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받은 인생

2024. 2. 6. 21:34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창15:13~14)

 

구원받은 우리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았나?’ 하고 물으면 대부분 ‘구원 받았다’고 대답한다. 참 간단하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되었나?’ 하고 재차 물으면 내가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다고 대답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왜 구원을 받지 못했나?’ 하고 물으면 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기에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하고 대답한다. 역시 대답이 간단하다. 물론  이 명료한 대답이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틀린 답이기도 하다. 마치 말장난 같은 이 표현이 어떤 면에서 맞고 어떤 면에서 틀렸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매우 중요한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1. 왜 오직 기독교인가? 

기독교 이외의 모든 종교는 사람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 낸 종교이다. 그래서 사람이 치성을 드린 만큼 보답으로 돌아온다는 것이 세상 모든 종교들의 공통점이다. 불교에서는 자신들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보시를 열심히 하고 수도를 하며 고행도 한다. 가톨릭에서는 열심히 성례를 행하고 내 탓이오를 외치며 선한 일을 장려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는 원죄만이 해결된 것이고 그 차후의 죄들은 자신들의 몫이기 때문에 바르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슬람교도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알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동양 철학을 바탕으로 한 종교들도 그들이 하는 만큼 정신적, 육체적 복을 받는다는 공통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 속에서 살아왔고 교육받으며 관계해 왔던 기독교인들도 자연스럽게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논리 속에 묶이곤 한다. 기독교 계통 신문사 기자가 어느 중형 장로교회 앞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교인에게 설문 조사 형식으로 물어보았다고 다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이 성경에 있는가?’ 이 질문에 70%의 교인들이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정말 그런 구절이 성경에 있던가? 아니다. 그런 구절은 없다. 오히려 그런 말은 성경의 명제와 정확하게 반대되는 말이다. 우리는 이렇게 인과율에 근거한 교육을 받았고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른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라는 이치, 구원이 하늘의 선물이라는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기독교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식의 치성의 종교가 아니다. 계시의 종교이며 은혜의 종교이다. 이는 다른 종교에서 찾아볼 수 없는 기독교만의 특성이고 유일성이다. 하나님이 먼저 시작했고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찾아 내려온 종교가 기독교이다. 우리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 인간들에게 어떤 선물을 부어 준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정성을 다하면 신이 감동하여 복을 내려준다는 다른 종교와는 기독교가 다르다. 흔히들 우리는 '내가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고 예수를 믿게 되었나?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기 때문에 모른다. 하나님을 알 수도 없었고 또 믿음의 필요성조차 느껴지 못했던 우리들이었다. 그렇게 믿을 수가 없는 존재였는데 어떻게 알고 믿게 되었나?

 

2. 이미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성경은 설명한다. 성부 하나님이 계획한 일, 성자 그리스도가 성취한 일,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이끌어 가는 일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성경은 그 삼위 하나님이 우리에게 한 구원 사건을 소개하고 그것이 어떻게 나에게 들어왔는지를 이야기해 주고 있다. 바울은 그 일을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창세전이라 함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우주의 탄생 이전을 말한다. 즉 우주 탄생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고 그 부른 이들을 당신 나라로 데리고 들어가 살려고 이 우주와 우리 인생들을 창조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을 향해 오늘도, 지금도 이 세상 역사와 우주를 경륜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이 세상 역사는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15:13~14)이 말은 모세가 태어나기 500년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예고한 말씀이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들어가 400년 동안 노예살이를 할 것이고 후에는 하나님이 애굽의 왕조를 바꾸셔서 그들을 핍박받게 하여 그 애굽에서 데리고 나오실 것이라는 계획을 아브라함에게 일러주었다. 하나님이 당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 역사를 그렇게 이끌어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은 고대 애굽의 역사에서 실제적 사건으로 나타났었다. 이렇게 인류 역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이끌어 가고 있다.

 

많은 인류학자나 역사 전문가들은 인류의 역사를 인간들의 성취욕이 만들어 낸 결과물, 열매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결코 아니다. 정확히 말해 시간이 흐름, 세상의 역사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성경은 인류 역사의 진행이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의 회의와 약속 안에 계획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숙명적인 틀에 우리를 꼭두각시로 살게 했다는 말은 아니다. 성경은 창세전에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지 않은 일은 이 땅에 일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그런 하나님의 계획에 없던 일들이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면 그 하나님을 전지하고 전능한 분이라 할 수 있겠는가? 계획이 있었고 목적이 있었다. '죄의 허물로 벌거벗은 아담을 어떻게 의의 흰옷 입은 당신 백성으로 만들어 갈까?' 그것에 대한 것을 십자가라는 방법으로 이루어 낼 전체 계획을 이미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려 놓았다.

 

3. 미리 예정하사

그러니 에덴동산과 선악과 사건, 그 일로 인해 벌거벗은 아담 사건은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적도 아니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도발할 것조차 미리 알고 있었다. 그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예정이라 한다. 우리 인간들은 예정하면 왠지 어렵게 생각하고 막연한 거부감을 느낀다. 나라는 존재의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내 가능성이 부질없고 초라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들은 창조자라는 하나님을  그 자리에서 몰아내고 자신들이 대신 앉아있다 여기고 있는데 자신들이 끌어내린 그 창조자에 의해 자신들이 운명이 결정된다? 그것을 인정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혹 하나님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는데 인간이 선악과를 도발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어긴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택하셨다, 그리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말이다. 이렇게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장차의 일들이라는 모든 것은 창세전에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창세전에 하나님의 선택을 시작으로 우리의 구원이 출발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내가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전에 '하나님의 선택'이 먼저 있었다. 이것이 순서이다‘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살후2:13~14) 우리가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시려고 우리를 택하셔서 진리를 믿게 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 이 순서가 뒤바뀌면 안 된다. 성경은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한 일조차도 하나님의 선택 이후의 일로 돌리고 있.

 

하나님이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을 창세전에 택하였고 삼위 하나님의 논의가 있었다는 것, 성자 예수가 그 택한 자들만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성령이 조명하고 이끄는 역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어 있었던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이런 일들을 인식하고 믿을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으로 새 창조를 하였기에 우리가 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2:12) 우리 구원 여정 가장 앞, 그 시작에 하나님의 선택, 즉 소명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누구는 택하고 누구는 택하지 않았나? 모른다.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이 불공평하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여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다. 선택에 들지 않은 입장에서 불공평을 주장하기보다 선택에 든 은혜에 다만 감사할 뿐이다.

 

결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무조건적인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중에 누가 믿고 안 믿을지를 미리 내다보고 택한 것이라는 소위 예지 예정론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단지 인간들의 앞일을 미리 내다보고 결정한 것일 뿐이라는 것, 만약 그렇다면 그 구원은 인간 손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일단은 인간이 믿어 주어야 구원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죽여 놓고 믿어주는 인간은 구원하고 안 믿는 인간은 저주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불확실한 일을 위해 헛되이 죽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인가‘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8:29)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을 위해 예수를 보내지 않았다. 당신의 택한 이들만을 위해서 보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있는 존귀한 존재들이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요17: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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