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앞에서 살리라

2024. 2. 14. 00:15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6:1~3)

 

신앙의 삶은 감경의 삶이다. 하나님이 은혜에 매 순간, 매 사안마다 감사와 은혜를 감지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 삶을 일러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이라 한다. 정말 그렇게 살고 싶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찬송가를 부르며 매일 CCM을 듣고 살면 가능할까? 그런데 그 하나님이 누구이고 그가 한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감정이 격해져서 부르는 것만이 찬양일 수 있겠는가? 그것은 찬양이 아니라 노래일 뿐이다. 찬양의 삶과 찬송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다.

 

1.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래서인지 어느 중견교회의 찬양전문 사역자가 이렇게 말하였다.. ‘신학이 신앙을 망쳤다 찬송은 감성이고 신학은 논리이니 감성적인 찬양 영역을 논리적 영역인 신학으로 성경적 찬송이니 노랫말이니 따지는 것이 오히려 은혜를 해친다는 말이었다.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성경 연구이다. 하나님에 대해 그런 성경연구가 신앙이 망쳤다니? 그 사역자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두 가지로 추측된다. 그가 공부한 신학대학에서 신학이 엉터리로 가르쳐졌거나 또는 체험적 신앙으로 시작해서 감성적 신앙으로 생활해 왔던 습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이 누구인가?’가 자기 삶에 관계없는 이들은 그렇게 말할 수 도 있다. 감성적이고 신비적 체험만으로 만족해하는 사람들은 굳이 신학이 필요 없다.

 

그런 이들에게는 이슬람의 알라나 유대교의 야훼나 불교의 부처나 매 한 가지이다.. 신이라는 것, 절대자는 느낌이지 논리적으로 알려하면 오히려 신앙적 감성만 손상된다는 것이다. 정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이도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을 수 있는가‘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4:6)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호6:3) 이렇듯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였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고 말이다. 내가 누구를 믿는지 모른 채, 나에게 한 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찬양할 수 있을까?

 

나치 치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그 참담한 고통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했다는 유대인들의 기록이 있다. 그런 지경에서 유대교를 믿었던 신실한 이들의 찬양은 어떤 찬양이었을까? 지금도 그들은 자신들의 군사적,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며 치성을 다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런 이들이 그 당시 수용소에서 드린 찬양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 그 처지의 자기들을 구해줄 것이라는 염원이었으리라. 거듭 말하지만 그런 것을 전제한 찬양은 진짜 하나님 찬양이 아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외쳤던 찬송은 무엇에 근거한 것이었던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내 신분이 바뀌었다는 것을 찬양하였다. 바울의 찬양처럼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신분이 바뀌었다.

 

2. 숨길 수 없는 감사 찬양

흔히들 어떤 이들에게 무엇하는 사람인가를 물으면 자기의 직업, 즉 의사, 또는 교사, 법률가, 엔지니어라고 대답을 한다. 그 사람의 직업이 곧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되는 현실이기에 대부분 그렇게 대답한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자녀요‘라고 대답할 사람은 얼마나 될까? 오늘날 누군가가 자식에 대해서 물으면 내 아들 의사야, 교수야이런 대답은 하겠지만 내 아들은 복음을 아는 그리스도인이야이렇게 자랑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앙생활 잘하는 자식이라도 현실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이 없으면 자식 이야기를 슬쩍 피해서 나가는 것이 오늘의 우리 기독교인들 모습이다. 영원한 생명과 하늘나라가 실상 우리들의 현실에서 무시당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현세적인 자기의 신분을 자랑하지 않았다. 오직 하늘 신분이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 대하여서만 대단하고 엄청난 것이라고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는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들 서두에서부터 그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것은 인사치레의 말이 아니었다. 일종의 감탄이었다. 자신의 신분을 생각할 때마다 좋아서 절로 나오는 감동이었다. 그러니 그런 신분의 자각이 없는, 그로 인한 감탄이 없는 찬송은 찬양이 아니라 노래일 뿐이라는 말이다. 바울이 그렇게 감격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어떻게 해서 그렇게 신분이 그렇게 바뀌게 되었던가? 하나님들이 한 일이었다. 성부 하나님이 계획하였고 성자 그리스도가 성취하였으며 성령 하나님이 이루어 가고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 내가, 우리가 한 것은 없다. 모두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 일이었다. 그렇게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일은 내가 무엇을 좀 깨닫고 성실하게 살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니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향해 행해졌다는 것, 그러니 우리는 그 사실에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아직 하나님께 호감을 갖기도 전에, 아니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만 찾으며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이라는 존재조차도 알지 못했을 때, 내 이름을 불러서 생명책에 기록하셨다는 것, 그러니 감탄스럽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 내가 나를 봐도 낙제점 인생인데 하나님은 나를 낙제 점수받은 자로 여기지 않고 100점짜리로 여겨주신다는 말씀이, 그렇게 이끄는 성령의 감동에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울면서 고백한 할 때 하나님이 구하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했었다. 오늘 내 모양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나를하고 가슴 치는 심령, 아마도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는 제사이리라. 그 처절한 자기 성찰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루어 놓은 일을 떠올리면 우리 입에서 어찌 감사가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우리에게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찬양 밖에 없다.

 

3. 더 이상 족보가 필요 없으니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구원을 감상적이고 이기적으로 해석하는 경향들이 다분하다. 왜 그럴까? 구원을 이해하되 에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그러니 진짜 구원은 그 를 넘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려고 우리를 구원하였다. 하나님이 한 모든 일들은 나를 구원한 것을 넘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에 있었다. 천지 창조의 목적도 피조물들이 각기 자기 자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해 냄에 있었다. 하나님의 크심과 엄위하심과 존귀하심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요 찬양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그림자로 설명되어 왔던 실체자 예수 그리스도, 그가 와서 새 언약을 완성하셨기에 이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는 그 새 언약의 완성을 찬양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로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까지 복이 전달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자 예수의 아버지이다. 그러니 우리와 예수는 한 형제지간이다. 한 아버지를 둔 같은 형제,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이신 예수의 형제로 신분을 지어주셨다. 성경에는 족보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예수 이후로는 기록된 족보를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족보라는 것은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로 계속 내려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이후부터 성령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의 형제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으니 이제 족보는 필요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요20:17)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며 하나님인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로 삼아 주셨다. 이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옛 언약은 신약인 예수 그리스도로 결론되고 완성되었다. 그러니 예수로 결론되지 않고 그리스도로 결론되지 않는 구약은 미완성이고 그 미완성에 머무는 설교는 저주이다‘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가라사대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고하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렘11:1~4)

 

결론

이로서 구약의 사람들과 신약의 우리들은 비교할 수 없는 신분상의 차이가 생겼다. 그래서 다윗이 우리를 부러워하였고 모세도 우리를 부러워하였다고 한다‘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히11:39~40) 그들이 그림자로 어렴풋이 보고 따르던 것을 우리는 명확하게 보고 그 실체를 확인하였다‘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히11:13)

 

신약을 사는 오늘의 우리는 약속의 실체를 받았다. 그 기라성 같은 구약의 인물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선지자들이 기다리다 보지 못했던 율법의 실체, 예언의 실체, 역사의 실체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의 우리는 성령의 감동케 하심으로, 그 충만케 하심으로 믿음 안에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으로 확인하고 신앙한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신분이 바뀐 이 은혜에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찬양으로 우리가 그 앞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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