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의 죽음과 날마다의 삶

2023. 12. 2. 17:29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4:10~12)

 

죽음은 분명 모든 인간에게 두려운 일이다. 잘 알던 분께서 소천하셨다. 뿐만 아니라 얼마 전  함께 기도하고 성경도 읽곤 했던 권사님도 치매로 요양 중 소천하셨다. 하나 둘 들려오는주변 지인들의 부고 소식들,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성경에서는 죽음을 형벌의 의미로 많이 쓰였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악과를 따지 말라. 그것을 따서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선언되었다. 그리고 그 일로 인간사에 죽는 일들이 기록되기 시작하였다. 창세기 5장에서부터 아담이 죽은 기록, 셋과 에노스기 죽은 기록, 더 나아가 므두셀라 등 그렇게 장수하였던  많은 이들도 결국은 죽었다는 기록들이 이어진다. 아간과 고라도 범죄로 죽었고 이스라엘도 광야에서 죄의 대가로 죽었다

 

1. 죽음 앞에서

성경에서 죽음은 이렇듯  형벌이나 죄에 빠진 인간이 결국 맞이하게 될 두려움으로 묘사되었다. 그런데 어떤 구별된 무리에게는 그 죽음의 의미가 조금 달라진다”나는 또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기록하라.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러자 성령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그들은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다. 그들의 업적이 언제나 그들 뒤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계14:13)  죽음은 형벌과 업보로만 알았는데 여기서는 복이라 한다. 예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16:25)  더 나아가 바울은 죽는 것을 자랑거리로 여겼다“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어떤 사람들에게는 죽음이 무섭고 악한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고 좋은 것이 되기도 한다.

 

저명한 의사 로스는 수십 년간 죽음 직전의 사람들을 인터뷰하였다. 그리고 그런 이들의 체험을 종합해서 임사 체험 이야기를 저술하였다. 죽음에 가까이 갔던 그 경험이 그들의 인격과 사고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를 연구한 것이다. 사실 궁금했다. 죽음이 선고되고 삶의 최종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심리와 인격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뇌생리학자들이나 의사들, 심리학자들도 공통적으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였다. 첫 단계로, 인간은 죽음의 선고를 받게 되면 대부분 그것을 부인한다고 한. “아닐 거야. 이것은 분명 오진이거나 잘못된 것일 게야.” 그래서 이 병원 저 의사들을 번갈아 가며 찾아다닌다고 한다. 두 번째 단계로, 그 죽음에 대한 진단과 선고가 확실해지면 인간은 분노하게 된다. “왜 하필 나야? 나보다 더 형편없이 사는 놈들도 많은데 왜 나이어야만 하냐고요?”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면 거래를 시도한다고 한다. “우리 아들 결혼 때까지만, 더 열심히 기도하면 낫게 해 줄 거야.

 

하지만 그 거래에 실패하고 나면 네 번째 단계로서 극심한 우울증과 자포자기를 하게 된다고 한다. “아! 모르겠다. 이제 다 끝난 거야 “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볼 뿐만 아니라 매사에 의미를 상실하는 단계에 접어드는 것이다. 그리고는 마지막 단계가 수용이라 한다. 자신의 현실, 즉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지금까지 살며 짊어지고 왔던 인생의 무거운 짐들을 모두 내려놓게 된다고 한다.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사랑하지 못했던 사람을 사랑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이 과정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급격하게 큰 폭으로 성숙해진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마지막 단계에서 아름답게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매우 드물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이 단계에서 아름답고 성숙한 죽음을 맞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보고서를 남겼다.

 

2. 장성한 분량의 충만으로

이렇듯  죽음은 한 인간이 살아생전에 못 다 이룬 인격의 성숙을 이루는 클라이맥스이다. 그러니 기독교인들에게 죽음은 귀하고도 아름다운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서 인생을 살아내는 목적이 무엇인가? 거룩이다. 다른 말로 성숙인 것이다. 우리는 성숙한 삶을 배우기 위해 이 땅을 산다. 그런데 그 성숙의 클라이맥스가 죽음이다. 물론 죽음을 통과한다고 하여 인간의 성숙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 죽음 후 하나님의 손에 의해 완전한 성숙이 마무리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장성한 분량의 성숙이 죽음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엡4:13) 성숙한 자, 이것을 거룩한 자, 순종하는 자라고도 하니 죽음은 그 성숙 과정의 정점인 것이다.

 

기독교들은 인생이라는 여정에서도 이와 똑같이 무수히 많은 죽음의 단계들을 통과한다. 삶에 닥치는 작은 아픔들, 그리고 자기 죄와 스스로의 악을 통해 작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로스 의사의 연구 결과처럼 다섯 단계를 거쳐 점차 성숙되어 간다. 하나님은 그러한 성숙을 위해 사랑하는 이들의 죄를 자꾸 들춰내신다. 이를테면, 어떤 이가 누군가의 죄를 남에게 떠벌리고 다닌다 치자. 당사자가 처음에는 완강히 부인한다. 아냐, 난 절대 그런 사람이 아냐그런데 알아보니 사실이었다. 그러면 이내 나만 그러냐?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 하며 분노 단계로 넘어간다. 그런 후에 세 번째, 즉 거래의 단계로 넘어간다. 내가 평소에 그 사람한테 함부로 대해서 그런 걸 거야그러면서 그 사람에게 잘 대해 준다. 그런데도 계속 욕을 하고 다닌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극심한 우울증과 자포자기에 빠진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받아들인다. “맞아, 내가 이런 면이 있었어. 잘못되었지, 고쳐야지그렇게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을 하며 성숙의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물론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남에게 지적받음은 힘들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 우리 죄를 찾아 자꾸 들추어내신다. 이때 중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절망 않고 좌절치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음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나 악까지도 선용하여 우리를 성숙하게 만들어 가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에서 가능하다.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부인/분노/거래/포기/수용의 과정을 거쳐서 날마다 조금씩 성숙되어 간다. 죄는 무서운 것이지만 죄에서 나오는 겸손은 선하다. 어쩌면 하나님은 그 때문에 죄를 허용하셨을 수도 있다. 그 과정이 두렵고 씁쓸한 일이지만 회개하여 겸손하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영혼은 평화롭고 확신으로 차게 되는 것이다.

 

3. 여전히 이기적인 나를 

사실, 하나님은 가장 헌신적인 이들의 마음에도 선과 악이 공존하도록 허락하셨다. 그 불완전함이 그들로 하여금 겸손하게 하고 자신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하여 자기 약점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께 달려가게 한다. 그러니 경우에 따라서는 죄도 유익일 수 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들을 통해 하나님은 나의 성숙을 만들어 가신다. 주변의 사랑하는 사람이 죽고 내가 아끼는 사람이 병에 걸리며 응원하는 이들의 사업이 무너지는 등, 내 힘으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그 상황에서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무기력감의 많은 부분이 실은 우리의 교만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기 삶의 상황을 스스로 조정하고 하고 또 그럴 힘이 없다. 그럼에도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바로 그것이 아담이 저지른 최초의 죄였다.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기 삶을 내 삶을 내가 헤쳐 나간다? 자신에게는 그러한 힘이 있다고 믿는 것,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의 정의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교만을 깨기 위해 인간 스스로 핸들 할 수 없는 일들을 우리 인생에 던지신다. 그래서 그런 상황들을 통과하면서 우리는 작은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 작은 죽음을 통과하면서 우리 인간의 한계를 느끼고 깨닫게 된다. 이기적인 나를 깨뜨리고자, 어쩌면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일들을 하나님은 어떤 이의 어깨에 책임과 의무로 얹어 주셨다. 그것이 예수가 이룬 십자가 사건이었다. 가히 성숙의 최고봉이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때로 내 문제가 아닌 타인의 문제로 아파하고 고민하게 만든다. 이런 과정을 통과하는 인생들은 그 삶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한 일이 그것이었다. 굳이 십자가를 지고 죽지 않아도 되는 분이 자기를 향한 원수들의 죄를 짊어지고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나섬이 십자가였다. 그러니 우리도 그 일들을 통해 예수를 알고 하나님의 마음을 더 배우며 성숙되어 간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작은 죽음들이다. 기독교인들은 그런 작은 죽음들을 통해 점차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 간다.. 그러니 이 작은 죽음들은 우리를 성숙케 하는 하나님의 배려인 것이다.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복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고” (히5:8~9) 그의 삶은 우리 삶의 모범이다. 작은 죽음들을 경험하여 성숙을 완성하고 다시 산 것처럼 우리들도 삶에 닥치는 작은 죽음들을 통과하면서 성숙을 배우고 결국 그 죽음을 통해 성숙 단계의 클라이맥스에 도달하여 마침내는 예수와 같은 새 몸으로 부활하게 된다.

 

결론

그 많은 경험 중에 가장 강렬하고 가장 최종적인 것이 육체적 죽음이다. 그 죽음이 의식에서 수용단계에 이르면 그 이기적인 자아가 급속하게 붕괴된다. 죽게 된 마당에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기독교인의 죽음은 복이다. 여전히 죽음이 자기 존재의 파괴요 모든 것의 상실로만 인식되는 인생은 아직도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고 외칠 준비가 되지 않은 인생이다. 거듭났다면 우리 안에는 성령이 계신다. 그런 우리는 죽음과 친해져야 한다. 늘 죽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 거꾸로 오늘의 내 인생을 바라보자. 그러면 이 순간의 인생 의미가 달리 보이고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날의 죽음 자리에서 거슬러 오늘을 바라보자.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시3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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