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나간 운명, 그러나 가능성

2023. 9. 30. 11:45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창3:1~22)

 

비룩 타락하였지만 그 후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이 부여한 재능과 능력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원래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게끔 주어진 것이었었다. 그런데 인간이 그것을 악에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에 반역하고 불순종하는 수단으로 쓰여버린 그 재능과 능력과 은사들, 이후부터는 그것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던 의와 거룩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희미해져 갔다. 갈수록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둔감해져 갔고 급기야 하나님을 모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더니 오늘날에는 하나님 따위가 없다고 극언을 서슴지 않는 겁을 상실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1. 빗나간 표적을 향하는 존재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었던 인간은 그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며 사랑하여 그가 맡긴 피조 세계를 맡아 지배하고 돌보았던 존재였다. 그렇다고 그 상태의 인간이 완성된 결정체는 아니었다. 만물의 영장이었지만 여전히 성장과 연단이 필요한 존재였다. 그 연단과 성장과정에서 과연 불순종할만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자발적인 순종을 할 존재인가? 하나님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주어진 것이 선악과였다. 하나님과 피조 세계에 바른 관계로 놓여 있었던 인간, 그러나 죄의 가능성 아래 놓여 있었던 존재, 그것이 인간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인간은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에 변질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에게 있던 하나님의 속성이나 역량들은 부분적으로 유지되었다. 다만 그것을 다른 방향으로 사용함이 문제였으니 표적을 벗어나 엉뚱한 방향으로 활을 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구체적 현실 삶에서 하나님께만 순종과 경배를 드려야 했던 인간이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다. 옛사람들은 나무나 돌로 우상을 만들었었다. 하지만 오늘의 사람들은 무엇을 우상으로 삼는가? 여전히 경배할 무엇인가를 찾는다. 그렇게 찾아서 고대보다 더 미묘한 형태의 우상을 만들었고 기술적으로 섬기고 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 힘으로 자기 자신, , 명예, 자식, 쾌락 등을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만 있던 신의 형상, 그 형상이 변질되자 그 오염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관계로서 다른 이의 삶을 풍요롭게 하기보다 자기를 위해 다른 이를 이용하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남의 실패는 나의 기회, 남이 잘되면 나의 배가 아픈 졸열한 존재들이 되고 말았다. 타락한 인간은 만물을 보살피는 존재가 아니라 내 편익을 위해서 착취하는 존재가 되었다.

 

인간은 피조물의 대표였다.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만물을 관리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자기 유익을 위해 하나님의 다른 피조물을 수탈 대상으로 삼는 존재가 되었다. 이는 타락한 천사가 와서 인간을 미혹한 결과요 그 죄로 오염된 인간의 실체였다. 유혹으로 절대자를 향한 마음을 흔드는 방식은 창조자의 질서를 흔들고 깨뜨리는 마귀의 고전적이고 항시적 수법이었다. 하나님은 질서로 아담을 세우고 그 아담에게 하와를 돕는 배필로 주었으며 그 아래 피조물들을 위치시켰다.그런데 하위 피조물 중 하나인 뱀이 상위 피조물인 하와를 유혹하였고 그 하와가 아담을 끌어들였으며 그 아담은 하나님을 거역하였다. 마귀가 뱀을 앞세워 하나님의 창조 순서를 역으로 깨고 엎은 것이다. 그 과정은 복잡하지도, 심오하지도 않았다. 지극히 단순하였으니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의심, 그것 하나를 뿌린 것이다.

 

2. 사소한 의심의 엄청난 파국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3:1) 마귀의 이 말을 듣자 의심이 생겼다. 그 순간부터 인간은 계산하며 조용한 의구심이 준동하기 시작하였다'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창3:2~3) 여기 인간의 임의적 해석이 엿보인다. 하나님은 '만지지도 말라' 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는 자기 원망과 바람을 더하여 대답한 것이다. 게다가 정녕 죽으리라고 말한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까지 설마로 완화시켜 죽을지도 모른다는 대답으로 희석시켜 해석하였다.

 

흔들리는 인간, 자기 바람으로 말씀을 합리화하는 인간, 마귀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창3:4) 바로 그 틈을 파고드는 마귀의 말에 여자는 하나님을 불신하고 마귀를 믿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 그의 형상이 이렇게 마귀와 한편이 되어간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3:5) 인간이 그런 마음으로 보면 그렇게 보이기 마련이다. 교만해진 마음으로 다시 보니 새삼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여 인간의 욕망을 더 자극하였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으로 귀결되었다. 마귀가 인간을 미혹하는 경로가 이렇다. 하지만 그 결과는 인간에게 생겨난 수치심이었다.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3:7) 

 

이 표현,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라는 표현은 멋있다. 정서적, 철학적, 현학적으로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 감정은 부끄럽지 않은 인간을 전제한 상대적 개념이요 원죄적 용어이다. 대체 인간이 무엇이라고, 언제부터 무엇인가에 견주어 부끄럽고 말고를 따졌던가? 이전에는 수치를 몰랐다. 젖먹이 아기가 벌거벗었다고 부끄러워하던가? 순전하면 부끄러움이라는 개면이나 정서조차 없다. 처음 인간들도 벌거벗음이 부끄럽지 않았었다. 하지만 이제는 죄로 인해 수치심이 생겼고 그 부끄러움을 가려야만 했다. 어디를 가렸을까? 뱀의 속삭임을 들었던 ? 선악과를 도발했던 ? 생식기였다. 나중에 하나님이 동물 가죽으로 치마를 해 입힌 부위도 생식기였다. 그런데 왜 굳이 생식기였을까? 그곳이 생명의 잉태가 되는 샘이요 원천이었기 때문이었다. 죄로서 인간 생명의 원천이 오염된 것이다. 지금도 인간들은 그곳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3. 실패에서 회복의 가능성

이제 인간에게는 수치뿐만 아니라 두려움이라는 것도 생겼다. 그 두려움은 인간을 비겁한 존재, 책임을 회피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3:10) 아담은 하와가 먹으라고 했다고 핑계를 댔고 하와는 뱀이 먹으라 했다고 핑계를 댔다. 아담은 모든 피조물들의 대표였다. 하나님의 동산을 지켜야 하는 왕이요 제사장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하와의 과오를 책임지고 하나님께 나서야 할 위치의 존재였다. 하지만 그런 그가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였고 그런 여자를 준 하나님의 책임까지 물고 들었다. 최초의 동산지기는 이렇게 실패하였다. 다만, 다행스럽게도 훗날 신약에서 또 다른 동산지기가 와서 이 아담의 실패를 회복한다.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에 찾아왔을 때 예수가 부활하여 그 뒤에 서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았다는 표현, 굳이 이 용어를 사용함은 에덴의 동산지기가 실패한 제사장 역할을 두 번째 아담인 예수가 회복했음을 암시해 주는 복음서 기자의 관찰이다.

 

그러한 동산의 인간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후 전개될 복음의 시원을 언급하였다'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창3:15) 한편이었던 뱀과 여자를 '서로 원수 되게 하겠다' 함은 인간을 다시 하나님 편으로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참담한 저주는 당신과의 영적 교류가 단절되는 것이었는데 다시 그것을 회복시키겠다는 말이었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최애 피조물인 인간에 대한 애정을 포기하지 않았다'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즉 인간이 이제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인정인기? 언뜻 보면 좋은 말 같다. 정말 인간이 마귀의 속삭임대로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인가? 아니었다. 마귀의 거짓말이었다.

 

인간을 유혹하였던 마귀의 말은 일면 맞을 수도 있으나 근본적으로 왜곡한 것이다. 여기의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은 이제 인간이 하나님처럼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옳다고 여기고 스스로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르다고 판단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인간은 원래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옳다고 하고 하나님이 그르다는 것을 그르다고 순종하며 그 안에서 행복과 기쁨으로 사는 존재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하나님과 상관이 없이 자기들 스스로 판단하는 자들이 되어버렸다. 이런 오염된 상태로 인간이 생명나무과실까지 먹었다면 어떤 결과가 올까? 지금처럼 서로 미워하고 빼앗으며 시기하고 싸우며 죽이면서 영원히 살게 된다. 바로 그것이 지옥의 삶이다. 그런 삶을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저주받은 상태로 영원히 사는 것, 그것이 영벌이기 때문이다. 영생은 좋은 것이지만 저주의 모습으로 영원히 사는 것은 그것 자체가 지옥의 삶인 것이다.

 

결론

다행스럽게도 하나님은 서둘러 인간들을 그 동산에서 쫓아내고 그 생명나무로 통하는 길을 원천 차단시켰다. 혹 되돌아와 그 나무를 손댈까 하여 천사를 두고 그 손에 회전하는 불칼로 동산 입구를 지키게 하였다. 그것은 영원히 저주로 살게 하지 않으려는 하나님의 배려요 은혜였다. 그 은혜의 구체적 이야기가 메시아 예고로 일관한 구약이고 그 출현으로 이어지는 신약의 이야기, 곧 구원의 성경 이야기이다. 그 성경 이야기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요 우리의 천국 가능성의 이야기이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롬1: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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