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9. 21:3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10:17~19)
설날 연휴라 고궁이나 이름난 공원을 다니노라면 심심찮게 외국인 노동자들을 보게 된다. 자기 나라를 떠나 낯선 타국에서 맞이하는 그들의 명절 연휴는 어떤 기분일까? 우리의 단일민족의식은 유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종종 이 땅에 들어와 일하는 타국인에 대한 경계심, 또는 경시적 시선들이 우리 스스로를 부끄럽게 만들 때가 있다. 특히나 지난 몇 년의 코로나19 전염병 사태로 인한 이방인에 대한 배척과 경멸 양상들은 같은 인류가 맞는지, 동종의 인간이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에 대한 우려들을 제기케 하였다.
1. 나와 다르다는 것
인류 역사는 감염병과의 투쟁사라 할 수 있다. 농경과 목축 생활이 시작된 이후 인류는 수많은 질병에 시달려 왔다. 하지만 인류도 감염병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정교하고 복잡한 '신체' 면역체계를 발전시켜 이에 맞섰다. 항원이 들어오면 항체 반응을 일으켜 다음에는 그 병원체가 들어와도 싸워 물리쳤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병원체가 들어오기 전에 미리 차단해야 했다. 그래서 감염 전에 감염 가능성 대상을 미리 피하는 '행동' 면역체계를 또한 발전시켰다. 그것이 '회피'라는 행동과 '혐오'라는 감정이었다. 혐오, 즉 역겨움이라는 감정은 더러운 음식, 배설물, 유해 곤충, 감염자의 기침, 구토, 설사, 부자연스러운 행동, 그리고 피부 발진 등을 대상으로 생긴다. 이 혐오라는 감정이 회피라는 행동을 유발한다. 그러니 혐오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본래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연 반응이다.
문제는 이 감정이 쉽게 분노와 배척, 차별과 폭력의 문화 코드로 발전한다는 것에 있었다. 신체 면역체계가 오작동하면 알레르기나 자가면역반응이 생기듯이, 행동 면역체계가 오작동하면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 반응이 일어난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릴 때 세계 곳곳에서 있었던 외국인 혐오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우한의 코로나로 중국인 혐오가 생겼다. 서양인들은 코로나를 '칭챙총 바이러스'라 부른다. 6세기 훈족 침공으로 로마제국이 무너진 이레로, 서양인들은 동양인에 공포와 편견을 가져왔던 바, 코로나 사태로 서구에서 동양인들이 이유 없이 폭행당하기도 하였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우선 노인, 장애인, 외국인에 대해서 혐오를 시작한다. 왜 그럴까? '나와 다르게 생겼기 때문'이다. 우리와 달리 생겼기 때문에 '정상'이 아니라는 것, 단지 '나와 다르다'는 것이 혐오를 일으키고 차별을 하게 만든 것이다. 그런 것이 세상이다.
이쯤에서 기독교 공동체를 생각해 본다. 교회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환대이다. 그것도 공정한 환대이다. 냉대, 천대, 혹은 박대의 반대말인 환대는 세상과 다른 교회의 정체성인 것이다. 환대는 '낯선 이'를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우리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성경에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이 가장 많은 것 같지만 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구절이 낯선 이, 즉 나그네를 환영하고 사랑하라는 말이다. 현실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낯선 이를 환대하는 것은 더 어렵다. 왜냐하면, 이웃이란 대체로 우리와 비슷한 사람들이지만 낯선 자들이란 우리와 생각과 피부색과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낯선 자를 환대하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예상치 못한 현현을 경험한 예가 많다. 낯선 이들을 대접했던 아브라함은 그들로부터 늙은 아내의 잉태 축복을 받기도 했었다.
2.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여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 공동체 일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2) 신약에서 나그네 환대의 대표적 본문은 마태복음 25장, 즉 최후의 심판 기사이다. 예수는 심판 날에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한 이들에게 영생의 복을,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한 이들에게 영원한 벌‘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성경에서 낯선 자 환대는 하나님의 출현을 경험하는 뜻밖의 선물이다. 성경에서 ‘환대’를 뜻하는 원어는 '필로제니아'로 '낯선 자를 사랑함'이란 뜻이다. 이와 반대되는 말은 '제노포비아'로서 '낯선 자를 미워함'이다. 즉, 낯선 자, 외국인이라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것은 죄라는 것이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환영받는 곳이어야 한다.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 하나가 되는 교제와 일치를 경험하는 곳이어야 한다.
하나님 또한 획일성을 좋아하지 않기에 유쾌한 차이들로 가득 찬 세상을 창조하셨다. 창조 기사가 언급된 차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온갖 채소와 나무들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고 바다의 온갖 생물과 공중의 새들 역시 '그 종류대로' 다양하게 만들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도는 차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있게 만들어서 그것을 넘어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게 함에 있었다. 그러니 그 하나님의 뜻으로 사는 하늘 시민들은 차이가 본질적이라는 고정관념을 거부해야 한다. 오히려 차이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이해하고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모든 차이를 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된 공동체가 교회이다.
물론 이러한 환대의 근거는 하나님의 환대에 있다. 하나님은 나 같은 죄인을 영접하고 용납하셨다.'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 이 환대는 공정한 환대이다. 그런데 환대면 환대지 왜 공정 환대인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려고 여러분을 받아들이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받아들여야"(롬15:7) 하기 때문이다. 조건 없이 우리가 받아들여졌으므로 조건 없이 우리도 다른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이런 공정한 환대가 교회의 본질이자 기독교 공동체가 실천해야 할 목회이다. 그러한 삶으로의 목회는 목사의 것이 아니다. 교회의 것도 아니다. 목회는 하나님의 목회이다. 목회란 세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섬김을 실천함이다. '인자가 온 것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다.'(마20:28) 우리는 이 하나님의 목회에 초대된 사람들이다.
3. 반하나님적 정서를 넘어서
성경은 우리에게 모든 사람을 초대하되 굳이 변두리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였다. 변두리가 어디인가? 무시해도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여겨지는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환대를 실천하면 변방과 중심의 구별이 흐려지게 된다. 그런 생각과 그 같은 삶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새 창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라는 국적이 문제 되지 않는다. 종이나 자유인이라는 신분적 차별도 의미가 없게 된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에 변두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 통치를 이루고자 부름 받은 존재이다. 물론, 의학 지식이 없던 과거에는 과민한 행동 면역체계가 생존에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혐오라는 감정과 회피라는 행동이 생존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반대일 수 있다. 새로운 것을 꺼리는 탓에 혁신적인 보건의료 체계를 거부하거나 글로벌 시대에 부적응할 수 있다.
코로나 이후, 우리 인류의 미래는 바이러스라는 '병원균의 집단 전염'만이 아니라 혐오와 역겨움이라는 '감정의 집단 전염'을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가 더 큰 문제로 다가왔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환영, 이미 오래전부터 그것을 경험해 왔던 교회는 할 수 있다. 성경은 기독교 공동체인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2, 36) 이 사랑의 실천에서 ‘나는 이것밖에는 할 수 없다’고 스스로 자기 한계에 갇히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경계와 한계를 정하지 않았다. 우리 스스로 규정한 경계와 두려움의 한계선을 지우고 하나님의 이끄심을 따라야 한다. 하나님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하나님'이시다. 바로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10:19)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출22:21, 23:9) 성경은 더욱 분명하게 말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약2:1~13) 우리는 '하나님의 환대'라는 거룩한 목회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교회가 이것을 실천하지 못해 세상에 혐오와 차별이 가득하다. 아니 교회마저 혐오와 차별을 일삼고 더 나아가 그런 일에 앞장서기까지 한다. 오늘 우리 세상에 만연해가는 차별과 혐오는 반하나님적인 정서요 그 하나님의 교시이자 명령인 성경 말씀과 배치되는 양상들이기에 염려하며 기도할 뿐이다.
결론
기독교 신앙은 약자들에게 돌아가는 혐오와 폭력을 예수처럼 제 몸으로 받아내고 모든 생명을 돌보기 위해 헌신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서 값을 치르고 사들인 이들이 우리들이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 했다. 우리가 그 예수의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또 자기를 청한 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점심이나 저녁이나 베풀거든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 두렵건대 그 사람들이 너를 도로 청하여 네게 갚음이 될까 하라 잔치를 배설하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저는 자들과 소경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저희가 갚을 것이 없는 고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니라' 하시더라' (눅1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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