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에 목숨을 걸고

2024. 4. 14. 15:29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삼하7:13~15)

 

오늘의 우리 살이는 바쁘다. 그래서 고단하다. 어찌 보면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이다. 그리하여 모처럼 쉬는 날, 주말이 찾아 오면 편안히 늘어지고 싶다. 그래서 황금 주말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그렇게 여기는 그 귀한 주말 시간들을 교회에서 소비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예배당에 와서 그 금쪽같은 일요일을 소비하는가? 먼 길을 운전하고 비싼 기름까지 써가며 와서 예배드리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래서 사람들이 그런 이들을 예수쟁이라 부른다. 그들 눈에는 미쳐 보였기 때문이다.

 

1. 그때의 거룩과 지금의 거룩

그런데 처음 예수 믿었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져 있나? 하나님이 당신의 집요한 사랑으로 나를 이끌어 완성시켜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이렇게 변화되어 온 모습, 또 앞으로도 변해갈 모습에서 나는 소망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변하게 만드신 그분이 앞으로도 나를 향해 약속한 모든 것을 이루어 내시겠구나.’ 바로 이런 것이 우리 소망이니 믿음 안에서  내가 변하기는 변할까?’ 하는 염려는 기우일 뿐이다. 우리가 정말 하늘 당신의 백성이라면 하나님이 징계하고 어렵게 만들며 때려서라도 그렇게 만들어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맞고 징계당하며 배우는 것보다 먼저 순종하는 것이 고생도 덜하지 않겠는가? 사실, 하나님은 그런 방향으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닳은 거룩으로 몰아가기를 원하신다.

 

그러니 구원의 목적은 거룩이다. 여기 이 땅에서 나의 행복이나 재화 획득에서 오는 기쁨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아니 신앙인들 조차 거룩보다는 여기에서의 행복을 원하고 기도한다. 물론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항상 감사하고 기쁘다. 성격에서도 기뻐하라고, 항상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그러니 그 기쁨은 이 땅의 기쁨과 차원이 다르고 그 감사는 세상의 감사와 다른 것이다. 이를테면, 모압 여인 룻이 지니고 있던 기쁨이자 감사이다. 그녀는 실패하여 알거지가 된 시어머니를 따라 여호와를 신앙하는 세상으로 들어왔다. 과부 신세로 거지처럼 이삭을 주어 생계를 유지함에도 하나님이 자기 인생의 주관자라는 믿음으로 살았다. 자기 운명과 지금이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 믿음 그 하나만으로 기뻤고 행복했다.

 

그렇다. 우리의 구원 목적지는 거룩이다. 그 거룩을 만들어내기 위해 때로 하나님이 어려움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1:30~32) 하나님은 당신 자녀의 성숙과 그 성숙을 위한 양육 방법으로 징계를 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거룩하게 살고 싶어 하는 인생들이 없다. 아담 이레, 인간들은 자기만을 위해 사는 것에 길들여져 왔고 또 그런 삶의 방식에 익숙해져 버렸다.오염된 아담들은 자기를 비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하늘 삶이 낯설다.나 아닌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는 십자가적 삶이 불편하다. 아니 거치는 돌일 뿐이다. 

 

2. 거룩한 삶을 향하여

그럼에도 그 하늘 원리로의 삶이 거룩한 당신의 속성이기에 하나님은 선택한 우리들을 깨뜨리고 비워낸다. 다윗 왕의 인생에서 그러했듯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서 인생 채찍과 역사 막대기를 들이대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삶에 찾아오는 질곡의 이유이다.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고자 하나님의 채찍과 막대기가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 삶에 닥쳐오는 어려움들은 모두 내 죄에 대한 징계인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내 현실 삶에는 하나님의 징계도 있지만 사단의 공격도 함께 공존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려움에 빠진 이웃에게 당신은 지금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 것이다고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다만, 전자든 후자든 그 어려움을 겪고 난 후에는 정금같이 깊어진 거룩을 느끼게 된다.

 

그때 그런 거룩의 정서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 것을 생각하노라면 기쁨과 감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우리 삶에서 이 거룩이라는 시련이 빠지면 소금기 빠진 음식처럼 맛없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이제 예수께서 다시 오는 날, 아니 내 삶의 끝 날을 위하여 준비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어떤 이는 그간의 봉사와 구제에 쏟았던 시간들을 근거로 자신한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전도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명부를 의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내놓아야 할 것은 한 가지뿐이다. 하늘 자녀답게 살려는, 거룩한 삶을 향한 열심과 열매들이다. 바울은 우리들에게 그런 거룩한 삶을 요구하였다. 거룩을 상실한 인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구약에는 그런 이들의 특징을 살인성적 타락으로 대표하여 기록하였다.

 

왜 굳이 그런 것으로 타락을 특징지었을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타인을 이용하려 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수단으로 자기 외의 사람들을 수단으로 쓰려했기 때문이다. 자기를 증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헤치고 사랑조차 쾌락의 도구로 훼손시킨다. 그래서 성적인 타락과 살인을 인간 타락의 대표적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거룩’이 회복이 되어 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타인을 내 이익을 위한 도구가 아닌 사랑과 섬김의 대상으로 여겨감이요 상대를 죽여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죽여 상대를 세워 주는 삶이 되어감이다. 그것이 십자가로 이룬 예수의 삶이었고 그 예수의 삶을 추구하는 우리의 삶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거룩은 단지 죄를 짓지 않는 소극적 차원을 넘어 적극적인 차원의 사랑이다. 

 

3. 거룩은 곧 사랑이라

하나님의 대표적 속성은 거룩이다. 그리고 그 거룩은 현실에서 사랑으로 표현된다“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5:43~48) 예수는 구약의 수많은 율법들과 해석 강령을 단 두 가지로 요약하였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22:37~40)  물론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면 거룩한 자가 되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무죄한 아담에게 선악과가 주어졌던 것이다. 아담은 무죄한 상태로 태어났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에 순종함이 인간의 최고 행복임을 깨달아 믿고 그 말씀대로 따르며 살았더라면 아담의 에덴 생활은 천국에서의 삶이었을 것이다. 동산의 선악과는 하나님의 율법이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지키지 못했다. 에덴이라는 천국의 삶보다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더 좋아 보였다.

 

성경은  그런 것을 매력적으로 보는 마음, 그리고 그런 삶의 태도를 죄라고 규정한다.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들이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저마다 그런 삶을 추구하게 되었으니 죄인인 것이다.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에 예수도 할례를 시작으로 율법을 지켰다. 그러나 그런 예수도 율법의 완성을 사랑이라 하였다. 결국 율법은 사랑으로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품에 안고 그 율법을 모두 이행하였다. 그리스도로서 사랑을 완성한 것이다. 목숨 걸고 사랑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구한 십자가, 그것으로 예수가 다 이루었다. 우리는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기에 그 예수처럼 거룩한 자가 되었다. 그것을 아는 우리들이기에 십자가의 삶, 그 사랑의 삶을 흉내라도 내려한다.. 그렇게 우리는 거룩을 지향하는 존재로, 그에 맞는 신분으로 거룩하게 만들어져 가고 있다.

 

결론

우리는 거룩함을 위하여 선택받았기에 거룩해야 하고 또 거룩하게 될 것이다‘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요일3:3) 하나님은 우리에게 거룩의 가능성을 심어 놓으신 것이 아니다.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우주를 창조하시고 또 그렇게 만들어 가고 계신다. 내가 거룩하고자 노력한다고 성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노력이 나오게끔 만든다. 그러니 노력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럼에도 그 노력이 나오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찾고 두드리고 구하라 하였다. 즉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찾는 자에게 보게 할 것이고 두드리는 자에게 열린 것이며 구하는 자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예수가 장담하였다.

 

사단은 그 거룩을 향한 우리의 추구를 방해하여 우리의 눈을 현세로 돌리려 준동한다. 이런 쾌락, 저런 호기심으로 친절하게 찾아와 스며든다. 하지만 그때 속으면 안 된다. 이미 우리 안에는 거룩한 생명의 하늘 씨가 심겼다.. 그 생명의 씨는 자라야 한다. 돈을 따르느라, 명예를 좇느라, 세상 자랑을 추구하느라 그 수고의 삶을 놓치면 안 된다. 여전히 인간으로 살고 있기에 이것이 쉽지 않으니 하늘 은혜를 바랄 수밖에 없다. 그 은혜를 경험하면 할수록, 그 말씀을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거룩으로 다가가는 삶이 나온다. 그때부터 하나님이 원하는 일, 하나님이 소원하는 삶을 살겠다는 소명감이 내 운명으로 자리한다. 그때부터 거룩에 목숨을 걸고 내닫는 신앙의 삶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살전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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