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14. 18:45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9:4~5)
믿음을 생각하면 하나님의 선물이 생각나고 선물하면 이어지는 생각이 은혜이다. '은혜'라는 너무도 익숙한 단어, 이 단어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한가? 우리의 온전치 못함, 즉 죄 때문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온 이후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가 되었다. 물론 죄를 짓기 이전에 필요했던 사랑도 은혜를 근거에 한 사랑이었다. 이 은혜는 사망에 이를 우리 인생들에게 부어진 복음의 다른 명칭이다. 나의 삶, 우리의 추구하는 욕망들이 저주와 심판에 놓여있기에 우리 인생에 은혜가 필요했던 것이다.
1.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기본적으로 우리 인생은 저주와 심판에서 놓여 날 길이 없다. 이 사실은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믿음의 성찰이 예민해질수록 더 분명해진다. 내 힘으로는 세상 욕심에 대한 소원을 멈출 수가 없고 현실의 야망에 대한 욕구를 다스릴 수가 없음이 실감되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때 하나님이 베풀어 주는 것이 은혜이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으니 이제 그 예수를 믿는 인간은 구원받고 믿지 않는 인간은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이다. 언뜻 맞는 말 같지만 정확한 분석이 아니고 적절한 표현도 아니다. 우리는 예수를 알아볼 능력도 없었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아예 죽어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경이 이 사실을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엡2:1)
우리는 그렇게 죽은 자들이었다. 죽은 자들, 즉 시체가 무슨 말을 알아듣겠는가? 죽은 시체가 어떻게 사리 분별을 하겠는가? 그런 처지에서 어떤 요구를 할 수 있겠으며 무슨 노력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죄로서 죽었다. 완전히 죽어 있었다. 그러기에 그런 우리에게 은혜가 필요했다. 그 은혜를 우리에게 주기 위해 하나님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요1:17) 율법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모두 심판 아래에서 죽어야 할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은혜를 입고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니 기독교에서 이 예수가 빠지면 기독교도 아니다. 그리스도를 빼면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은혜가 어떤 것이었나?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3:17~18) 이로서 은혜의 성격이 명확해졌다. 하나님은 죄로 죽은 우리와 화목을 위해 예수를 빛으로 세상에 보냈다. 우리를 사망에 방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 세계로 이끌어 살리기 위해, 거룩한 당신과 다시 관계하기 위해 은혜를 부어 준 것이다.
2. 하나님의 일방적인
그렇게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빛이 이 세상에 왔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1:10~11) 빛이 왔으나 그 빛을 알아보지 못하였다는 이 말은 당시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당시를 포함한 오늘의 우리를 모두 향한 말씀이었다. 분명, 하나님이 구원키로 작정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까지 하나님에 의해 보내진 빛을 알아보지 못했다. 창세전에 선택받았다는 그 하나님의 사람들이 빛으로 온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우리는 죽어 있었다. 죄의 오염에 쩔어 완전히 죽어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더욱 하나님 쪽에서의 은혜가 필요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많은 민족들 중 왜 굳이 이스라엘을 택했을까? 7000년 전 아담으로 중동 사람이 아닌 한반도의 단군은 왜 아니었을까? 꼭 이스라엘이어야만 했을까? 혹 아담이 한국 사람이었으면 뱀이 유혹했을 때 그 뱀을 잡아먹어 에덴동산의 시나리오가 틀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을까?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7:6~7) 이스라엘이 뛰어나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것, 보잘것없는 그들을 선택하여 어떻게 당신의 능력으로 하늘 백성을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별 볼일 없는, 적은 민족을 택하였다는 말이다.
그렇다. 이스라엘의 특별함을 증거 하고자 함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함이었다.‘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신9:4~5) 유대인이 똑똑해서가 아니었고 특별히 뛰어났거나, 의로워서가 아니었다. 은혜라는 것은 그렇게 자격 없고 준비도, 요구도 없었던 자들에게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우리에게 계시한 것이다.
3. 왜 스데반이 아닌 바울을
오늘 우리는 믿지 않는 주변의 다른 이들과 무엇이 달라서 주일마다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가?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1:26~29) 이것이다. 별로 특별하지 않은 우리를 들어 하나님이 당신의 일에 쓰기 위함이었다. 내가 선한 사람이어서? 내 가진 달란트가 특별해서? 결코 그런 것 때문에 하나님이 은혜로 부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가장 속기 쉬운 것이 성직자, 특히 목사에 대한 편견일 것이다. 정말 목사들은 무언가 남달라서 하나님이 들어 쓰는 사람일까? 큰 교회나 대형 교회들의 경우, 그 교회의 담임 목사 학력이 어마어마하다. 미국의 유수한 대학원 과정을 거친 박사 학위 등등, 그런데 그렇게 세상적으로 인정받는 잘난 목사들의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 ‘‘저분은 무엇인가 남 다른 데가 있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들어 쓰신다’는 것을 믿고 싶은, 아니 믿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다르지 않고 특별히 뛰어나지 않다. 목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 하는 인생으로 사는 것이지 자기 능력과 학벌, 수완을 발휘하여 하나님을 돕는 존재들이 아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사는 인생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게 보여주고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바울은 어떠했던가?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그가 정말 사도로서 적합한 자였던가? 성경 기록으로만 보아도 그는 기독교인들을 가장 많이 핍박했던 자였고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현장 책임자였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 그가 옷을 맡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은 그가 ‘이 모든 일에 대해서 내가 책임 진다’는 최종 책임적 행위였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기독교인들 더 잡아 죽이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그 노상에서 예수를 만났다. 어찌하여 하나님은 죽으면서도 천사의 얼굴을 했던 스데반이 아닌 그를 사도로 택했을까?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살려서 이방의 사도로 쓰셨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 그분의 역사가 세상의 이치와도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죄로 따지자면 열 번도 더 죽었을 나 같은 흉물에게도 은혜를 부어주셨다. 그 은혜로 우리가 산다.
결론
이 은혜를 알았기에 훗날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15:10) 바울은 많은 수고를 했다.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수고를 하고 사도가 된 모든 것을 은혜로 돌렸다. 그것은 과장하거나 겸손을 내세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정말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자기가 한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은혜가 아니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 발짝도 진보할 수 없다.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은 열심히 구원을 이루어 가는데 우리들은 계속해서 그 은혜를 저버린다는 것, 그럼에도 다행한 것은 하나님은 끝까지 쫓아가며 은혜를 베푼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우리 받은 은혜는 하나님이 시작해서 하나님이 마친다.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케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수하겠으며 내가 또 나의 손을 네게 돌려 너의 찌끼를 온전히 청결하여 버리며 너의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내가 너의 사사들을 처음과 같이, 너의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칭함이 되리라.“ 하셨나니‘ (사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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