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으로부터의 구원

2024. 2. 13. 23:26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창3:13~15)

 

살면서 경험해 온 바, 세상에는 착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분명 우리 사는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도 있다. 성선설이니 성악설이니 하는 철학적 논쟁을 말함이 아니라 삶에서 체득된 경험이 그렇게 말하게 한다. 누군가가 말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단 한 사람도 지옥가지 않고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 예수라는 당신이 아들을 희생시켰다'고 말이다. 그러니 각각의 사람 인생들이 하기에 달린 일이지 처음부터 멸망키 위해 태어난 인생은 세상에 없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까?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분명 마귀의 자손들도 있다고 창세기에서부터 선언하였다.

 

1.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 해도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받은 특정한 이들을 위해서는 죽었음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이런 말이 기독교를 너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종교라고 비난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렇다. 사실이다. 기독교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만을 위해 이 역사를 경륜한다. 그리고 그들만을 위한 나라를 이미 완성해 놓았다. 그러면 그런 인생들 외의 나머지들은 무엇인가? 설정 인생들이다. 물론 마귀까지도 하나님 당신 계획의 무대장치와 엑스트라로 사용물일 뿐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절대 상위권자인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때가 가장 멋지고 행복하다.> 이 분명한 명제를 가르치고 깨우치기 위해 하나님은 이 세상 역사와 마귀, 그리고 엑스트라들을 동원하셨다.

 

그러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리들 한 인생,, 인생들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존재들인가? 물론, 역사 낙관주의자들이나 역사진보주의자들이 이 글을 읽노라면 황당해하고 어이없어할 것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우리는 그 성경 말씀을 지리로 믿을 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경 전체를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선택하는 양상이 좀 독특함을 보여 주었다. 다수가 아닌, 소수로, 이기고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 실패하여 보잘것없는 인생들로 남겨가는 양상을 보였다. 그렇게 남겨져 선택받은 이들을 남은 자라 한다. 사망의 그늘 아래에 놓여 있던 자들 중에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그렇게 남겨가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왜 나를 남겼는지, 왜 우리를 택했는지는 모른다.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그분의 기쁘신 뜻대로우리를 선택했다는 것, 우리는 그 사실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1:4~6) 그러나 모든 인간이 선택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 아닌 자, 마귀의 후손도 있다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은 애당초 어떻게 선택을 받았던가? 그 당시에는 모두들 바벨탑을 쌓고 있었던 시대였었다. 그때 하나님이 우상의 땅에 살고 있던 데라 집안의 아들 아브라함을 선택하였다.

 

2.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으로

아브라함의 집안은 당시 그는 우상물 제작소였었다. 그는 아버지의 가업을 도와 갈데아 우르 도시에서 우상물을 만들어 팔아 부를 일구었던 집안 아들이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선택한 것이다. 즉 그가 무엇을 잘해서, 또는 자격이 있어서 선택된 것이 아니었다. 그런 자를 어떻게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는지를 보여주려고 선택한 것이었다. 그의 아들 이삭은 또 어떻게 선택받았던가? 그의 형 이스마엘이 서자였고 그가 적자였기 때문이었나? 만약에 그런 논리라면 그 적자 이삭에게서 쌍둥이로 태어난 야곱과 에서는 어떤가? 그 둘은 한 어머니 배속에서 같이 출생한 인생들이었는데 이미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선언하였다.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나님의 이 처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무엇을 잘해서 선택을 받고 또 무엇을 못해서 선택받지 못한 것이 아님을 계시한다. 이유는 단 하나,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그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우리가 택함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하나님은 창조자이니 그 조물주의 선택으로 구원의 반열에 들게 된 은혜에 우리 피조물은 감사할 뿐이다. 그렇다면 어차피 다 정해져 있는데 전도는 왜 해야 하는가? 물론, 하나님이 들판의 곡식을 모두 키우고 자라게 하신다. 그렇다고 씨를 뿌리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목적을 정하시면서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도 함께 정해 두었다. 그 방법과 수단으로 이런 글, 우리의 전도를 사용하신다. 그러니 우리의 삶, 나의 환경들은 하나님의 방법과 수단이다. 그렇다고 하여 나의 전도가 어떤 이의 영혼을 살리는 힘이라는 것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1:21) 여기 ‘전도’는 원어로 ‘설교’이다. 우리가 하는 전도나 설교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들은 그 자체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로 쓰일 때 그 능력이 있다. 그렇게 우리를 창세전에 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온전한 당신의 자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거룩’은 내적 순결 상태, ‘흠이 없음'은 외적 행위이니 겉만 멀쩡하고 속은 썩은 사과 같은 위선적인 신앙인들이 아니라 겉도 예쁘고 속도 실한 당신의 백성들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였다. 그런데 그런 상태가 우리에게서 가능할까? 오늘의 내 모습을 보면 자신이 없다. 그저 요원하기만 하다.

 

3. 무너지나 계속 지향성으로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서예수가 이루어 놓은 것을 전가받음으로써는 가능하다. 그러니 우리는 믿음 아니면 죽었다 깨어나도 '거룩하고 흠이 없는 상태'로 구원받지 못한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온전하게 거룩하고 흠 없는 자가 되었다는 것, 그 믿음으로 사는 인생들은 현실 삶에서 거룩하고 흠 없기를 추구한다. 그러나 여전히 인간이기에 실패한다. 자주 무너진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계속 지향한다. 이미 우리에게는 구원에 대한 떨림과 진행 중인 새 창조에의 소망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 장래 소망이 오늘의 나를 성찰케 하고 삶의 매 순간 선택에서 하나님을 의식하게 한다. 그렇게 하나님이 원하는 의는 우리의 마음까지, 즉 의도와 동기까지에 이른다. 그런데 우리가 그 마음까지 다스릴 수 있던가? 정말 죄에 대한 욕망을 다스릴 수 있던가?

 

없다. 불가능하다. 하늘 아래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만약 나의 구원이 그런 내 행동과 선택에 달려 있다면 정말 자신이 없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고 우리 인간들이 서로 한계와 약함을 알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기에 안심하고 확신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이끌어 간다. 견인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장차의 어느 날, 예수 다시 오는 그 어느 날에 우리 거룩의 완성을 보게 될 것이다‘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요일3:2) 지금은 우리가 이 모양 이 꼴이라 믿음으로만 거룩한 자라고 자위하며 확신한다. 하지만 예수를 다시 보는 그날에는 그 예수같이 흠 없는 나 자신을 두 눈으로 보게 된다.

 

지금은 우리가 이 땅에 살고 있기에 불완전하기에 믿음이라는 수단이 더욱 필요하다. 하지만 예수가 다시 오는 그때는 믿음이 필요치 않다. 직접 눈으로 보니 믿음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믿음은 단지 우리가 이 땅에서 온전치 못하게 살아가는 동안에만 필요하다. 그렇게 거룩하게 될 우리에게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였다. 거룩은 당신의 속성인데 그 속성으로 우리를 부른 것이다‘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벧후3:14) 하나님이 요구하는 이런 삶이 살아지지 않으니 고민되고 괴롭다. 그래서 많은 선지들이 자기 죄와 싸우려 했고 그 한계에 직면할 때마다 탄식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나를 '당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했다'고 한다. 내가 잘해왔고 열심히 살았기에?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

 

결론

어떤 이들은 인간의 존엄성을 내세워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한다. 하지만 의지라는 것에 자유가 정말 있을까? 의지라는 것은 지식에 종속되어 있다. 내가 어떤 의지를 행위로 옮긴다는 것은 그것을 판단하는 지식이 선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미 죄로 오염된 인간에게 자유의지라는 단어자체가 모순이고 언어도단이다. 타락하여 어두움에 종속되었을 때 인간은 그 어두움의 지식에 종속된 의지밖에 없다. 그런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들어와서 당신과 하늘을 아는 지식을 심었다. 그런 우리에게 세상에 매이지 않는, 하늘 삶의 원리를 추구하는 진짜 자유가 주어졌다. 그래서 예수가 말했다. ’나에게 오라. 내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미 어두움에 잡혀 살기에 자유로운 의지가 없다. 자기 마음이라고, 자신의 의지라고 말하는 그것조차도 이미 속박된 것임을 모른다. 우리가 말하는 자유 의지는 하나님의 목적을 향한 그 계획 속의 자유 의지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사실상 자유의지라는 말이 없다. 하나님에 의해 이끌려갈 뿐이다. 이것은 숙명이나 팔자가 아니라 예정이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기에 논증이나 변증도 필요치 않다. 당신의 백성들인 우리에게 선포되는 말씀이고 진술이며 계시이기에 우리는 신실하게 살려하고그분의 속성을 따라 사랑하며 살려한다.. 도우시는 성령이 그렇게 하게 하신다.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9:10~16)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그네를 사랑하라  (1) 2024.02.29
그 앞에서 살리라  (2) 2024.02.14
선택받은 인생  (2) 2024.02.06
그 하늘의 복으로  (1) 2024.02.06
은혜와 상처의 한 해  (2) 2024.0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