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과 바람

2023. 11. 6. 14:45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3:1~15)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요 관원이었다. 학식도 뛰어났고 부자였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을 대표하는 공의회 회원이었다. 당시 전체 바리새인이 6,000명 정도였고 산헤드린 공의원이 100여명이었다. 그만큼 그는 당시의 유대사회에서 유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밤중에 구원을 알고 싶어 예수를 방문하였다. 성경의 이 구절은 그 뛰어나고 신실한 니고데모조차도 하잘 것 없는 한 인간에 불과함을 보이면서 그보다도 더 형편없는 이방인들을 사랑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이야기, 개취급 받던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역설한다.

 

1. 한 밤의 방문자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를 찾아왔다. 성경에서 밤이나 어두움은 죄된 세상을 상징하여 자주 쓰였다'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4~5) 유대인의 가장 뛰어난 인물도 밤에 속한 자였다는 암시이다. 인간의 위치, 그가 지닌 지식도 하나님 나라 입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니고데모가 예수께 말했다.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온 분임을 압니다멋진 신앙고백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그에게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내가 더 공부하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결심한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거듭나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그 아기는 자신의 탄생에 무슨 기여를 할 수 있던가? 태어나는 아기는 수동적이다. 오직 어미의 능동적인 수고만이 탄생을 가능케 한다.

 

성경에는 족보가 많이 나온다. 창세기, 역대상, 역대하에 많이 나온다. 다만, 신약에는 두 번의 예수 족보가 나온다.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의 족보이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 족보에는 아브라함에서 다윗, 다윗에서 바벨론 유수, 바벨론 유수에서 예수까지 14세대, 14세대, 14세대로 나뉘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넣었다. 14가 세번이라 함은 일곱씩 여섯 개이다. 창조, 안식, 완전 수인 7이 여섯 번 나온 것이다. 그리고 여섯 번째 끝이자 일곱 번째의 시작이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라는 것, 일곱 번째로의 완성은 예수로 시작된 이들의 성령 출생이라는 것, 그래서 일곱 번째 세대의 머리인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음을 굳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나 나의 열심이 아니라 성령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족보가 말해준다. 그런데 예수는 '성령으로 나야만 한다'고 해도 될 것을 왜 '물과 성령이라'고 했을까?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외워왔던 구약을 배경으로 한 언급이었다'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요3:10) 이스라엘의 큰 스승으로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일을 모르고 있느냐는 꾸짖음이었다. 즉,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하는 말들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구약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열국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겔36:22~26)

 

2. 마른 뼈에 생기를

이스라엘이 악하여 소망 없는 상태라 하나님이 가나안에서 쫓아내고 흩어버렸다. 그토록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직접 물로 씻어 그들의 더러움을 제하고 하나님의 영을 그들 마음에 새겨 다시 창조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소망이 없었다. 그것을 에스겔을 통해 계시했었는데 그 부분을 예수가 상기시켜 다시 설명한 것이다. 물은 깨끗하게 하며 정결함을 준다. 물과 성령 하면 생각나는 것이 무엇인가? 성령바람이라는 뜻도 함께 가지고 있다. 그 ‘바람이 밤새도록 불어와 을 갈라놓은 홍해 사건, 거기서 죄인들을 상징하는 애굽의 군대가 빠져 죽었다. 그러나 가나안 쪽에서 보면 애굽에서 탈출한 새 존재들이 마른땅 위로 걸어 올라오는 모양새이다. 홍해 사건이 담고 있는 메시지, 그것은 죄인들이 죽고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어 올라옴이었다. 노아의 홍수 사건도 숨 쉬는 죄인들이 모두 죽고 택한 자들만 방주에 담겨 살아남았을 전한다. 그것이 정결하게 함이다. 단지 더러워진 것을 씻거나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음인 것이다.

 

그러니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은 죄에 대해 완전히 죽고 성령에 의해 다시 살아남을 뜻한다. 그것이 재창조, 혹은 새 창조이다. 태초의 천지 창조 당시에 그 수면 위에 성령이 운행하였었다. 처음 창조부터 이미 물과 성령이 시작하였음을 성경이 말해준다. 이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인 재창조도 그렇게 이루어질 것임을 예표한다'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재창조,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의함이다. 인간의 수고가 낳은 열매가 아니다. 예수가 이어나간 에스겔 37장의 말들, 마른 뼈에 생기를 불으니 뼈들이 살이 붙고 힘줄이 붙어 군대가 되는 내용이었다. 이는 열방으로 흩어져버린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가 그처럼 말라빠진 뼈들로 그려진 것이다. 죽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먼지가 날리는 그 마른 뼈들, 그런 마른 뼈들에게 생기, 즉 성령을 불어넣으니 그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군대를 이루더라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받기 이전의 우리 모습이었다. 창세기 1장의 혼돈과 공허, 그 암담한 상태가 하나님의 질서와 성령의 충만으로 창조되어 가는 상태, 그것이 하나님 군대로의 탄생이다. 구원을 얻기 전 우리들은 오래전에 죽어서 마른 뼈처럼 먼지를 날리던 인생들이었다. 내 좋은 대로 살았고 내 욕심이 채워질 때까지 다른 이의 눈물이나 고통에 아랑곳 않고 살아왔다. 내가 가진 돈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었고 내가 쌓아 온 명성이 곧 내 인생이라 여기며 살았다. 이렇게 살아왔던 인생에 과연 예수를 믿을 수 있나? 그 마른 뼈 같은 삶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율법과 제사와 많은 언약을 주셨음에도 거듭 타락했던 유대인들, 실패하여 결국 약속의 땅에서 쫓겨났던 그들, 그런 이들이 정말 예수를 구원자로 믿을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하나님이 성령으로 그 눈을 뜨게 해 주시지 않으면 믿을 수가 없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믿겠는가? 성령이 임의로 우리에게 불어오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

 

3. 바람이 임의로 불매

그런데 우리는 믿는다. 우리의 이 믿음, 우리가 다른 자들보다 더 나아서인가? 결코 아니다. 그러니 은혜인 것이다.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한 예수의 말씀, 그 말씀에서 거듭난다는 말은 헬라어 원문으로 위로부터 난다는 뜻이다. 위로부터 오신 분이 누구였던가? 세상에 위로부터 오는 분은 오직 한 분, 예수 밖에 없다. 하늘로부터 내려와 저주와 심판의 물에 죽고 성령에 의해 다시 사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3:13) 우리는 그 예수와 함께 죽고 성령에 의해 새롭게 탄생된 자들이다. 예수와의 연합, 오직 그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러니 그 예수 품에서 죽어야 한다. 예수와의 대화 중에 비로소 니고데모도 그 의미를 알았다. 그래서 이후의 그의 행보가 이렇게 기술되었다.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요19:39~40)

 

사람이 죽으면 시체에서 악취가 나기 마련이다. 그 악취를 없애기 위해 사용했던 것이 몰약이었다. 고대에는 그 몰약이 극히 비싼 물건이라 일반인들은 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니고데모가 예수의 사체를 장례 하고자 몰약을 백 근이나 가져왔다. 몰약 백 근을 장례에 쓸 수 있는 신분, 그것은 한 나라의 왕뿐이었다.. 이는 니고데모가 예수를 왕으로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일찍이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의 탄생 때 이 몰약을 예물로 가져온 바 있다. 그것은 이미 예수가 죽기 위해 왔음을 암시함이었다. 예수가 말한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한다는 사실이 무슨 말인지 알게 된 니고데모, 그는 그것은 죄에 대해 죽고 성령에 의해 다시 태어나야 함을 알았다. 몰약과 침향을 시체와 함께 세마포로 쌈은 죽은 그 소중한 이와 함께 죽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니고데모는 그 하나님이신 예수와 함께 죽은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었다.

 

예수 곁에서 죽었던 한 강도, 그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와 함께 죽은 것밖에 없다.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그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낙원에 이르는 것임을 알았다. 그렇다 그것이 구원의 길이다. 그런 은혜를 허락하기 위해 예수가 진노의 놋뱀이 되었다. 그 어마무시한 진노, 오죽하면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아버지 하나님께 탄원을 했을까? 그 하나님의 독생자는 아버지의 저주와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았다. 어떤 신학자는 말한다. '구약의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 신약의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러나 이는 틀린 말이다. 구약 하나님은 인내의 하나님이었고 신약의 하나님이 진짜 진노의 하나님이었다. 단지 그 진노를 우리 인류에게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 예수께 모두 퍼부었다. 그렇게 모든 저주를 예수가 받아서 죽었다. 그 저주의 고통이 어떠하였을까? 아마도 불타는 지옥처럼 처참하고 고통스러웠기에 예수는 그 순간 지옥을 경험했으리라. 우리를 대신하여, 그리고 우리를 대표하여 그 지옥을 경험한 것이다.

 

결론

지옥은 무시무시한 곳이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 진노가 이 세상에 조금 맛보기로 나타나는 것이 이런저런 재앙들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는다.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다 하면서도 죄를 짓는다. 예수가 우리의 죄가 되어 죽는다면 지금도 우리는 매일매일 예수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묻는다. ‘하나님이 직접 내려와서 죽으실 것이지 왜 아들을 내려 보내셨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목숨을 요구하지 않고 아들을 요구하였다. 자식을 가져 본 이는 안다. 아파서 고통스러워하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심정을 안다. 아파하는 자식을 보면서 대신 아파 줄 수 있다면 당장 그렇게 하고픈 것이 부모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기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을 죽이셨다. 가장 소중한 것을 버려 우리를 구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왜 예수가 십자가에서 그토록 괴로워하셨던가?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아버지가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심을 생각하니 괴로워하셨던 것이다. 내 삶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때 나를 사랑하는 분이 왜 나를 이 지경에?’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아직 그 아버지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사랑하기에 이 세상에 정 주고 살지 못하게 한다. 세상에 대한 미련에서 손 떼게 하는 것이다. 그 과정들을 통해서 내 옛 성품이나 모난 인격을 다듬어지고 정금 같은 삶으로 완성을 향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가장 좋은 땅인 고센 땅에서 잘 살고 있었을 때 그 왕조를 바꿔서 그 이스라엘을 핍박하게 만드신 이유도 그 때문이다. 그 풍요의 땅이 그들의 거할 곳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이 땅에 정을 두지 않고 영원한 하늘을 소망하며 살게 된다.

 

'열국 가운데서 더럽힘을 받은 이름 곧 너희가 그들 중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로 인하여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열국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서 취하여 내고 열국 중에서 모아 데리고 고토에 들어가서 맑은 물로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케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을 섬김에서 너희를 정결케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겔36: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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