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 시즌의 믿음

2023. 12. 25. 17:54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9:6~7)

 

왕이신 예수가 메시아로, 그리스도가 되어 이 땅에 왔다. 만왕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왕은 나라와 백성과 영토가 있기 마련인데 정작 왕은 왔지만 왕국으로서의 조건들은 조성되지 않았었다. 그렇다고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죄로 오염된 세상과 예수가 원했던 메시아 왕국 사이를 사는 오늘의 우리는 그 갭을 좁히며 살고 있는가? 현실의 우리 삶은 그분을 왕으로 대우해 드리는가? 다시금 성탄 시즌이 왔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탄의 분위기를 즐기는 이 계절에 사람들은 주인공인 예수를 얼마나 아는가? 그 예수를 소개하는 성경을 어디까지 믿는가?

 

1. 선함보다 믿음으로

사람들은 말한다. 성경을 믿자니 황당한 사건과 기록들이 많고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고, 특히 예수의 탄생과 삶과 죽음, 더 나아가 다시 살아나고 하늘에 오른다는 이야기는 더욱 그렇다고 말이다. 그래서 자유 해석들이나 사심으로 성경을 읽는 사이비들이 이렇게 말한다. 성경이 어떻게 다 맞을 수 있나? 성경도 오류가 있는 것이니 그 속의 신화나 설화 같은 이야기는 웃고 넘겨야 한다. 우리는 거기서 이 세상을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교훈만 얻으면 된다정말 그럴까? 아니다.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해석하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치자. 나는 고구려의 시조 주몽이 실제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이었음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그가 발해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 나라를 열었으며 그의 아들들이 백제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은 믿지 않는다. 나는 그를 보지 못했고 그 시대에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주몽이라는 인물을 확실히 믿는다.’

 

이렇게 말하는 이 사람이 믿는 것이 무엇인가? 그가 정말 주몽이라는 사람이 실존했었다는 역사작 사실을 믿는다면 그의 업적과 생애도 믿어야 그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자유롭게 성경을 해석자들이 주장하는 바를 오늘의 논리로 옮기면 이런 주장이 된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그러나 그 예수의 탄생이나 이적, 그리고 부활은 믿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이들이 믿는 것이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인가? 예수의 탄생, 생애, 그의 죽음과 부활을 믿지 않으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한 모든 일을 확실하게 믿는다는 말이다. 이것을 굳게 믿는 것을 ’예수 믿는다‘ 하고 그런 이들을 ’신실한 자들이라 한다. 이것은 교회를 다니고 있느냐 않느냐 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다. 예배당을 출입하는 이들 중에도 자기를 우상시하고 다른 잡신을 섬기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더 중요한 사안이다. 선하게 살고 윤리적으로 책잡히지 않게 사는 것, 그런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삶의 목표라면 우리보다 더 선하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 많다. 비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들보다 더 도덕적이고 신사적으로 사는 이들이 많다. 그런 것은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의지로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고 또 나올 수 있다. 예수를 모르는 이들도 할 수 있는 착하게 사는 것, 도덕적으로 바르게 사는 것, 그런 것에 도달함이 신앙이고 믿음이라면 기독교가 너무 옹색하지 않은가? 정말 그런 것이라면 그것이 복음이겠는가? 오히려 무거운 짐이요 부담이지 않겠는가? 우리는 ’예수가 내 죄를 대신하여 죽었고 그로 인해 나는 자유롭게 되었다‘는 복음, 그리고 그 복음을 완성해 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2.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기독교인은 착한 사람들이 아니라 신실한 사람들이다. 신실한 이들은 확고부동한 믿음의 소유자들이면서 그들 자신들도 다른 사람들이 볼 때에 신뢰를 얻을만한 삶을 산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은 자기 유익을 위해 세상 사람들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실한 이들은 이미 너무나 귀하고 복된 것을 소유한 자들이다. 그러기에 세상 그 어떤 것들로 조금 손해 보아도 거짓말이나 위증으로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진짜 신실한 이들을 가리켜 세상이 믿을만한 사람이라 부른다. 그런데 이는 억지로 되지 않는다.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만큼 그 삶에서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오는 문화이고 철학이며 소명이기 때문이다. 신실한 자들은 그렇게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자들이다. 신앙의 선배들이 그런 삶을 살다 갔다. 불타는 화형장에서도 가이사는 주님라고 한 마디만 하면 살려 준다 했음에도 그 한 마디 하는 것조차 거절하여 죽음을 선택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믿음이 분명한 하나님의 선물이 맞다면 그 믿음은 상황이나 여건에 따라 흔들리지 않는다. 경제적인 희생이나 사회적 불이익을 당해도 요동치 않는 것이다. 그런 믿음이 신실한 자들의 믿음이다. 평소에 하나님을 잘 믿는 것 같던 사람이었으나 어려움이 닥치니 여지없이 그 믿음을 반납하거나 그 하나님을 무시하는 인생들이 현실에서 많다. 소위 신앙이 무너지는 것이다. 극성스럽다 할 정도로 열심히 교회생활 하던 어떤 사람, 하나님을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았던 어떤 사람, 그랬던 그 어떤 사람이 암이 걸렸다고 한다. 그것도 가장 고통스럽다는 직장암이었다. 직장이 막혀 옆구리를 통해 배변을 하는 불편한 삶을 오래 겪으면서 하나님께 낫기를 기도하였다 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그가 교회에서 보이지 않았다. 한참의 날들이 지난 후 어느 교인이 그를 기수련원에서 보았다고 한다. 교회를 다닐 때 하나님께 열심이었던 그 열정이 다른 곳으로 쏠려 있었던 것이다.

 

애당초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일방적인 자기 열심이었을까? 아니면 지금도 그에게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인가? 하나님이 알고 그가 알 일이지 우리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찾아온 교우에게 그가 열심히 봉사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에게  이럴 수 있냐며 교회를 떠났다는 것이다. 그가 믿었던 시간과 믿음의 열매라고 내놓은 것들은 무엇이었을까? 나에게 무엇을 해 주면 좋은 하나님, 나의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으면 좋은 하나님인가? 그렇게 자기 상황에 빚대어 정의하는 신앙은 믿음이라 할 수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산다. 그러니 예수가 살았던 삶이 우리의 삶이 된다. 그동안 우리가 살았던 엉터리 삶이 예수께 전가되었고 그 십자가 사건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인 것이다.

 

3. 이미 거룩한 신분

나와 예수가 한 몸, 이 관계를 떠나서는 구원받지 못한다. 정말  이것이 믿어지는가?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수 아들이 2000년 전에 내 죄를 다 씻었다는 것, 이것을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우리는 믿긴다.이 믿음이 노력과 학습으로 된 것인가? 아니다. 그런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을 믿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 우리 기독교인들이다. 이것이 믿어진다는 것이 암 덩어리가 떨어져 나간 것과 비교되겠는가?이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신비이다. 복된 하늘이 신비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0) 성경은 그렇게 예수가 나이고 내가 예수가 되는 것을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표현하였다.

 

그것이 하늘나라 삶의 원리인 십자가 인생이고 신실한 자들의 삶이다. 그런 원리로 살기에 이 땅에서 하늘 삶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지금 보좌 우편, 즉 하늘에 계신다. 즉,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면서 동시에 저 천국에 살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다. 이미  우리는 하늘 보좌 우편에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는 자들이며 그 하늘에서의 완성된 삶을 배우기 위해 잠시의 이 땅을 살고 있는 자들이다. 이미  우리는 하늘나라에 시민으로 들어가 있다그 영적 현실을 오늘의 소망으로 삼고 산다. 그것이 믿어지기에 이 땅에서 잠시 겪는 고난을 한 여름의 꿈 정도로 여기며 인내로서 산다. 그 신분을 아는 만큼 그 나라 시민으로의 열매를 삶에서 맺어내는 것이다. 내가 하늘에서 그런 존재이니 이 땅에서도 그런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야지이렇게 매일매일 조금씩 변해 가도록 하나님이 이끄신다.

 

그러나 오해는 금물이다. 내가 이렇게 착하게 살면 하나님이 날 천국에 보내주시겠지?’ 이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나의 신분이 이미 그렇게 정해졌으므로 거기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가 맞는 말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너희 노력으로 거룩한 자가 돼라'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너희는 거룩한 자이다’ 라고 선포한 후, ‘그러니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라’고 하였. 이 순서를 혼동하니 사람들이 오버하거나 낙심하는 것이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약3:14~18)

 

결론

내가 거룩하게 살았기에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구별되니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성도가 먼저 나오고 신실한 삶이 그 뒤이다. 내가 신실한 삶을 살아서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이 나를 구별시켜 놓았으니 내가 신실한 삶을 살게 되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은 여기에 엄청난 성경 해석의 역사가 있어왔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성도로 만들고 신실한 삶으로 이끌어왔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니 우리는 오늘도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을 살고 있다. 때문에 그 수준에 맞는 삶도 살아내게 하신다. 우리 안의 그리스도 십자가가 이끄는 삶, 그것은 비단 성탄 시즌만의 별난 축제가 아니다. 우리 일상이며 날마다의 축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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