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28. 15:0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므로 임산 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미5:2~4)
예수가 탄생한 곳은 베레헴이라는 변방 마을, 이곳은 오래전부터 '다윗의 동네'로 알려져 왔다. 그 마을로 요셉과 마리아가 찾아들었다. 왜 이들은 베들레헴으로 왔을까? 당시 로마 황제의 인구조사령 때문이었다. 황제의 그 행정령은 결과적으로 구약의 현자 미가의 예언 성취를 이루었다. 자신의 행정 명령이 하나님의 예언 성취에 일조되었음을 황제는 알았을까? 몰랐을 것이고 관심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경 기자는 하나님이 당신의 예언 성취에 지상 최고의 권력자까지 도구로 사용하였음을 암시한다. 마치 중동의 패권자 고레스왕이 유대 포로 귀환령을 내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예언 성취 도구가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것이 성탄의 신비에서도 계시되어 있다.
1. 시골 변방에
누가는 그의 복음서 2장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신 곳이 '구유'였다고 전한다. 왜 방이 아닌 구유였나? 누가는 그 이유를 사관, 즉 여관에는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기록자 누가가 사용한 단어 '사관' 혹은 '여관'이라고 번역된 원어 '카타뤼마'는 상업적 숙박소를 말함이 아니다. 그런 종류의 단어로는 '판도케이온'인데 눅10:35에 '주막'으로 번역되어 있다. 그러니 '카타뤼마'는 '손님방', 또는 '사랑방' 정도일 것이다. 당시 베들레헴으로 많은 이들이 한꺼번에 몰려 온 까닭에 산모와 신생아를 돌볼 공간이 없었다. 이는 과거 이 마을이 많은 인구로 번성했던 곳이었음을 짐작케 하는데 실제로 이스라엘의 별이고 자랑인 다윗이 이 고장 출신이었고 현자 사무엘에게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던 고장이기도 했다. 다만 훗날에 앗수르 침략과 바벨론 약탈로 황패해지면서 로마 식민 지배 아래 잊혀가는 변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변방 마을을 찾아갔던 마리아는 가축의 먹이를 담는 여물통 '구유'에 아기 예수를 낳았다. 당시 가난한 농가에서는 사람이 거하는 곳과 가축이 거하는 곳이 한 지붕 아래 같았던 경우가 다반사였다. 다만 누가복음의 예수 탄생 기사에서 주목할 것은 같은 이야기를 전하는 마태복음이 예수 태어난 곳을 '집'(마2:11)이라 표현한 것과 달리 누가는 그곳을 굳이 '구유'라고 특정하여 전한다는 사실이다. 왜 굳이 누가는 '집'이 아닌 '구유'라 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게다가 주의 사자들로부터 아기 메시아의 탄생을 전해들은 대상도 의외였다. 밖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에게 나타나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알린 것이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이 어마무시하고 기쁘기 그지없는 소식을 전해들은 첫 청중이 황제나 총독이 아니요 대제사장이나 귀족들이 아닌 들판의 목자들이었다는 말이다.
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파될 장소도 놀랍다. 그곳이 왕궁이나 성전이 아니라 목자들이 양을 치던 '바깥'의 들판이었다.메시아가 태어난 곳이 '구유'였고 그 태어난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들이 '목자들'이었으며 그 소식이 전해진 장소도 '바깥'이었다는 것,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다분히 의도적이지 않은가? 그렇다. 하지만 그것이 누가가 전하는 첫 번째 성탄절 소식의 메시지였다. 구유, 목자, 들판이라는 세팅들은 세상의 영웅, 인류 구원자가 탄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배경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더구나 당시 사회에서 목자는 하층민이었다. 속된 기준으로 보자면 인류의 메시아는 화려한 왕궁이나 엄중한 대성전에서 알현함이 당연했다. 세상의 힘깨나 쓰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영광 가운데 태어남이 마땅했다. 그럼에도 구원자가 구유에서 났고 목자들에게 먼저 알려졌으며 천사가 나타나 그 탄생을 찬양한 곳도 바깥 들판이었다.
2. 놀랍고 두려운 일
이것이 성탄의 메시지이다. 하나님을 만날 만한 기대가 없는 곳에서 기대조차 할 수 없는 자들, 그런 이들에게 하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이 최초의 성탄절이었다. 그러니 첫 성탄 사건은 '놀라움'이었다.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가 나셨는데 그 탄생이 특이했기 때문이다. 세상의 메시아가 구유에서 목자들의 찬송을 받으며 왔다는 것, 모든 이들이 예상하거나 상식적인 방식을 넘는 뜻밖의 방식으로 왔다는 것, 그래서 첫번째 성탄절은 놀라움을 넘어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 세상을 구하러 오시는 메시아는 우리의 가치기준과 생각을 뒤집는 방식으로 임한다. 이렇게 크고 경이로운 일을 접하면 두렵기 마련이다. 아마도 당시 목자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 천사가 목자들에게 먼저 '무서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킨 듯하다. 사실,이 사건에 앞서 마리아에게 수태를 고지할 때도 먼저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한 바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에 행함에 있어 평강을 배려하시는 분이었다.
자신과 무관한 임신의 정혼녀에게 고민하던 요셉에게는 어떠했던가? 그에게도 꿈에 천사로 하여금 '무서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인간들에게는 놀랍고 두려울 뿐이었지만 이 '놀라움'과 이런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성탄의 신비를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떤 하나님의 일들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 삶의 방식에 쩔어 사는 사이에, 인생 사는 즐거움에 빠져 있는 사이에, 하늘을 올려다볼 여유도 없을만큼 바쁘게 사는 그 어느 사이에,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행하신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깨닫지 못하는 양상으로 일하고 계신다. 그러니 우리는 영적 감성을 위해, 아니 그 유지를 위하고 그 예민함을 잃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한다. 항상의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하니님이 당신의 말해 온 바, 그 약속의 현실화 사건을 2023년 전 당시에 발생시켰으나 영성을 살실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였다.
그러니 놀랍고 두려운 성탄의 신비이다. <우리 신의 탄생이 세상을 위한 복음의 시작임을 알리노라> 어딘지 익숙한 이 문장은 로마 제국의 최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된 문구이다. 지금도 에베소의 프리에네 지방에 이 비문에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9년 전에 새겨진 비문이었다. 이 비문에 '복음의 시작'이라고 언급된 이가 누구였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였다. 그의 본명은 옥타비아누스였지만 전쟁에서 승승장구하고 정치적인 대적자들까지 제거하면서 인간으로서는 더 이상 오를 것이 없을만큼 가장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던 인물이었다. 그렇게 인간이 오르고 또 올라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정점, 즉 신의 반열에 올랐다고 여긴 그는 '옥타비아누스'라는 자신의 인간 이름을 버리고 '존귀한 자'라는 뜻인 '아우구스투스'라는 신명으로 개명하였다. 그렇게 바꾼 이름에서 그가 땅 위의 모든 영광을 넘어 하늘의 영광에까지 이르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 최초의 성탄절
이렇듯 인간이 신이 되려는 놀랍고도 두려운 일, 이 황당하기 그지없는 일이 로마 황실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난 것, 즉 신이 인간으로 오는 성육신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더구나 지극히 거룩한 분이 황실 요람이 아닌 짐승구유에 왔다. 그리고 그 여정은 높은 옥좌가 아니라 십자가 여정이라는 고난과 죽음이었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치욕'이라 했고 또 '거리끼는 것'이라 회피했지만 성경은 단호하고 분명하게 이를 '영광'이라 했다. 그렇다. 이 크고 두려운 일,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 우리를 구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로마가 신이 된 인간 아우구스투스의 세상 출현을 '복음의 시작'이라고 선포했으니 '복음'이라는 용어는 사실 기독교 용어가 아니라 황제의 용어였다. 황제가 전쟁에서 승리했거나 황태자가 출산한 날에 황실이 베푸는 하사품으로 빵과 고기가 제공되었으니 로마인들에게서는 그것이 복음이었다.
'로마의 복음'이 그렇게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시작되었지만 그 로마에 패망한 식민지 백성들에게는 탄식이었고 고통이었다. 그들에게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아니라 '흉하기 그지 없는 소식'이었다. 그즈음에 또 다른 복음서의 저자 마가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1:1)를 선포하였다. 그가 전한 복음은 전혀 '다른 복음'이었다. 황제가 용납할 수 없는 복음이었다. 실제로 로마 황제는 불경한 유언비어 같은 기독교의 싹을 잘르고자 신도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다. 그럼에도 파피루스로 마가가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은 오늘날까지 살아 우리에게 전해진다. 반면에 대리석을 파고 새겨서 기록했던 로마의 '아우구스투스의 복음'은 사라졌다. 아우구스투스의 대리석 비문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만 그의 복음은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예수의 복음은 오늘날까지 인류에 살아있으니 놀랍고도 두려운 일이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우리 관습과 생각을 넘어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니 '예수의 복음'이 빠진 성탄은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이들, 그 메시아가 나눠주는 빵과 고기를 기다리는 이들은 복음을 모르는 이들이다. 황제가 세상을 정복하고 목에 힘을 주어 선포했던 로마의 평화, 모두들 앞 다투어 그의 평화를 합창했던 크고 장엄했던 평화, 그 시대에 또 다른 평화의 합창이 베들레헴이라는 시골 마을에서 선포되었다. 로마가 점령한 땅, 이름조차 지워진 패배자들의 변방 땅, 그중에서도 정말 작고 보잘것 없는 시골 마을에 대낮이 아닌 밤중에 평화의 노래가 울렸다. 무대는 빈 들판, 노래의 헌정 대상은 로마 황제가 아닌 구유에 누인 아기, 말 밥통 위에 누운 아기에게 헌정된 노래는 참으로 이상한 평화였지만 이것이 인류에게 울려 퍼진 첫 성탄절 찬송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힘에 의한 거짓 평화가 아니라 하늘의 평화, 생명의 평화가 세상에 펴져나간 것이다.
결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의 편견과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래서 더 놀랍고 더욱 두렵다. 어둡고 냄새나며 짐승들 소리로 시끄러웠던 베들레헴 마구간, 이런 곳에서는 대단한 일이 일어날 기대를 할 수가 없다. 하지만 바 이런 곳에서 메시아가 탄생하였다. 그 더러운 마구간에서 예수가 탄생하였기에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 머리 숙여 경배하였으니 그 더럽고 시끄러운 곳이 곧 거룩한 곳이 되었다. 예수가 거기 계셨기에 거룩하였다. 어둡고 냄새나는 곳이 거룩한 성전이 된 것이다. 혹 이 마굿간이 우리의 마음은 아닌가? 하지만 그런 우리 마음에 예수가 메시아로 찾아온다. 그러면 거기는 더 이상 더럽고 냄새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임재한 거룩한 곳이다. 내 속에 임재하신 예수로 인해 평화로 아름다운 성전이 되는 것, 이러니 성탄은 신비인 것이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아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눅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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