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체험

2023. 11. 6. 16:14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였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의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가라사대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막7:1~8)

 

대체로 사람들은 기도에서 응답이라는 기적을 원한다. 진짜 기적은 믿음이라는 사건 자체임에도 사람들은 실감치 못하는 것이다. 이는 기적의 근원인 예수를 보고도 그것을 기적이라 여기지 못했던 고대 유대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 많은 제사와 기도라는 경건으로 살았던 그들이 왜 그랬을까? 복잡하지 않다. 이유도 간단하고 명료하다. 기도는 하나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중심으로 응답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나님 중심의 삶이 아니라 자기 중심의 삶으로 살다 보면 결국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서 북쪽 끝 갈릴리 지방까지 원정을 왔다. 왜 왔을까? 마가복음 7장에 의하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의 예수를 만나러 온 것이다. 그런데 와 보니 예수의 제자들 중 몇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이 그들에게는 심히 못마땅하였다.

 

1. 전통과 체험

유대인들에게는 장로들의 유전이라는 것이 있었다.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다가 70여 년이 지나서 고향 땅 유대로 돌아온 그들이었다. 돌아온 그들은 자기 조상들에게 그런 시련이 닥친 이유를 깊이 성찰하였다. 그 결과, 자기 민족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이후부터는 더욱더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려 하였다. 구체적 실천으로 율법을 더 잘 지키고자 그 율법을 세세히 해석하여 많은 조항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미쉬나>였다. 그리고 그것을 더욱 자세히 쪼개어 해석한 것이 <탈무드>였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것들에 모세오경만큼의 권위를 부여하였다. 소위 장로들의 유전이 그런 것들이었다. 그 유전에 의하면, 제사장들이 성전에 제사차 들어갈 때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한다는 대목도 있었다. 나중에는 그것이 일반인에게도 확산이 되어 보통 사람들도 음식을 먹을 때에도 반드시 손을 씻어야 했다. 그러니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밥을 먹는 모습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어찌하여 저들은 부정하게도 손도 씻지 않고 밥을 먹는가?“라고 지적질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그런 그들에게 오히려 반박하셨다. 인간들의 보편적 죄성을 지적한 것이다. 인간들은 자기의 처한 상황이나 여건, 자기 경험이나 체험, 수고나 성공 같은 것들로 남이 신앙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 더구나 그런 것들로 자신의 믿음 척도로 삼아서는 더더욱 금물이다. 그런 것들이 우리 신앙의 내용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기 체험이나 경험, 또는 노력으로 신앙을 정의하는 이들이 주변에 너무도 많다. 얼마나 율법을 아느냐, 얼마나 그 율법을 실천하였느냐, 또는 얼마나 큰 경험을 했느냐,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느냐 하는 것으로 신앙의 경중을 가늠하는 것이다. 물롬, 기적 체험, 당면 문제에 대한 기도의 응답은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방법일 수 있다. 그리고 계율적 삶이나 금욕적 삶이 종교적 깊이를 더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신앙의 내용이 된다면 위험할 수 있음을 예수가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신앙 내용으로 삼게 되면 내가 얼마나 많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는가? 내가 얼마나 많은 체험을 했는가? 내가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는가?’로만 따지게 된다. 그 결과, 다른 이들의 체험과 자신의 신앙을 비교하게 되니 내 기도 응답이 큰 것이냐, 당신의 기도 응답이 더 큰 것이냐로 우열을 두게 되고 내가 겪은 체험이 큰 것이냐 당신이 겪은 체험이 더 큰 것이냐로 서열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 자기 체험이나 노력으로 신앙을 정의하는 이들은 진짜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다. 신앙은 그런 밖의 것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의 예가 말해준다. 자극을 경험한 이들은 더 자극적인 기적을 원했다. 그렇게 찾아온 이들에게 예수는 말했다. “너희가 표적을 본 것이 아니라 떡 먹고 배불러서 날 찾아왔구나”  외적 체험이나 경험으로 신앙을 가름하려는 이들은 자기들이 많은 기적을 체험했다 여긴다. 하지만 진정한 기적인 구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음을 예수는 지적하고 있다.

 

2. 새 마음과 새 영

오늘의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고 어떻게 신앙하고 있는가? 어떤 이는 말한다. ‘믿는 사람들이 광신자가 되어서는 위험하다, 믿으려면 교양 있고 품격 있게 믿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다. '무슨 기적이나 쫓아다니고 체험만 하려고 이리저리 따라다니면 곤란하지' 그러면서 기도한다. 하나님, 나는 그런 자들처럼 엉터리 신앙을 갖지 않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도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다. 앞의 사람들과 다른 것 같지만 실은 같은 사람들이다. 전자의 사람들이나 후자의 사람들 모두 자기가 소유한 것, 자신의 견해나 지식으로 다른 이의 신앙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얼마나 큰 체험을 했는가, 얼마나 바르고 철저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는가, 혹은 얼마나 인격적이고 교양이 있는가, 사실, 모든 각자의 사람들이 나름의 자기 자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자기 신앙을 정의함은 진짜 구원을 아직 모르는 인생이다. 우리 신앙의 목표는 그런 체험, 율법 행위, 선한 삶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나를 선하게 할 수도, 구원할 수도, 더럽게 할 수도 없다‘만물보다 더 거짓되고 썩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니 누가 그 속을 알 수 있으랴?’ (렘17:9) 그렇다. 바로 이런 우리 마음을 하나님이 뜯어내고 완전한 새 마음으로 창조해낸다‘내가 너희에게 맑은 물을 뿌려서 너희를 정결하게 하며 너희의 온갖 더러움과 너희가 우상들을 섬긴 모든 더러움을 깨끗하게 씻어 주며 너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고 너희 속에 새로운 영을 넣어 주며 너희 몸에서 돌같이 굳은 마음을 없애고 살갗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며 너희 속에 내 영을 두어 너희가 나의 모든 율례대로 행동하게 하겠다. 그러면 너희가 내 모든 규례를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 그때에는 내가 너희 조상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살아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겔36:25~28) 완전히 새 마음으로 창조하여 바꿔 놓겠다는 것, 그리고 그 보증으로 성령을 주어 하늘을 경험하게 하고 그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있어 우리로 하늘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구원이다.

 

그런데 새 마음을 우리에게 창조해 주었다는데 도대체 그것이 어떤 마음인가‘성경에 기록한 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 함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이런 일들을 우리에게 계시하셨습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살피시니 곧 하나님의 깊은 경륜까지도 살피십니다. 사람 속에 있는 사람의 영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하나님의 생각을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들을 깨달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물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에서 배운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이 가르쳐 주시는 말로 합니다. 곧 신령한 것으로 신령한 것을 설명합니다. 자연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에 속한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이런 일들이 어리석은 일이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런 일들이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서도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습니까? 누가 그분을 가르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전2:9~16)

 

3. 은사 체험

예수로 인하여 하나님이 준 새 마음은 그 예수를 아는 것에 있다. 더 나아가 예수의 마음까지 알아 그 예수를 기뻐하고 설명할 수 있는 마음인 것이다. 그것은 나의 체험이나 선행이나 열심으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성장되어 감도 아니다. 성령이 그 새 마음을 가지고 우리 안에 들어오는 것에서 출발되고 또 가능하다. 그 결과, 예수의 마음을 알아 그의 마음에 맞는 삶으로 가치관과 사고의 방향을 바꾼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어떤 특별한 기적이 굳이 필요한가? 왜 자극적인 특별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인가? 어쩌면 아직도 그 새 마음이 없기에, 또는 여전히 믿어지지 않기에 기적을 원하고 신비를 체험하려는 것은 아닌가? 성경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람들이 많다. 화끈한 체험이 있으면 신앙이 한 단계 더 높아진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많다.

 

하기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들 체험했다고 하고 원하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다고들 하는데 나만 못한 것 같아서 자괴감이 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자괴감, 부끄러움이 그런 욕구에 미련을 두게 한다. 그래서 방언을 가르친다는 영험한 기도원이나 특별 계시나 축복의 은사를 받았다는 어떤 이들의 집으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런 행태들은 분명 성경과 거리가 먼 모습들이다. 오직 신비적 체험으로 우월감을 내세우고 싶어 하는 이들의 심리를 이용한 마케팅일 뿐이라는 말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기에 내가 내세우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칼빈이 체험을 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루터가 방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던가? 어거스틴이 신비 체험을 했었다는 기록도 없다. 그런 것은 다른 종교에도 있다. 특히 불교에서나 이슬람교에서도 종교적 열심이 있는 이들에게서 그런 현상이 나타난다.

 

그러면 바울이 언급했던 은사, 방언, 예언이라는 체험들은 대체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그것들의 목적이 교회의 덕을 세움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이와 같이 여러분도 성령의 은사를 갈구하는 사람들이니 여러분은 교회에 덕을 세우도록 그 은사를 더욱 풍성하게 받기를 힘쓰십시오’ (고전14:12) 고린도 교회에는 은사가 많았던 교회였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자기들의 은사를 교회의 덕을 세움에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은사로 인하여 교회가 우월한 자들과 열등한 자들로 분열이 일어났고 시끄러워졌다. 은사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특별 은사를 가진 자와 부실 은사를 가진 자로 갈린 것이다. 그들 생각에 예언이나 방언, 신유 같은 것은 조금 세 보였기에 특별 은사로 구분하였다. 하지만 그런 은사 체험들 때문에 교회에 덕은커녕 오히려 분란만 더욱 야기되었던 것이다.

 

결론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은사를 설명하되 그 사이에 사랑장이라는 13장을 끼워 넣었다. '아무리 대단한 은사라 할지라도 사랑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모두 헛 것이다.'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 즉 예수를 모르는 자들이 하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방언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주눅 들게 하거나 그 자신이 그것으로 교만해진다면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은사가 아니다구원에 대한 확신,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라는 믿음, 이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한가?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 (사29: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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