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언약

2023. 12. 8. 17:23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이라 가라사대 "너희는 이 언약의 말을 듣고 유다인과 예루살렘 거민에게 고하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이 언약은 내가 너희 열조를 쇠풀무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내던 날에 그들에게 명한 것이라 곧 내가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렘11:1~4) 

 

구약과 신약, 이 명칭들이 말하는 것처럼 성경은 전체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이루어져 있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구원사를 경륜해 가며 인간들을 대하는 방법이다. 구약 39, 신약 27이라는 성경 이야기에서 구약은 무엇을 말하고  신약은 어떤 것을 전하고 있는가? 그 둘은 어떤 관계인가? 구약과 신약을 별도로는 이해할 수 없다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구약과 신약은 전체가 일관된 하나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데 그 주제가 무엇인가? 옛 언약구약 전체에 흐르는 언약이었다. 내 목소리를 듣고 나의 명한 모든 명령을 좇아 행하면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의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언약이었다. 그런데 그 언약은 흠이 있는 언약이었다. 하나님이 하신 일에 흠이 있다? 하나님이 실수라도 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옛 언약은 그 홀로 완성품이 아니라 어디로 향하고 있는 언약이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결론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불완전한 언약인 것이다.

 

1. 구약의 존재 이유

거듭 말하거니와 옛 언약은 새 언약으로 결론되기 위해 존재한다. 옛 언약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구약의 율법과 제사제도들 모두 메시아를 설명하기 위함이었다. 그 많은 구약의  율법과 제사라는 옛 언약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구약을 줄 때 새 언약을 염두에 두었다. 그 옛 언약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것이 무엇이었던가? 나를 청종하고 내 말을 지키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그러나 이 언약의 다른 쪽 당사자였던 이스라엘은 신실화지 못하였다. 그들은 탈이집트 과정에서 죄를 지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계속 죄를 지었으며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도 여전히 죄를 지었다. 이는 구약의 제사 제도와 율법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그러니 구약의 율법은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무능력을 지적하는 수단이요 과정에 불과하였다.

 

그 결과, 인간에게는 신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당위성이 조성되었다. 어쩌면 구약은 그 방향으로 향하는 사다리였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갈3:24) 그리스도로 결론지어지지 않는 구약은 무의미하고 이스라엘의 민속 역사에 불과하다. 예수가 없는 인간은 어떤 존재이고 어떤 처지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역사요 율법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구약에만 머물고 있는 유대인들은 여전히 자기들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이 쓰는 구약 성경의 순서는 오늘날 우리의 구약 순서와 다르다. 그들의 구약은 역대하에서 끝난다.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와 성전 짓는 내용으로 끝을 맺고 이제 사무엘하의 다윗 언약의 성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구약은 말라기에서 끝난다. 구약의 끝인 말라기 내용이 무엇이었나? 가나안으로 돌아와서도 유대인들은 끝까지 옛 습성을 버리지 못하였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도 성의가 없었고 십일조도 마지못해 형식만 갖추었을 뿐 형편없는 것들을 바치면서 경건의 모양을 내세웠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을 닫아버렸다. 그것이 말라기이다. 그렇게 구약은 인간의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그 구약에는 메시아가 반드시 올 것이고 또 와야만 한다는 것을 곳곳에서 피력하고 있다'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계3:9) 예수를 부인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 하는 율법주의들을 가리켜 사탄의 회라 하였다. 그만큼 기독교에서는 모든 것이 메시아라는 예수, 즉  그리스도로 결론이 나야 한다.

 

2. 신약과의 관계

옛 언약과 새 언약의 관계는 첫 창조와 새 창조의 관계로도 이해할 수 있다. 혼돈과 공허가 흑암에 있던 무질서 상태, 그 심란한 상황의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면서 창세기는 시작되었다. 둘째 날에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을 나누고 셋째 날 물과 땅을 나누었으며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는 그때까지 만든 그 틀 안에 내용을 채웠다. 그리고 완성된 창조를 일곱째 날에 안식하면서 즐기는 것, 그것이 창세기의 창조였다. 이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인 우리 인생이 하늘빛으로 구원받게 될 과정과 방식을 계시함이었다. 사실 성경은 곳곳에서 그런 방식으로 임하는 빛을 예수 그리스도라 암시하였다‘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고후4:6) 창세기 첫째 날의 빛이 있으라한 하나님 말씀으로 나타났던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사도 요한이 그의 복음서 1~2장에서 이야기한 것도 그 창조를 풀이함이었다. 빛이 오고 그다음에 세례를 받으며 이후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와 함께 묵었던 과정은 정확하게 창세기의 셋째 날까지의 창조가 그 예수의 사역에서 재현되고 있음이었다. 빛인 예수가 와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갈라짐으로 상징되는 세례 사건, 물이 한 곳으로 물러가고 땅이 드러나는 상징으로 우리와 하나님인 예수가 함께 거하심,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당신의 제자들을 불러 모음은 셋째 날까지의 천국 틀에 당신 백성들을 채우는 방식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일곱째 날에 천국 혼인잔치를 상징하는 가나 혼인잔치가 열린 것, 즉 창세기의 창조와 요한복음의 사건들은 예수가 그 새 언약을 어떻게 이루어낼지를 힌트 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는 새 창조를 전제하는 창조였기에 그 자체로는 불완전 면이 있었다. 그래서 빛이 창조되었음에도 어둠이 여전히 공존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그 어두움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빛으로 가득 찬 당신의 나라를 완성할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둘째 날의 궁창에서 나누인 위의 물과 아래의 물, 아래의 물이 하늘로 향하는 길을 막고 있었다. 궁창과 그 위의 물은 이후 율법과 제사에서 성막 물두멍과 휘장으로 묘사되었다. 이는 훗날에 휘장인 예수의 몸이 찢겨 궁창 위의 물이 물러가고 하늘로 가는 길이 열릴 것임을 계시한 것이다. 궁창 아래 물인 바다는 셋째 날까지도 물과 땅의 공존 상태로 있었으니 성경에서 물은 심판, 혹은 죄악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의 계시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묘사함에서 다시 바다가 있지 않겠고라고 하였다. 모든 죄악의 물들이 물러가고 다시는 바다가 있지 않은 세상이 반드시 완성된다는 것, 그것을 셋째 날의 창조가 담고 있으니 창세기의 창조는 새 창조의 그림자들이었던 셈이다. 어떻게  어둠이 물러가고 어떻게  물이 말라버리며 어떻게  막혔던 궁창이 뚫리게 되는지, 어떻게  어둠과 혼돈의 상태로 떨어진 벌거숭이 아담들이 세마포를 입게 되는지, 이것을 옛 언약으로 새 언약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이다.

 

3. 옛 것을 새것으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우리 인격적 존재들은 모두 그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완성해 가는 방식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계획 없이 막무가내로 일을 진행하는 분이 아니다. 인간이 타락할지 안 할지도 조바심을 내는 마음으로 인간의 처분을 기다리는 분도 아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 아담들이 죄를 다스리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창세전에 미리 십자가를 준비해 놓으셨다. 먼저 계획을 세워두고 인간을 창조하여 그 동산에 선악과 계명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첫 창조는 새 창조의 준비 단계일 뿐이요 임시적이고 낡아지며 부서질 필연이었다. 그 첫 창조물인 것들, 즉 태양도 빛을 잃을 것이고 언젠가 달도 기울 것이다. 열심히 살려해도 잘 안 되고 선하게 살려해도 세상에 악한 이들이 더 많다. 왜 하나님은 이렇듯  조금 아쉽게 이 세상을 만드시고 그대로 놔두실까? 여기가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아님을 첫 창조 현장에서 경험하라는 것, 그것이 이유이다. 이 세상, 여기 이 첫 창조는 임시적이며 잠정적인 우리의 주거지일 뿐이나 저 하늘, 새 창조는 영원하고 썩지 않을 것으로 지어지는 차원의 세계이다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히8:13) 영적인 새 창조를 목적으로 하나님은 이 우주를 창조하셨다. 여기 이곳은 곧 낡아지고 부서지고 불에 타버릴 우리의 임시 주거지이다. 그러면 구약의 율법은 무용하고 몹쓸 것인가? 아니다. 율법은 선하다. 하나님의 뜻과 인격을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지킬 능력 없음이 문제이다. 우리 인간은 율법으로 자신이 얼마나 불가능한 존재인지를 깨닫는다'유다의 죄는 금강석 끝 철필로 기록되되 그들의 마음판과 그들의 단 뿔에 새겨졌거늘' (렘17:1) 죄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단단했으면 금강석 끝 철필로 그 죄가 마음 판에 새겨졌다고 했겠는가? 그렇게 돌판같이 딱딱한 죄의 마음을 하나님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꿔놓는 것이 새 언약이다'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겔36:26)

 

모세는 돌비에 새긴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왔었다. 이 날은 그들이 탈이집트 한 유월절부터 계산하여 정확히 50일째였다‘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 명 가량이 죽인 바 된지라‘ (출32:26~28) 유월절 이후 오십 일이면 오순절, 율법이 산 아래 죄에 닿으니 그날에  3000명이 죽었다. 그러나 신약의 오순절 날에도 새 언약의 성취로 새 영이 내려왔다. 새 영이 똑같은 죄인들에게 부어지니 3000명이 회개하고 돌아왔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2:39~41)

 

마무리

이렇듯 성경은 정확하게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하고 있다. 옛 언약은 3000명이 죽는 것, 새 언약은 3000명이 사는 것으로 비교되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양상이 판이하게 바뀐 것인가? 십자가 사건, 하나님의 은혜가 개입하자 사망이 영생으로 바뀐 것이다. 그것이 복음이고 성경이다. 율법으로 죽어야 할 죄인들 자체는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바꾸어 주는 것, 그래서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살 수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을 새 언약이라 한다. 성경은 그렇게 메시아 예수를 향하여 창조부터 시작하여 계시록까지 달린다. 그러니 구약은 예수를 설명하기 위한 구원의 그림자이다. 그것 외에 성경은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저 첫 언약이 무흠하였더면 둘째 것을 요구할 일이 없었으려니와 저희를 허물하여 일렀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볼지어다!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리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열조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저희와 세운 언약과 같지 아니하도다. 저희는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저희를 돌아보지 아니하였노라."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또 각각 자기 나라 사람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할 것은 저희가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새 언약이라 말씀하셨으매 첫 것은 낡아지게 하신 것이니 낡아지고 쇠하는 것은 없어져가는 것이니라' (히8: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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