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14. 16:28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6:9~13)
'내가 품고 있는 가장 깊은 소원이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는 말이 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무엇을 가장 소원하고 있는가?' 그것이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가슴 깊은 곳의 소원이 나를 정의하고 나의 기도가 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내가 지금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가가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하는 척도일 수 있다.
1. 나는 어떤 기도를 하는가?
가슴 깊은 곳 소원이 기도로 나타나고 그 기도가 내가 누구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예수가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가르쳐 준 기도문이야말로 하나님 안에서 내가 누구인가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정체성이다. 예수가 ‘이렇게 기도하라’ 함은 그 가르쳐 준 그 기도 내용들을 내 소원으로 살아야 하고 그런 소원으로 사는 이들의 정체성은 분명해진다. 그러니 우리는 주기도문의 기도 내용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주기도문은 예수가 가르쳐 준 기도문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계시이자 그분의 깊은 소망이다. 그러니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 하나님의 가장 깊은 소원을 알 수 있고 또 그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만듦으로써 하나님의 소원과 일치 될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기대하시는 바를 우리에게 소원하게 만드셔서 우리로 당신의 계획대로 만들어가기 원하심을 주기도문에서 읽을 수 있다. 병행구절인 누가복음의 주기도문 초입은 이렇게 시작된다.'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눅11:1) 제자들이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사실, 이런 요구를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유대인이었고 그런 유대인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기도가 무엇인지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즉 제자들은 기도를 할 줄 몰라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줄줄이 꿰고 있던 시편의 내용들이 모두가 기도문들이었다.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유명한 기도문들도 많았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 기도문들을 수시로 암송했었다. ‘카디쉬’라는 짧은 형태의 기도문으로부터 시작해서 18번 축복기도라 불리는 ‘세모네 에스레’라는 기도문 등, 특히 카디쉬와 같은 기도문은 유대인들이 매일 두세 번씩 낭송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게 기도를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으며 시편 기도를 줄줄 외웠던 그들, 그럼에도 제자들이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으니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그들 나름의 배경이 있었다는 말이다
2. 주기도문의 배경
예수 당시에는 메시아가 곧 와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것이라는 기대, 그 대망이 유대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었다. 그 메시아가 이제 곧 오리라는 대망 사상, 그 메시아가 와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려면 그에 앞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널리 퍼져 있었다. 메시아가 오기 전에 먼저 그의 사자를 보내실 것이라는 것, 그래서 이러한 부흥운동이 유대인들 안에서 많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일에 의기투합코자 오여든 자들로 단체들도 많이 생겨났다. 바리새인들의 바리새 운동도 그 하나였고 사해 인근 쿰란에 모여 살던 에센파도 그 하나였으며 세례요한도 회개와 심판의 부흥운동을 주도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모여든 단체나 운동 주도 세력들은 모두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기도문을 만들어서 암송을 했었다. 각자 자신들의 신학적인 이해와 이상을 담아 표현하는 특별한 기도문을 만들어서 외웠던 것이다. 세례자 요한도 자신의 신학과 종말적 소망 등을 담아 기도문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했었다. 따라서 제자들이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 함은 기도 방법이나 정의를 물은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도 하나의 부흥운동을 이끌어 가는 무리가 되었으니 우리의 슬로건은 뭡니까?’ 이것을 물은 것이다. 즉 ‘당신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십시오’라는 요청이었다. 주기도문은 이런 맥락에서 읽혀야 하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런데 마태복음 6장의 주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일부이다.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 대상을 유대인으로 하여 기록하였다. 그래서 그의 복음서를 다른 말로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라고도 한다. 마태는 복음서 1장에서 예수 족보부터 시작해서 그의 생애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2장에서 예수가 태어나자마자 애굽으로 쫓겨갔다가 다시 애굽에서 나오시는 장면, 3장에서는 예수가 세례를 받는 장면, 그리고 3장 후반부터 4장에서는 그 예수가 광야의 시험을 받는 장면을 묘사해 놓았다. 그 이후에 산 위에 올라 산상수훈을 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 주기도문이 소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마태복음에서는 예수의 생애 전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동일하게 전개된다. 그래서 마태는 굳이 예수가 애굽에서 나온 지 30년이 지난 후의 사건인 세례를 그가 애굽에서 나온 사건 바로 뒤에 붙여서 기술하였다.
3. 저주에서 복 있는 자로
그렇다면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산상수훈은 어느 지점에 해당될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의 시내산에서 가나안에 들어가 살 때에 그들이 지켜야 할 율법들을 그 시내산에서 받았다. 그런 것처럼 예수가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 그들에게 천국 백성이 지켜야 할 규범들을 산상수훈을 통해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신약의 산상수훈은 구약의 시내산인 것이다. 그 구약의 출애굽이 어떻게 끝이 나던가?
‘모세가 레위 제사장들로 더불어 온 이스라엘에게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아 잠잠히 들으라. 오늘날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백성이 되었으니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복종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과 규례를 행할지니라.“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지니라.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그 이웃의 지계 표를 옮기는 자...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 무죄 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신27:9~12)
이 부분은 구약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는 언약의 절정이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가나안에 들어가면 에발산과 그리심산에 서서 레위인들이 열두 가지 언약을 이야기하면 아멘, 아멘 해야 하는데 모두 이러저러한 것을 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아멘’으로 끝난다. 그러나 산상수훈의 천국 백성과 하나님이 맺는 언약은 ‘복이 있나니’로 시작된다.율법 아래 있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은 죄 가운데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기에 ‘‘죄지으면 저주받는다’로 끝이 나지만 이제 신약에서 새 이스라엘, 천국 시민에게 주어지는 새 계율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주어지는 구원이기에 복으로 시작된다.
결론
구약에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나의 노래를 가르쳐 부르게 하라는 장면도 있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이 노래를 써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쳐서 그 입으로 부르게 하여 이 노래로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 (신31:19) 이 노래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불순종했는지를 증거 하게 하기 위해 부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노래를 외워 불렀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불순종을 증거 하는 노래였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모세 노래와 대조적으로 예수가 동일하게 우리에게 외워 부르라는 기도가 있었다. 그것이 주기도문이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죄악 된 민족인가를 외워서 불러야 했고 신약에서는 영적 출애굽을 한 우리가 저주의 자리에서 복된 자리로 이끈 하나님께 불러야 할 노래가 있었으니 그것이 주기도문이었다. 주기도문은 우리의 신분과 정체성,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그리고 이 땅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기독교 핵심들이 들어 있다. 주기도문에는 일곱 가지의 기도 제목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고 그 뒤에 일곱 가지의 기도 제목이 나열되어 있다.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 나라이 임하옵시며
3)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5)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6)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7)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일곱’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의 숫자요 완전수이다. 예수가 주신 기도문이 완전한 기도인 것이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만 정확하게 공부하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일곱 개의 기도 중 세 개는 하나님 당신에 대한 기도이고 네 개는 우리에 대한 기도이다. 이런 주기도문에 대한 분명한 이해는 은혜의 삶에 필수이다.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거룩한 이름을 위하여 (1) | 2024.04.28 |
---|---|
하늘들의 하나님 (1) | 2024.04.21 |
거룩에 목숨을 걸고 (1) | 2024.04.14 |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 (1) | 2024.04.07 |
고난에서의 말씀과 기도 (2) | 2024.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