의 만족을 위한 선행은 사랑이 아니라 거만이다. 더 나아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 역시 의미가 없다.
흔히들 신을 위해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을 순교라 하고 거룩한 사랑이라고도 한다. 다니엘이 끌려갔던 포로시대 이레 마카비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은 순교를 최고의 덕목으로 간주해 왔다.. 하지만 그런 순교라 할지라도 그 동기가 자기를 드러내려는 것이었다면 의미가 없다. 현실에서 그런 자기희생적 행위도 결과적으로는 얼마든지 거만의 산물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진짜 사랑은 무엇인가? 바울은 진짜 사랑이라고 소개하는 아가페 사랑의 특징들을 현재시제로 묘사하여 생생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 하나가 사랑은 ‘참음’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참음이 잠깐이 아니라 지속적이라 하였다. 아니, 어쩌면 사는 날 내내 연결되는 사안이었다.
3. 사랑은 지금 여기서
사랑의 특징인 ‘참음’은 언제나 사람에 대한 참음이었지 상황에 대한 참음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래 참음처럼 우리도 다른 이에게 오래 참아야 한다. 이런 인내는 겁 많은 자의 약함이 아니다. 오히려 강한 자의 강인함이다. 그런 사랑의 소유자는 온유하다. 온유하니 인자한 것이다. 이런 사람은 당연히 시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좋은 것을 주지 못해 미안해할 뿐이다. 그러니 이런 사랑의 사람이 어찌 교만하겠는가? 다른 사람의 생각과 나와 다름을 존중하니 무례를 모른다. 무례를 모르니 무리하게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계산적 사랑, 거래적인 사랑을 않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에 대해 분노하지 않으니 노여운 기억으로부터 해방된 심성이니 자유케 되었다. 이것이 진리로 사는 기쁨인데 하나님은 이 쉽지 않은 진리로의 삶을 마주하는 용기를 주신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참는 능력을 주시고 모든 것을 덮을 수 있는 힘도 주신다. 그런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가페의 사랑이다. 이런 믿음 안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바란다. 그래서 바울은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견디게 한다고 찬양하였다. 그가 말하는 '견딤'은 참고 버티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극복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런 '사랑의 찬가'에 어찌 된 일인지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기 '사랑'을 '그리스도'로 바꿔 읽어도 문제가 없을 만큼 그 사랑이란 곧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짐작케 한다. 예수가 보여준 그 사랑,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준 온전한 아가페 사랑이 그 예수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과 인격이 우리 삶과 성품으로 지금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 사랑이다.
그 아가페의 화신인 예수는 우리에게 '필리아'의 사랑도 보여주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요15:13~15) 친구라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 당신의 사랑을 에로스로도 표현하였다는 것이다.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2:10~13)
결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이 깊고도 은밀한 친밀을 호세아 예언자는 '신실한 남편'으로 그리기도 하였다. 예수도 요한복음의 '고별 기도'에서 이 신비한 하나 됨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해주옵소서.“ (요17:21) 이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신비를 말한 것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당신을 ‘교회의 신랑'이라고 은유하였다. 이렇게 성경은 풍성한 언어로 높고 깊게, 그리고 넓게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고 있으니 그 사랑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주는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고 사랑하는 이를 정말 귀하게 여기는 사랑이 에로스 사랑이며 공동체의 비전속에 그것을 위해 끝까지 동행하는 사랑이 필리아 사랑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 가지 사랑이 모두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풍성한 상징과 은유를 통해 우리를 귀히 여기고 당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며 세상 끝까지 동행하는 그 거룩한 사랑이 지금 우리 안에 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당신을 낮추었던 그 사랑이 우리 삶이 마감되는 그날까지 우리와 함께 할 것이다.
'그 때에 어떤 갈대아 사람들이 나아와 유다 사람들을 참소하니라 그들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이여! 왕이 명령을 내리사 무릇 사람마다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엎드리어 금 신상에게 절할 것이라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하리라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이제 몇 유다 사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왕이 세워 바벨론 도를 다스리게 하신 자이어늘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 (단3:8~12)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엘리야의 불마차처럼 (1) | 2024.05.19 |
---|---|
뜻으로 사는 하늘나라 (0) | 2024.05.12 |
그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1) | 2024.04.28 |
하늘들의 하나님 (1) | 2024.04.21 |
이렇게 기도하라 (0) | 2024.04.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