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6. 20:1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 여호와께서 명하사 네 창고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이며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면 여호와께서 네게 맹세하신 대로 너를 세워 자기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니 너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세계 만민이 보고 너를 두려워하리라 여호와께서 네게 주리라고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사 네 몸의 소생과 육축의 새끼와 토지의 소산으로 많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신28:2~14)
2000년 전에 메시아는 왔다. 예수라는 사람의 이름으로 와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모두 완수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메시아를 찾는 이들이 있다.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찾고 있다. 여전히 자기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특별 관리를 받고 있다고 여기는 터이기에 다른 민족, 특히 아랍과 팔레스틴 사람들을 함부로 여기고 압박하며 오늘날까지도 호전적으로 대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유대인들을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라고 부러워하며 그들처럼 아이들을 키우자고, 그들 같은 신앙을 본받자는 세미나까지 여는 이들이 적지 않다. 특히 한국 사람들, 그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호의는 유별나다.
1. 특별 은혜와 일반 은혜
신명기 28장에는 선택한 당신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들이 장항 하게 나열되어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는데 표현하기를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준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복을 좋아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복을 좋아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늘의 복이었다. 복이면 다 같은 복이지 하늘에 속한 복이 따로 있나? 그 복은 어떤 복이란 말인가? 일반 은혜라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해를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 고루 비추신다는 종류의 은혜이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마5:45) 이렇게 하나님이 악한 사람이나 선한 사람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내리는 은혜가 일반 은혜이다.
그러니 선한 사람이라고 돈을 더 벌게 해 주고 착한 사람이라고 명예를 더 얻게 해주는 것이 아니며 악한 사람이라고 건강을 빼앗아 질병에 들게 하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악인들에게도 돈과 명예와 건강, 장수를 공히 주신다. 그러한 것들이 모두 일반 은예의 범주 안에 들어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 백성에게만 내리는 복은 그런 종류의 것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은 그것을 '신령한 복'이라 하였다. 옛 언약, 그러니까 율법 아래에서 하나님이 일반 은혜의 것들로 당신의 축복을 설명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진짜 율법, 실체적 하늘인 예수가 오기 전까지는 물리적이고 임시적이며 외양적이자 실물적인 것들로 당신의 복을 설명하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마치 유치원 아이들에게 형이상학적인 설명이 불가능하기에 소품들을 이용하여 설명하는 것처럼 당시의 사람들에게 하늘의 복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때의 복은 양과 염소의 숫자, 소유하고 있는 땅의 넓이, 그리고 많은 자식들의 수, 육신의 건강과 장수 등이었다. 그래서 그런 소품들과 방식으로 당신의 복을 설명했었다. 그러나 이제 하늘의 실체인 예수가 왔다. 진짜 부요인 그가 옴으로서 이전의 그런 것들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 예수가 세상에 왔다가 간 이후부터는 성령이 우리 마음에 들어와서 이해시켜 주고 가르쳐 주기에 복의 개념을 구약식으로 이해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실물적이고 임시적이며 외양적인 것으로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진짜 복은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었다. 그 예수로 인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늘나라 백성의 신분, 즉 구원이고 영생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 신령한 하늘의 복이었다. 그럼에도 오늘의 교회들과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구약적인 이 땅의 복들에 연연하고 있다.
2. 그 하늘의 복을
그렇게 보이는 복, 이 세상의 복, 세속적인 성공과 부요를 하나님에게서 얻고자 하는 이들이 좋아하는 단골 구절이 신명기 28장이다.. 그런 이들이 원하는 복은 노골적으로 옛 언약이었다. 그것은 구약의 축복, 오래전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축복이었다. 하지만 그런 축복이라 할지라도 전제가 있었다.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면 주겠다는 것, 복을 받으려면 먼저 하나님이 내린 말씀을 온전히 지켜 행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는 자는 이 세상에 없다. 하나도 없다. 그러니 이 복은 죄로서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복이었다. 다만, 예수의 순종으로 인한 그리스도적 구원에 의한 말씀에의 온전한 이행, 그리고 그 삶을 전가받은 자들을 위한 복이었다.
예수의 그리스도적 사명 이행으로 그해택을 전가받은 우리들, 그 우리들이 하늘에서 누릴 복을 은유적으로 설명해 놓은 것이 구약의 옛 축복이었다. 그 복을 천국의 그림자로 구약에서 모형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는 어떤 복을 좇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신약식을 살고 있으면서 율법의 구약식 복을 좇고 있지는 않는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이 못미더워서 이 땅의 복을 여전히 좇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으로 사는 오늘을, 지금을 찬양하며 감사와 감격으로 사는가? 성경은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예수도 명확하게 선언하였다. 그런 것들은 하늘 복의 모형이었고 그림자였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그림자를 실체로 보고 좇는 이들이 많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 그런 우리들은 이미 하늘 복만으로도 행복하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5~17) 이 세상이 사라지고 이 세상의 욕망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는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다. 바울은 자기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주저 없이‘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 하늘 복에 이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이 없어졌다는 것, 유대인들에게 개 같았던 이방인, 그랬던 우리도 그 하늘의 신령한 복을 받게 되었다는 말이다.
3. 만물을 충만케 하는 복
그러니 우리는 이제 그 하늘의 복을 공유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 이 감격적인 복을 제쳐두고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려 하고 율법으로 살려하는가??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 앞에 ‘모든’이라는 말은 그 하늘 복이 100% 주어졌다는 뜻이다. 누구에게는 20%, 누구에게는 40%만 준 것이 아니라 100% 모두에게 주어졌다. 그렇게 온전한 하늘의 복을 모두 받은 하늘 시민들인 우리에게 무엇이 또 부족한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했던 다윗, 고작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만 보았던 구약의 선진도 그 넉넉한 신앙을 고백하였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의 실체를 본 오늘의 우리는 왜 불안해하고 왜 걱정을 하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신데 왜 나는 늘 이렇게 부족하기만 한가?’ 하고 있는가?
내 삶에 아직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그래서 복을 더 받아야 하는 것처럼 말하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준 하나님이다. 그런 분이기에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준다. 그런데 오늘의 내가 원하는 것이 나에게 그리 많이 주어진 것 같지가 않아 불만인가? '아직 모자라도 한 참 모자라는데 무슨?' 그렇다면 하나님이 거짓말을 한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라는 곳, 이 땅에 살 사람들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삶에서 우리가 하늘을 배우고 천국 원리를 익혀야 함에 필요한 모든 것만 준다.
그러니 주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그분의 자녀로 지어져 감에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주지 않는 것이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엡1:23) 그렇다. 우리는 만물을 충만케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이다. 이 말은 우리가 아니면 예수가 충만하지 않기로 작정했다는 말이다. 적어도 우리는 그토록 존귀하고 요긴한 존재이다. 예수와 한 몸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예수는 충만이 아닌 조금 부족한 분이 된다. 이 정도로 고집스럽게 하나님은 열심을 내신다. 우리의 신분이 그토록 견고한 것이다. 그 충만한 복을 받아놓고도 여전히 내 문제만 바라보는 속물과 연약함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미 우리는 그 하늘의 충만한 복을 받아놓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결론
이런 믿음의 이치를 소망으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죽을 병이 걸려도 그리 슬프지 않다. 좀 궁핍해도 기죽지 않는다. 하늘 복으로 사는 우리는 그렇게 산다. 그렇게 그리스도로만 만족한 우리들을 가리켜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혹, 지금도 구약의 율법적인 복을 좇고 있는가? 이제는 내가 어떤 복을 받은 존재인지, 삼위의 하나님이 나의 구원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는지 말씀을 통하여 정리하자. 그래서 그 하늘 복을 받은 자로서, 그 나라 시민으로 2024년을 살아내 보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 하라.“ (마5:4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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