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4. 21. 20:08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하가랴의 아들 느헤미야의 말이라 아닥사스다 왕 제 이십년 기슬르월에 내가 수산궁에 있더니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느1:1~5)
믿음의 신실한 총독 느헤미야는 비통해 하였다. 고향 땅의 황패함과 참담함을 전해 들었기 떄문이었다.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이 없었다. 신실한 이들은 이럴 때 하나님을 향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들을 행하여 약속한 그분의 언약을 상기시켜 기도한다. 그런 유대인들의 방식처럼 예수도 당신의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의미를 가르쳐 주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늘 아버지께 구하라고 말이다.
1. 하늘 아버지께 구하라
기도가 무엇인가?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여 하나님께 얻어 내는 도구나 방식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성령의 도움으로 깨달아 원하게 되는 것이 기도이다.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대하여 우리는 모른다. 하늘의 존재 양식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그런 이 세상으로 당신의 말씀을 보였고 성령을 보냈다. 그 성령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께 받아내야 할 어떤 빚이 있음을 알게 하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먼저 약속한 것이기에 ‘빚’, 또는 '채무'라고 한다. 내가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준다고 약속한 것이 있었다는 말이다. 알고 보니 그것 없으면 우리는 사망에 쳐해질 신세,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처지였었다. 그러니 준다 한 그것을 당연히 받아내야 했다. 그렇게 구하게 되는 것이 ‘아이테오’이다. “너희가 악할 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의 천부께서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11:13)
천부, 즉 ‘하늘 아버지’라는 표현에서 이 하늘은 도대체 어떤 하늘일까? 성경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그가 아랫물에 빠져 죽고 위의 물로 올라오는 사건, 즉 세례였다고 전한다. 과연 그 세례 후에 성령이 왔으니 그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이끌었었다. 십자가를 세례로 묘사함은 그가 그렇게 죽자 성령이 왔기 때문이다. 성령이 온다는 것은 무엇이 열린다는 뜻, 성경은 그것을 ‘하늘들이 열린다’고 묘사하였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마3:16) 한글개역성경에는 ‘하늘’이라고 번역하였지만 원문은 ‘하늘들’이다. 유독 히브리인들만이 그들 언어에서 ‘하늘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3:17)
여기 ‘하늘들’ 안에서 소리가 나왔다. ‘이것이 아들이고 내 사랑이다’는 소리였다. ‘하늘들’이 열리고 거기에서 성령, 즉 생수가 쏟아져 나왔는데 그 생수가 어떻게 나왔던가? 많은 물소리로 ‘이것이 내 아들이고 이것이 나의 기쁨이다’는 소리로 나왔다. 예수가 저주의 물에 빠져 죽고 즉, 위의 것으로 올라왔더니‘하늘들’이 열리고 성령이 소리가 ‘이것이 아들이고 이것이 기쁨이라’ 했다면 도대체 그 ‘하늘들’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부분의 주석서들은 여기의 ‘하늘들’이라는 단어를 ‘장엄 복수형’이라고 설명한다. 신학자들 말이다. 천상적인 그 신령함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표기했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 것이라면 성경에 나오는 모든 ‘하늘’이 ‘하늘들’로 표기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곳에서는 그 ‘하늘’이 단수로 되어 있다. 게다가 관사도 있다가 없다가 하는 등 일관성이 없다. 그러니 그 주장은 추론일 뿐이다.
2. 하늘, 그리고 하늘들
성경의 ‘하늘’은 하나님의 고유한 영역과 신성을 상징하는 영적 의미의 단어이다. 그렇다고 그 ‘하늘’을 어떤 피안의 공간으로만 생각함도 지나친 상상이다. 다만, 하늘은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이 진리로 거하는 영적 영역이다. 그리고 그것의 모형이 많기에 그런 것들을 ‘하늘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히9:23) 여기 ‘하늘’이 ‘하늘들’이다. 그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들이 그 하늘 밖에 있다. 그 모형은 피나 정결예식으로서 정결케 할 필요가 있으니 그 ‘하늘들’은 곧 우리들이다. 그 ‘하늘들’ 안에 그들을 살리는 어떤 것이 있다. 그들을 하늘 되게 만드는 것은 진리이다. 그런데 그 ‘하늘들’은 스스로 정결하게 될 수 없다. 그것과 다른 더 좋은 재물, 최상급 제물, 그것으로만 정결하게 된다. 예수라는 제물이다.
그렇게 예수가 우리 안에 들었더니 ‘하늘들’이 된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던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는 예수가 더 좋은 제물, 순전한 제물로 죽었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 예수가 영으로 들어와 하나님의 은밀한 것을 드러내는 우리들이 하늘들이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 나라’라고도 한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1:3) 이렇게 우리를 거듭나게 해서 우리 안에 상속을 주었으니 그것이 생명, 곧 기업이다. 진리의 말씀, 진리의 호흡인 ‘프뉴마’, 즉 '성령'을 준 것이다. 보이는 허공, 하늘은 끝이 없다. 물리적으로 보이는 창공, 저 푸른 하늘은 없다.
성경의 ‘그 하늘들’은 여기 있다. 바로 우리들이다. 그러나 이것의 진짜 원형인 하늘은 하나님의 신성한 영역에 존재한다. 그 하늘은 이 땅과 다른 차원으로 존재함을 보여 주고자 푸른 창공을 비워 놓은 것일 뿐이다. 끝없는 창공, 그 창공 너머의 우주, 끝이 없다. 그러니 인간의 임의로, 편리한 대로 하나님의 하늘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 하늘을 우리 안에서 종종 경험하게 된다. 그것을 ‘현실 천국’이라 한다. 그렇게 성전과 예수가 진리로 깨달아지고 그것이 삶과 가치관이 되는 것을 생명이라 하며 그 생명 품은 이들을 ‘하늘들’이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나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라 내가 되어 죽었다. 같은 말 같지만 의미가 다르다. 예수가 나를 위해 죽었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그 예수가 ‘나’의 희생한 제물이 되기에 주인공이 ‘나’이다. 그 주인공을 하나님이 도와준 모양새가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빚 갚기
하나님이 주인공인 나를 위하여 예수를 희생시켰으니 나는 그 예수에게 빚진 사람이 되었기에 그 빚을 갚기 위해 신앙 행위에 몰두하게 된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내가 하나님께 빚을 갚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빚을 갚는 모양새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의 것, 이 아래의 것으로 우리에게 하늘 진리를 깨닫게 해 주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빚 갚기이고 그렇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기 섬김으로 통치하는 나라이다. 진짜 왕은 섬김을 받아 왕노릇을 하는 자가 아니라 섬김으로 왕노릇 하는 자인 것이다. 세상의 왕들을 보라. 그들은 백성들의 섬김으로써 왕의 권력이나 체면을 유지한다. 이 말은 백성들이 왕을 버리면 그 왕은 언제든지 광야의 소처럼 버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기인들이 대우를 받고 잘 나갈 수 있음도 팬들의 성원이 있기 때문이다.
팬들이 떠난 인기인은 존재할 수 없듯이 이 땅의 왕이라는 존재나 직위도 마찬가지이다. 스스로 능력을 갖고 있는 존재가 아니라 밖의 힘에 의해 즉위되고 폐위되는 힘없는 왕일뿐이다.. 그러나 하늘의 왕이 그런 왕이 아니다. 섬기는 왕이다. 그 하늘 왕의 통치 방식이 섬김이다. 섬김으로 통치를 한다는 것은 그 왕 자체가 힘의 원천이요 실체라는 말이다. 따라서 하늘 왕은 밖의 움직임이나 상황들에 의해 그 왕 됨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진정한 왕이요 진짜 아버지이다. 약해서 섬기는 것이 아니라 섬김으로써 그 존재가 계시되는 분, 우리에게 끊임없이 생명을 쏟아붓는 은혜의 왕, 그 아버지는 섬기는 왕이다. 세상 모든 종교의 신들은 하나같이 섬김을 받는 약한 우상들이나 기독교는 신을 섬기는 종교가 아니라 신의 섬김을 받는 종교이다.
하나님의 그 위대함, 그 역동적 섬김이 물리적 세계에서 육신적 자기가 부인되는 모양으로 나타난 것이 십자가이다. 예수는 그 십자가에서 현실의 ‘나’로 죽었다. 현실 세상에서 나의 가능성과 자만심으로 충만하게 살고 있던 나로 죽은 것이다. 왜냐하면 내 주장과 내 가능성이 죽어야 생명인 하늘의 가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어느 것이 진짜 생명이고 제대로 사는 삶일까? 이 질문에는 필경 한쪽이 죽어야 다른 쪽이 진짜가 된다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 앞에서 자기부정이라는 운명을 타고난 것일 수도 있다. 그 안에는 내 육신, 내 계획, 포부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나의 이런 세상이 되어 죽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그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결론
그렇게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일방적 공여이다. 그것을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모습으로 보여주었다. 생명은 하나님의 자기희생, 즉 그분이 죽어서 얻는 것이지 나의 섬김과 숭배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 예수 안에서 함께 죽었다. 예수가 우리를 품고 대표로 죽은 것이다. 그처럼 우리도 현실에서 우리 자신을 부정당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생명은 말씀이라는 진리를 삶으로 보여주고 간 예수였다. 그래서 예수도 친히 ‘성경이 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고 또 예수를 ‘말씀’이라고도 한다.
분명 그 예수 안에는 자기부정의 삶을 살아야 할 우리의 삶도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에는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분명한 언급이 있다. 여기 말하는 '생명책'은 천국문 앞에서 베드로가 들고 있는 어떤 책이 아니다. 그 성경을 뜻한다. 십자가에서 죽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 성경, 그 책에서 선포되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이 ‘나’의 이야기, 우리의 삶으로 경험되지 못한 이들은 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자들이다. 그 고난이 내 삶에 닥칠 때, 그 죽음이 내 경험으로 다가올 때, 예수는 말했다. 구하고 찾으며 두드리라고 말이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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