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1. 6. 13:36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나의 해산한 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뉘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매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지라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왕상3:16~28)
두 여저가 한 아기를 놓고 자기 아이라고 주장하였다. 서로가 아이에 대한 사랑을 주장한 것이다. 그때 솔로몬 왕이 지혜로서 아기의 진짜 어미를 찾았다. 그런데 그 방법이 묘하다. 그 아기를 반으로 잘라 반씩 나누어 가지라는 끔찍한 판결이었다. 이름도 ‘평강’, 즉 '샬롬'이라 할 만큼 평화로움직한 왕의 판결이 아기를 두 토막으로 잘라 나눠주라니 말이다. 그런데 왕의 이 판결에는 십자가 은유가 숨겨져 있고 구원이라는 하늘 묵시가 함유되어 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던 사건이 십자가였다. 솔로몬의 재판과 십자가 사건, 둘은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두 어미가 반응하지 않았다면 아기는 이미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아기를 잘라서라도 달라는 가짜 어미의 반응, 조금 전까지 그 아이에 대한 사랑을 내새워 소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여자가 실은 아이를 죽이는 자였음이 드러남, 그것이 율법임을 솔로몬의 재판이 은유로 보여주는 것이다.
1. 율법의 완성은 사랑
율법은 우리를 사랑하여 구원할 것처럼 강권해왔다. 그러나 우리 인산은 그 율법을 감당하지 못한다. 결국 우리의 처음 자리, 무력함의 자리, 실패의 여지가 드러나고 죽을 흙의 자리로 내던져지면 율법은 가차 없이 우리를 고발한다. 그리고 참소하여 죽이려 든다. 어쩌면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빈번히 죄의 자리, 불의의 자리로 몰아붙이는지도 모른다. 그 실패의 자리, 참담한 바닥에서 우리 인생들이 의지해왔던 그 율법이 우리를 어떻게 정죄하는지를 경험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율법에 대한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이들, 그리고 그 가능성을 믿고 그렇게 행하는 인생들이 여전하다. 하지만 율법적 사고오 삶은 인간인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갈 뿐이다.
그런데 진짜 어미는 자기 아기에 대한 진짜 사랑을 가지도 있다. 결국 자기가 포기하겠으니 그 아기를 죽이지 말라고 선처를 구한다. 자식이 그 왔던 원래의 자리, 핏덩이 자리, 자궁의 자리, 즉 죽음의 자리로 내몰리면 진짜 아기의 부모가 드러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끝없이 우리 피조물의 원래 자리를 드러낸다. 그들의 원래 자리인 출산의 자리, 아니 그 이전의 자리, 자궁 속의 자리, 어머니로부터의 생명선이 끊기면 무기력한 고깃덩이일 수밖에 없는 그 자리로까지 우리 삶을 몰아간다. 그런데 거기에서, 그 약하고 불가능한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이 임한다. 그 지경에 가서야 그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만이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그 능력 속에 들어있는 이들이 우리들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대체 왜 당신 백성들을 이 험한 역사 속에 몰아넣는가?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계획이 있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니 인간의 우발적 범죄 때문에 당신 계획과 뜻을 급히 바꾸는 하나님이 아니다. 결코 약한 하나님이 아니라는 말이다. 은혜를 떠난 자들의 삶이 어떤 열매를 맺고 어떤 결과를 생산해 낼까? 그 결과를 가르쳐 주려는 것이다. 죽은 흙에 불과했던 우리가 어떤 능력과 은혜로 하늘 시민들이 되었는지, 무어승로 인해 산 생명이 되었는지 그것을 가르쳐 주고자 처음부터 선택한 우리들을 이 땅에 보냈다. 때문에 이 땅에서 수시로 우리 원래 자리, 죽음의 자리를 경험한다. 심지어 핏덩이의 자리, 세상과의 간음의 자리로까지 내려가는 경험까지 한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배운다.
2. 두 종류의 인간들
그런 면에서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마귀의 자식과 하나님의 자식이다. 어떤 무리는 날 때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또 어떤 무리는 저주받을 마귀의 자식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야곱과 에서의 경우, 하나님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을 편애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일방적 선택이었다. 이삭과 이스마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 마음에는 이삭에 대한 선택이 있었다. 인간적 관점에서 이는 불공평하다. 그렇다., 분명 하나님은 그렇게 불공평하다. 다만 당신의 백성들에게만큼은 공평하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그 불공평한 처사에 대해 논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뜻은 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편애를 예정이라 하고 선택이라 한다.
하나님의 이런 편애에서 제외된 마귀 자녀들은 그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안다 한들 인정하지 못하고 인식한들 동의 하지 않는다. 분명 불행한 일이지만 그들이 그것을 인정하거나 인식치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님을 주장하게 될 때 숨을 곳이 어디일까? 선한 행실이라는 율법 뒤로 숨는다. 그리고는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타당하고 좋은 것이며 모두라고 내세운다. 그러나 삶이 그들의 자궁의 자리, 죽은 흙의 자로 내 몰리면 그들은 도덕이나 윤리, 율법에 의해 참소 당하는 자신들 모습에 절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약한 자리로 몰아버린 존재, 자신들이 거짓으로 세웠던 아버지를 원망한다. 그래서 더 더욱 자기 실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수고하는 행위 뒤로 숨는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런 이들은 선해 보인다. 아니, 선해 보여야 했다.
예수 당시에 그런 인생들의 전형이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너희의 아비는 마귀라’고 그들 정체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사람들은 그런 인생들을 훌륭하게 본다. 어쩌겠는가? 갈린 인간의 한쪽 삶의 한계인 것이다. 우리의 원래 자리는 흙의 자리였다. 지금도 세상에서 죽은 흙의 삶을 살고 있다. 구원을 얻은 우리 또한 약한 인간이기에 여전히 흙의 삶, 핏덩이의 삶을 살고 있다. 그렇게 사니 율법이 우리를 고소한다. ‘네가 그러고도 기독교인이야? 너 따위가 목사냐?’ 그러나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한 하나님 아버지는 그 같은 사탄의 참소를 묵살한다. 이미 당신 아들 안에서 모든 참소를 해소했기 때문이다. 창 15장의 쪼갠 고기 사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번제물 되는 것으로 해법을 예시하였다.
3. 한계와 긍휼로의 존재
그럼에도 하나님의 편애에서 제외된 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행위와 율법을 의지한다. 그간 자기들이 애써 온 것이 많기에 신의 은혜라는 선물, 공짜가 마뜩지 않는 것이다. ‘긍휼’에 해당하는 원어 ‘라함’은 자궁이다. 그 자궁 속에서의 태아는 어머니의 생명선으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자궁 속 핏덩이들이었다. 하나님의 자궁에서 긍휼로 그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 절대 의존적인 우리의 위치이다. 하나님의 자궁으로부터 긍휼로 잉태된 우리들, 평생을 그 모습으로 살고 영원에서도 그렇게 살게 될 것이다.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의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곳, 거기가 하나님 나라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그 핏덩이 모습이 노출될 때마다 그 현장에 하늘 긍휼이 덮인다. 그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수시로 깨닫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더욱 크게 임한다’고 하였다. 그런 은혜의 자리, 긍휼의 자리를 예수의 십자가가 그대로 재현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큰 죄인으로 몰려 죽은 예수, 나의 간음 장소, 내 욕심의 현장으로 내려와 그 모든 약함과 허물을 떠맡은 예수, 그렇게 나의 원래 자리까지 내려와 거기서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었다. 그렇게 우리는 구원받았지만 수시로 죄인적, 또는 죄 자체의 삶에 노출된다. 물론, 계율을 잘 지켜 훌륭하게 살아 아버지 앞에서 떳떳한 존재가 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그런 완벽한 상태가 불가능하고 또 하나님이 원하는 바도 아니다. 계속 죽은 흙의 삶을 살면서 내 불의와 한계에 빠지는 것, 그리고 거기서 아버지의 은혜와 긍휼을 경험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성화이고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진짜 충성과 순종이 나온다.
그 이전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내 불의한 청지기 됨이 하나님 앞에 노출되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예수가 내가 가야 할 죽음의 자리, 자궁의 자리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것은 율법에 의해 정죄된 자리요 고발된 자리였다. 고발하며 죽이라 했고 결국 죽였다. 이것이 솔로몬 재판에서 나온 가짜 엄마였다. 그런데 진짜 엄마가 그를 긍휼로 살려냈다. 이 구도는 다말과 유다의 이야기에서도 예표되었다. 다말은 유다의 후손으로 오실 다윗과 예수를 출산해 내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다말을 창녀로 만들어 시아버지와이 불륜으로 약속의 자녀를 이어갔다. 하나님이 왜 그런 식으로 일을 하셨을까? 거기에 예수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긍휼이 녹아 있는 것이다. 다말이 창녀됨, 그것은 불의한 자리로 내려감이었다.
결론
유다는 다말에게 율법이 되어 폭력을 가하려 했다. 간음으로 임신한 며느리를 참소하여 죽이려 했다. 유부녀의 간음은 율법에 의해 화형을 언도함도 마땅했었다. 그때 다말이 자기희생의 증거물을 들이댔다. 불의에 쓰였던 증거물들로 인해 다말과 유다, 모두가 살았다. 그 불의의 재물은 불의한 자리로 스스로 내려간 예수의 핏 값이었다. 그 불의한 재물로 우리는 예수의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우리는 남편인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간음하고 현실과 불륜을 일삼은 존재들이다. 그런데 예수가 그런 우리와 연합하여 스스로 음습한 자리, 죄된 자리로 내려오셨다. 그 결과, 나의 간음이 용서되었고 우리의 우상숭배 행각이 소멸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아버지의 긍휼이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눅1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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