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2024. 4. 28. 19:21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36:22~23)

 

 

하나님의 뜻을 찾아 사는 이들을 가리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또 어떤 곳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히브리어로 이름이라는 단어 은 그 철자적으로 분석된 말씀이다. 이 단어가 관계부사로 사용될 경우에는 거기라는 뜻이 된다. ‘여기가 아닌 거기라는 뜻이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이 단어에 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마임이 붙으면 샤마임’, 하늘이 된다. 그러니까 물이 있는 거기’이니 성경에서 물은 진리를 뜻하는 바, 또 그 진리는 하나님을 내용으로 하고 있기에 '진리가 있는 거기'가 하늘인 것이다.

 

1.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그런데 이제 그 진리가 내 안에, 우리 안에 있다. 그러니 진리인 하나님을 밖에서 찾는 기도는 이상한 기도이다. 기도는 진리인 하나님을 품고 있는 자들이 지금 여기서 드리는 거룩함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거룩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구약에서는 거룩의 개념을 담으로 두르다, 울타리를 치다는 모양으로 설명하였다. 담이나 울타리는 설치되는 순간 안과 밖을 확연하게 구별시킨다. 바로 그런 구별됨을 깨끗하다고, 즉 거룩이라고 한다. 그래서 에덴동산도 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동산이라는 단어 자체가 울타리였다. 이는 그곳이 하나님의 구별된 성전이여 장소였음을 상징한다. 하나님과 한 울타리 안에서 그분이 공급하는 생명력으로 존재하는 상태가 거룩인 것이다. 그러니 피조물인 우리의 거룩은 거룩한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 위해서는 내 안에 들어와 연합된 사랑의 하나님이 삶에 나타나야 한다. 이는 우리 삶이 세상 도덕이나 윤리, 사회 규범 그런 것 이상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윤리적으로 흠없이 산다 하여 거룩한 것이 아니요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처신한다 하여 거룩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세상 선행이나 사회 규범들은 밖에서 나를 옭아매는 계율일 뿐이다. 그런 것으로는 우리가 하늘 아버지를 닮은 하늘들이 될 수 없다. 우리는 부득이함으로 행하는 종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유로이 행하는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아버지처럼, 그 아버지의 말씀대로, 그 이름에 걸맞게 세상의 말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계19:11) 

 

하늘이 열렸다. 그리고 그 열린 하늘 안에 어떤 이가 있었다. 그 이름이 충신과 진실, 그리고 거기에 쓰인 단어가 믿음진리이었으니 곧 예수였다. 그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이름이요 그리스도라는 그 이름으로 믿음과 진리라고 새겨졌다‘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의 위에 기록하리라’ (계3:12) 내 능력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게 하려는 아담적 열심들에 대하여 성경은  육신의 일이라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밖에서 나를 두드리고 있다. 내 육신의 습과,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내 옛사람을 죽이기 위해 두드리고 있는 것이다.

 

2. '쉠'이라는 그 이름

이름을 뜻하는 히브리어 은 일반 명사이면서 고유명사이기도 했다. 노아의 세 아들 중 첫째 아들 이름이 '쉠'이었다. 그 이름을 가진 쉠은 훗날에 어떤 무리의 조상이 되었다‘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창10:21) 노아의 아들 ‘에벨자손의 조상이었다. ‘에벨이라는 이름은 ‘(반대편으로) 건너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에서 이브리또는 히브리라는 말이 나왔으니 쉠이 곧 히브리인들의 조상이었다는 말이다.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간 자, 광야에서 요단강을 건너간 자들의 조상이 ’인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즉 건너갔던가? 유월절 어린양으로 거룩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의 죄로 죽은 희생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다. 그렇게 어린양의 유월절 희생으로 사망이라는 저주의 바다를 건너간 이들은 더 이상 이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미련 두지도 않는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건너가다는 말을 절뚝거리다는 말과 같이 사용하기도 했다. 하나님이라는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이 건너간 자들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사용한 것이다. 이는 그들의 조상 야곱이 얍복 강가, 즉 요르단 동쪽의 실패한 곳에서 약속의 고향 땅으로 오는 그 광야에서 절름발이가 된 사연과 연관된다. 얍복강 가의 밤기도에서 엉치뼈 손상을 당했던 야곱은 남은 인생을 지팡이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야 했었다. 그 사건은 그렇게 해야만 요르단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건너갈 수 있다는 구원의 상징이었다. 그러니 당신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며’라는 주기도문의 이 문구는 하나님이 약속해 왔던 언약의 성취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불성실한 삶은 하나님의 이름을 열국, 즉 이방인 중에 더럽혔다. 하나님의 이름은 곧 말씀이었고 그분의 형상을 담은 우리들이었다.

 

그런 우리가 그 이름을 하늘이 아닌 땅에서 더럽혔고 지금도 더럽히고 있다. 그 하늘 뜻으로 사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선택받은 하늘 자녀들이 하늘에서 떠나 이 땅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 상태를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예언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진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이스라엘 족속이 그 고토에 거할 때에 그 행위로 그 땅을 더럽혔나니 나 보기에 그 소위가 월경 중에 있는 여인의 부정함과 같았느니라. 그들이 땅 위에 피를 쏟았으며 그 우상들로 더럽혔으므로 내가 분노를 그들 위에 쏟아 그들을 그 행위대로 심판하여 각국에 흩으며 열방에 헤쳤더니 그들의 이른바 그 열국에서 내 거룩한 이름이 그들로 인하여 더러워졌나니 곧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이르기를 ”이들은 여호와의 백성이라도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자라.“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이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내 거룩한 이름을 내가 아꼈노라.” (겔36:17~21)

 

3. 더럽혀진 이름을 깨끗게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들이 하나님의 거룩을 오해하였다. 이 땅에서 자기의 의지와 능력으로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성경은 바로 그런 것으로 하나님의 거룩함이 훼손되었다고 말한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힘으로 구원을 이루겠다 하는 이들, 선한 삶으로 생명에 이를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이들, 먼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던 이스라엘이 그런 오류를 범하였다. 율법을 잘 지키고 제사를 꼬박꼬박 드리면 구원 얻고 하나님의 자리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이방 땅으로 흩었다. 그래서 이방 땅에서 이방인처럼 살게 하였다. 그것으로 여호와의 백성이 여호와의 땅에서 떠난 상태임을 상징으로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창세전 언약대로 당신에 백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율법의 이스라엘이 당신의 이름을 더럽혔음에도 긍휼을 거두지 않았다.

 

하나님의 긍휼은 죄가 무엇인지를 말씀, 즉 성경으로 가르쳐 그 더럽혀짐에서 건져내고자 하였다. 그런 다음에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깨끗하게 만드는지를 이렇게 설명하였다“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6:24~28) 당신의 땅, 즉 언약으로 데리고 가서 '맑은 물'이라는 말씀을 뿌려 그 이름들을 정결케 하겠다는 것, 그것을 새 영으로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라고도 표현하였다. 그리고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는 것이라고도 표현하였다. 그런 다음에 당신의 신을 우리 속에 두어 우리로 하여금 그 율법을 행하게 만들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니 이는 창세전 언약이자 새 언약이었다‘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5:26~27) 바울의 이 언급에서 물로 씻는 것말씀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과 동격이다. 그렇게 해서 깨끗하게 되면 그것을 거룩하게 된 것이라’는 말이‘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고 몸을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10:22) 하나님의 더럽혀진 이름이 어떻게 거룩하게 되는가? 진리의 말씀으로 더럽혀진 마음이 씻기면 그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 이 일을 예수가 홀로 이루어냈으니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이다. 이것을 믿고 받아들인 우리는 그 예수와 똑같이 삶의 십자가 도상에서 내가 부인당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삶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이 말씀이니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이름이었다.

 

결론

그 예수처럼 그 이름들인 우리도 하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오늘을 산다. 그런데 그 삶은 율법이라는 의무를 허물고 사랑이라는 은혜를 세우는 삶이다. 율법과 제사라는 옛것을 허물고 예수라는 이름으로 앞서 제물로 살다 간 그분처럼 그 한 제물로 거룩케 된 우리도 그런 삶으로 우리 이름이 하늘의 새 예루살렘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주기도문의 의미이니 우리에게 그 이름이 거룩하게 됨은 하나님이 완성해 놓은 우리의 묵시 속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거룩해진 이름들이요 자녀들로서 그 하늘 아버지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하늘의 존재들이다.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 (히1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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