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2. 29. 23:00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악한 자여 의인의 집을 엿보지 말며 그 쉬는 처소를 헐지 말지니라 대저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24:13~16)
믿음은 내가 쟁취하여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그 주어진 믿음을 발휘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성령이 나에게 들어와 믿음을 이해시켜 주지만 그 성령이 나를 대신 믿어주지 않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선물로서의 이 믿음을 온전한 믿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은 오로지 나의 몫이다. 우리는 그렇게 약한 육체와 제한된 시간과 공간을 살면서 그 믿음을 체험적인 ‘나의 것’으로 만들어 사고 있다.
1. 인지부조화 이론
그런데 우리의 현실 삶에서 말씀으로부터 주어진 이 믿음을 흔드는, 또는 흔들리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요원해진 성공, 성취될 수 없는 이상들이 신비하게도 요술처럼 눈앞의 기적들로 현실이 될 때 더욱 그러하다. 마귀는 보이는 현실의 성취감이나 만족들을 무기로 하여 신실한 이들의 경건,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기쁨을 대체시키게 한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을 소유할 우리의 기회를 지연시키거나 그 시간들을 망각케 한다. 일단 그렇게 신비한 신앙 현상들을 경험한 이들, 손쉬운 성공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믿는 길에 들어선 이들은 성경에 입각한 설명을 해도 바뀌지 않는다. 유명한 심리학자 스키너의 ‘인지부조화 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사람이 믿고 있던 것과 사실이 충돌을 일으킬 때, 자기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자기 믿음에 꿰어 맞춘다는 요지의 이론이다.
이 이론은 심리학자 스키너보다도 더 이전에 ‘레온’이라는 사람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이론이었다. 그 배경은 이러하다. 오래전, 미국 미네소타 주에서 휴거 소동이 있었다. 그 해 12월 21일에 세계 종말이 온다고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가족, 재산, 직장을 버리고 신앙공동체를 구성하고 그날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정작 그날이 닥쳤는데도 휴거가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그들은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그들이 몹시 당혹해하고 창피해할 줄 알았는데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뻐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열심히 세상에 빛을 퍼뜨린 덕분에 하나님이 특별히 우리 인간들에게 기회를 더 주셨다’ 자신들의 믿음을 합리화시킨 것이다. 광신적인 신도 집단들의 그 사건에서 레온이 ‘인지부조화 이론’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이다.
먼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한국에서도 그와 유사한 일들이 있었다. 한때 노벨 생물학상 후보로까지 떠올랐던 서울대 생명공학과의 황우석 박사 사태가 그것이었다. 그의 연구들이 거짓과 사기로 판명되었음에도 사람들이 촛불 들고 광화문으로 모여들어 ‘황우석 박사 살리기’를 외치며 그에 대한 각종 보도들은 음모론이라고 주장하였었다. 촛불을 들고 광화문 광장으로 모였던 그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 인간들은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보다는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믿음을 합리화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악한 본성이기도 하다. 이는 오늘날의 신앙 환경에서도 다르지 않다. 신비주의나 경험주의, 기복주의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성경에 근거한 바른 복음 전달이 어렵다.
2. 미혹과 의문의 시간들
대체로 오도된 믿음의 소유자들은 자기들이 잘못 믿었다고 고백하기보다 바른 복음을 전하는 이의 약점 찾기에 주력한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들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으로 다시 나고 그 성령으로 사는 이들은 다르다. 잘못을 지적받으면, 그것도 말씀에 근거하여 잘못되었을 알게 되면 바른 믿음으로 돌아서게 된다. 사실, ‘오직 믿음‘이나 ’오직 성경‘ 이런 구호들이 교리적이라 매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믿음 생활에 들어선 후에도 상당한 혼란의 시간들을 겪는다. ‘내가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이 맞나?’ ‘왜 예수를 믿는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나보다 더 잘 살고 행복해 보이는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이런 의문들과 미혹들로 혼란스럽다. 그때 필요한 것이 성경에 대한 정확한 이해이다. 성경에 대한 정확하고 바른 이해는 혼란스러운 머리, 복잡한 생각으로 보호하는 것이기에 바울은 이를 '구원의 투구'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4~17) 그런데 ‘구원의 투구’라는 말로는 막연하고 구태스럽기까지 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쓰라는 것인가? 바울은 그의 서신서 여러 곳에서 이 구원의 투구를 언급한 바 있다. 그리고 여기 ‘구원의 투구’에 하나가 더 붙인 것이 있으니 그것이 '소망‘이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 할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살전5:5~8)
그러니 구원의 투구는 소망과 관련이 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뒤 반드시 어려움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교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애초에 손해와 비방을 감수하고 예수를 믿었다. 심지어 유사시에는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로 예수를 믿었다. 그런데 약한 육신의 우리들은 그런 어려움이 계속되면 지친다. 그러면 조만간에 혼란이 찾아온다. 그 혼란과 흔들림은 일시적으로 오기도 하고 때로는 장기적으로 긴 시간 동안 생각을 지배하여 인생의 방향을 빠꾸는 양상으로 찾아오기도 한다. ’’ 이것이 내가 가야 하는 길이 맞나?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 했는데 왜 이런 것 하나 막아주지 못하시나?' 이런 회의에서부터 시작하여 '정말 영생이라는 것이 있기는 한가? 있다면 그것을 나 같은 이에게 허락해 주기는 할까? 왜 나만 보하고 섬기며 살아야 되나? 그렇게 살아온 내게 하나님은 무엇을 주었나?‘ 궁극적인 의문으로까지 발전한다.
3. 그럼에도 믿음과 소망
이런 혼란 끝에 어떤 이들은 더 깊은 방종의 길로 가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아예 신앙 자체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아니 부정하는 지경까지 치닫기도 한다. 이런 이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에게 한 때 있었던 신앙은 무엇이었을까?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렇게 떠나간 이들을 가리켜 단언하게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아니었다.’ 사실, 우리도 종종 오랜 인내 끝에 의심이나 혼란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예수를 처음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척 알아보았던 세례 요한은 어떠했던가? 그는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 때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는 것까지 직접 보았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도 자신이 감옥에 갇히자 삶이 불행해지자 의심과 미혹에 빠졌었다. 그때 그가 사람을 보내어 ‘오실 그 이가 정말 당신이 맞습니까?’ 하고 묻기도 하였었다.
‘당신이 메시아가 맞다면 왜 내가 이렇게 감옥에 갇혀있어야 하나?’ 하는 항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에는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었나 보다. 아무리 지극한 효자라도 길고 긴 부모님 간병에 지친다는 말이다. 인지상정이라 지극히 공감되는 정서이다. 고난의 강도가 깊어지고 그 기간이 길어지면 인간은 누구나 인내심은 한계를 맞는다. 신앙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바로 그때 마귀가 우리의 정신, 생각을 파고들어 혼란을 야기한다. 초대교회 때에서 그런 인내심의 한계적 장면들이 많았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기롱 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 하여 가로되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3:3~4)
초대교회 교안들은 '내가 곧 다시 오마' 하고 갔던 예수가 자기들 생전에 올 줄 알았었다. 그래서 기다렸다. 그런데 1년이 가고 5년이 가고 10년이 갔는데도 예수는 오지 않았다. 게다가 박해는 더 심해졌다. 그때 마귀가 기롱 하는 자들을 준동시켜서 미혹하였다. ‘다 거짓말이야, 오지도 않는 예수 기다리지 말고 한번뿐인 인생 네 마음대로 살아’ 이런 일들은 새삼스럽지 않다. 신앙으로 사는 이들에게는 상존하는 일들이었다. 구약에도 그런 혼란을 겪었던 신앙인들이 자기 심경을 토로하는 시들이 많았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실족할 뻔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 '(시73:1~6)
결론
신앙으로 살지만 우리의 참음이 한계에 다다르면 우리는 혼란을 겪는다. 그때 ‘구원’이라는 소망의 목적지를 확인하는 것이 ‘구원의 투구’, 즉 성경 말씀이라는 '꿀'이다.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지혜가 네 영혼에게 이와 같은 줄을 알라. 이것을 얻으면 정녕히 네 장래가 있겠고 네 소망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의인은 일곱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잠24:13~16) 믿음으로 사는 삶이 힘든 일이지만 분명 그것을 통하여 주는 유익이 있다. 내 힘의 약함을 깨닫게 하는 유익, 그래서 전능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함을 깨닫는 유익, 그것이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소망이고 하나님이 주는 은혜이다. 우리에게는 이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으니 흔들리지 않는다.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벧전1: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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