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7. 19:32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고전14:1~9)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이다'라고 누군가는 말했다. 그 호기심은 신앙의 영역에서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믿음이라 하는 초이적적인 경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이상의 어떤 것, 이를테면 방언이나 예언, 특별 은사 체험 같은 것들을 앙망하는 것이다. 바울은 ‘예언하기를 힘써라’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그 예언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관한 계시였다. 초대교회 때는 아직 계시가 완성되기 전이었기에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했었다. 바울은 그것을 예언과 방언이라 불렀다. 하나님은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을 통해 당신을 계시했었다. 그래서 그 당시의 방언에는 반드시 통역이 필요했었다. 그렇다. 그때의 방언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1. 왜 방언인가?
당시의 통역된 방언은 곧 예언이었다. 그렇다고 아무것이나 다 채택되지는 않았다. 통역이 없는 방언은 제재를 받았고 예언도 교회의 분별을 통해 걸러졌다. '누가 방언으로 말할 때에는 둘, 또는 많아야 셋이서 말하되 차례로 말하고 한 사람은 통역을 하십시오. 통역할 사람이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에게와 하나님께 말하십시오. 예언하는 사람은 둘이나 셋이서 말하고 다른 이들은 그것을 분별하십시오. 그러나 앉아 있는 다른 사람에게 계시가 내리거든 먼저 말하던 사람은 잠잠하십시오.' (고전14:27~30) 하나님은 왜 알아들을 수 있는 예언만 주시지 방언을 함께 주어 통역을 붙게 했을까? 구약에서 방언은 항상 ‘너희는 심판받을 존재다’라는 것을 보일 때 등장했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들어 에브라임을 심판할 것임을 예언하는 장면에서 방언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이스라엘이 말씀을 듣지 않고 계속 악을 행할 때 앗수르를 들어서 이스라엘을 치셨는데 그 이스라엘을 치러 들어온 앗수르 군사가 한 말이 바로 방언이었다. 원래 ‘방언‘은 그렇게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묘사할 때 등장했던 단어였다. 그 내용을 바울이 인용하여 고린도서에서 다음과 같이 사용하였다. '율법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혀와 외국 사람의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은 나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신자들에게 주는 표적이 아니라 불신자들에게 주는 표적이고 예언은 불신자들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주는 것입니다.' (고전14:21~22) 방언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표적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가?
방언은 하나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될 자들에 대한 것, 그들이 진노의 심판에 던져지게 됨을 표적으로 주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반면에 예언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에 대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이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서 하는 말을 뒤섞어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주께서 거기에서 그들을 온 땅으로 흩으셨다. 그래서 그들은 도시 세우는 일을 그만두었다. 주께서 거기서 온 세상의 말을 뒤섞었다고 하여 사람들은 그곳의 이름을 바벨이라 한다. 주께서 거기에서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셨다.' (창11:6~9) 언어가 혼잡하게 되어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곧 심판을 의미하였다.
2. 차라리 예언으로
그러니 성경에서 방언이 담고 있는 의미는 ‘나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자들아, 너희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방언이 담고 있는 내용이다. 그런데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그 방언을 알아듣고 계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초대교회 때 방언을 주신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바울이 ‘방언이 교회에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방언은 자기에게는 덕이 될지언정 교회에는 유익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계속해서 방언보다는 예언을 하려 하라고 강조하였다. ‘내가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은 기도하지만 나의 이성은 아무런 열매를 얻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나는 영으로 기도하고 또 이성으로도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영으로 찬미하고 또 이성으로도 찬미하겠습니다‘ (고전14:14~15)
방언은 영이 기도하는 것이라? 이 성경구절 때문에 방언 못하는 교인들 기가 많이 꺾인다. 신앙적, 영적 열등감까지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초점은 그런 것에 있지 않았다. 그것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여기 ‘영’이란 ‘프뉴마’가 사람에게 쓰이면 ‘원초적인 능력’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성’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누스’는 ‘정신, 내적 성향’을 뜻한다. 즉 ‘방언으로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능력으로 기도하는 것이지만 그보다는 나의 전인격을 다하는 기도를 말한다. 그래서 내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전인격, 즉 영과 정신을 집중하여 기도하고 찬양한다’는 의미이다. 당시의 방언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은사였지만 제한적 목적으로 주어졌다. 반면에 교회 모두가 알아듣고 이해할 수 있었던 예언은 교회 전체에게 유익이 되었다.
그래서 바울이 강조하여 말하였다. ‘나는 교회에서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내 이성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을 원합니다‘ (고전14:19) 다섯의 이성적인 말과 일 만의 방언이라는 극한 대조로 표현하였다. 바울이 왜 이렇게 말했을까? 고린도교인들은 그 풍성한 방언의 은사가 왜 자기들에게 주어졌는지는 생각지 않았다. 단지 방언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니 바울은 그런 태도를 지적하여 심지어 ‘악’이라고까지 책망하였다. 또한 그런 은사를 추구하느라 정작 하나님을 아는 지혜의 성숙을 놓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예언을 통한 영적 성숙을 재차 강조하였다. 방언이나 예언 같은 은사들은 예수가 자기 몸 된 교회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지금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스리고 계시다는 증거로 주셨다. 그러니 은사가 임했다 함은 내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인 것이다.
3. 영원한 심판의 방언
그럼에도 당시의 고린도교회처럼 오늘날에도 자기가 받은 은사를 자랑하는 이들이 많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가? 성경은 특별한 은사를 소유한 사람을 ‘성숙한 신앙인'이라거나 '믿음 좋은 이’라고 부른 적이 없다. 하지만 여전히 신유은사, 방언, 예언하는 이들에 대한 로망이나 그런 이들을 대단한 신앙인, 또는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을 취득한 신앙 고수로 추앙하는 무지를 보이고 있다. ‘나는 영에 속한 사람에게 말하듯이 여러분에게 할 수 없어서 육에 속한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게 말하듯이 하였습니다‘ (고전3:1) 성경의 계시와 예언은 심판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들이다. 결코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점치거나 특정인의 부실함을 치료함에 있지 않다. 그래서 바울은 예언이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힘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계시, 예언은 죄인을 책망하고 숨겨진 것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는 말씀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히4:12~13) 우리들은 바로 이 예언을 입으로, 그리고 삶으로 전하는 하늘의 사람들이다. 하지만 택함 받지 못한 이들에게는 우리의 이런 예언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으로 들린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성경의 예언이나 방언은 이상한 소리나 앞일을 점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방언을 한다면 그 방언을 이해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성경은 세상이 마지막 때를 향해 갈수록 하늘 말씀이 방언화 되어갈 것임을 예언하였다.
‘그날이 온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내가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밥이 없어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할 것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주의 말씀을 찾으려고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그 말씀을 찾지 못할 것이다.‘ (암8:11~13) 하나님께서 아모스를 통해 많은 재앙들을 선포하셨다. 불을 보내어 궁궐들을 사르리라 하시고 대적이 침략할 것이라고 하시고 비가 내리지 않아 마실 물을 구하려 비틀거리며 찾게 되고 풍재와 깜부기와 팟종이로 곡식들을 먹게 하시고 전염병과 칼의 죽임을 당하게 하셨다. 이 모든 재앙들은 돌아오라는 경고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예언하는 선지자를 향하여 듣기 싫다고, 예언하지 말라고까지 하였다. 이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결론
왜 사람들이 굶어 죽는가? 왜 사람들이 전쟁을 하는가? 모두들 자기의 죄와 탐욕 때문이다. 왜 인간들이 죄라는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한 방언이다. 심판받을 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구한들 자기들 취향에 맞는 말씀만 구하는 것이다. ‘사마리아의 부끄러운 우상을 의지하고 맹세하는 자들, "단아. 너의 신이 살아 있다. 브엘세바야. 너의 신이 살아 있다." 하고 맹세하는 자들은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암8:14) 심판받을 자들은 말씀이 아니라 보이는 우상을 붙들어야 안심이 되기에 엉뚱한 기적과 요상한 신비를 찾아해맨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성경에서 예정되어 있는 말씀인 것을.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건전한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고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기네 욕심에 맞추어 스승을 끌어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진리를 듣지 않고 허탄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딤후4:4)
'취한 자 에브라임의 교만한 면류관이여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의 창일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에브라임의 취한 자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사2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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