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9. 30. 13:0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 (사64:5~7)
세상의 부조리, 인간의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마귀 세력들이 하나님을 대적한 일이 있었다. 타락한 천사들, 그들의 우두머리인 마귀는 본래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지어진 아름다운 천사였었다. 그런 그가 반역을 했는데 그 내용이 불순종이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아.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 맨 밑에 빠지리로다' (사14:12~15)
1. 목이 뻣뻣한 인간들
이 타락 천사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인간이었다. 그 시작점은 ‘굳이 하나님 아니어도’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하리라, 내가 할 수 있다’가 동기였다. 그로부터 수십억의 인간들이 ‘내가 하리라’며 교만과 불순종의 죄를 품었고 행해왔다. 성경에서는 종종 인간들을 향하여 ‘목이 곧은 백성’이라 한다. 인간은 분을 내고 화가 나면 목부터 뻣뻣해진다. 하나님의 피조물 중에도 그런 짐승이 하나 있다. 뱀이다. 독사는 화가 나면 목이 뻣뻣해지고 목이 부푼다. 그리고 그 부풀린 목 안에는 독이 잔뜩 들어 있다. 타락한 인간 또한 하나님을 향해 목을 뻣뻣이 들고 대들 뿐 아니라 독기까지 품은 존재가 되었다. 인간 죄의 본질이 그렇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뜻에 불순종함에서 기인한다. 단지 그런 행위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죄이니 그런 의지 그 자체가 죄의 시발점이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 하느니라' (마15:18~20) 죄는 행실뿐 아니라 생각까지 포함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에게 선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이 세상이 이렇게 유지되고 있는가? 그저 신기할 따름이지만 이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 덕분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양심을 남겨두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자들도 그 양심이 율법으로서 자제하게 만들었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롬2:14~15)
하나님이 사회법과 권위자들을 세워 인간들의 죄를 억제시킨다. 만약에 그것이 없고 양심조차도 없다면 세상은 일찌감치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자기 기분 상하면 다른 이를 상해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 인간들이니 그나마 양심과 법이 있어 자제하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하나님의 일반 은혜 아래서 여전히 우주와 함께 이 지구에서의 삶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보존하실까? 하나님 당신의 백성들이 모두 회개할 때까지이다. 그때까지만 보존한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 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사랑하는 자 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벧후3:7~9)
2. 하나님을 알만한 흔적
하나님은 악한 인간 세상을 일반은총으로 죄를 억제해 놓으시지만 당신의 때, 마지막 그때가 되면 그 붙들고 있던 끈을 한 순간에 놓아버릴 것이다. 물론 그때까지 인간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라는 관점에서 선한 일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죄된 인간들의 그런 행위들은 그 근본이 자기를 위함에 있다. 이미 인간은 진정 타인과 하나님을 위해 어떤 일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도 인간을 죄의 종이라고 말했다.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요8:34) 여기 ‘종’이라는 말 ‘둘로스’는 ‘노예’라는 뜻이니 인간은 주인인 죄가 시키는 대로 하는 존재라는 말이다. 믿음이 없는 이들이 하는 어떤 행위들은 설령 선량하고 존경스럽게 보인다 할지라도 죄이다. 타락 이후 자기중심적이 된 인간은 하나님과 이웃조차도 자기를 위해 사랑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만을 위해 이용하고 섬기는 이기적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어떤 인간은 죄의 경중을 따지고 허물의 많고 적음을 계산하여 자신의 상대적 선량함을 내세워 자랑하기도 한다. ‘나는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살인한 자보다는 좀 낫다, 나는 도둑질을 하지 않았으니 도둑질 한 사람보다는 좀 낫다’ 그 어떤 나쁜 놈보다는 자기가 괜찮다는 스스로의 위로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이라는 높이에서 보면 그 차이가 오십보백보요 도토리 키재기이니 모두가 똑같다. 성경은 인간이 최상, 최고의 선을 행한다 한들 그 역시 죄라고 한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사64:6)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그것은 모두 자기 자기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불편함 때문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말한다.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롬1:19~20) 이미 자연과 인간 마음에 충분하게 당신을 계시해 놓았다. 어떤 이들은 묻는다. ‘혹 예수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모두 지옥 가는가?’ 이미 하나님은 당신을 알만한 것들을 주셨다. 꽃들, 새들, 해와 달, 그리고 사계절, 우주 운행과 자연의 섭리, 경이로움을 보고 경험하면서 충분히 창조주를 느낄 수 있었다. 소우주인 인간 몸의 세포들도 각기 자기 역할에 따라 수천 가지 일들을 해내면서 유지된다. 신체가 자체 방어를 위한 면역력을 유지한다. 이 모든 것들이 우연히 생겼다? 진화한 것이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흔적이며 능력인 것이다.
3. 죄에 대한 진노와 거룩
예수라는 메시아, 그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도 인간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알 수 있었다. 성경이 지금의 신구약으로 편집이 된 때가 고작 1,600년 전이었다. 그 이전에는 성경이 정말 귀했던 세월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말했다. ‘너희들에게 하나님이 이미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두셨다’ 그때도 하나님이 믿음을 주는 사람은 구원받았고 지금도 믿음이 허락된 사람만 구원받는다. 그런 하나님이 왜 죄에 대해서 진노하시는가? 그가 거룩한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었다. 여기 그분의 진노는 단지 화를 냄이 아니다. 죄와 상관없는 하나님이 오직 당신의 공의로 우리 죄를 멸하려는 그분의 속성이 진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정말 무섭다. 아들 예수의 죽기 전날 기도에서 이 진노를 느낄 수가 있다.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피해 가기를’, 예수조차도 이렇게 기도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그런데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미리 사랑한 이들이 있었다. 그런 그들을 구원하되 그 목표는 사랑 자체인 하나님 당신의 형상을 닮아가게 함에 있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3:18) 그렇다면 이 형상을 회복하기 위해 우리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할 수도 없다.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니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가 않다. 인간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은 그 인간을 인격체로 대하신다. 성경이라는 특수 계시를 주고 말씀으로 설득해 가면서 인격체로 여기셨다. 바울은 말했다.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9:21) 이렇게 종속적인 인간의 처지를 묘사하지만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24:15) 이렇듯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 인간의 피조성과 인격성은 균형적이어야 한다. 인간의 피조성만을 강조하고 인격성을 무시하면 숙명론에 빠질 수 있고 피조성을 무시한 채 인격성만 강조하면 인간 자체를 중시하는 인간주의로 기울어진다.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함은 죄를 선택했다는 말이기에 인간은 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 인간은 피조물이니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히 아니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이 인격체이기에 구원에서 그 인격체가 할 역할이 있다.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지만 그 구원의 완성까지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2:12~13) 분명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고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고 말한다. 어쩌라는 말인가? 복잡할 것 없다. 하나님이 다 하신다. 다만 나의 동참 없이는 완성하지 않을 뿐이다.
결론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골3:9~10) 여기 ‘벗어버리고’와 ‘입었으니’는 부정시제이다. 이 시제는 한순간에 일어난 일을 뜻한다. 또한 ‘새롭게 하심’이란 원문 ‘아나카이 누메논’은 현재분사이다. 즉, 우리가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음은 은혜로서 한 번에 일어났지만 새롭게 되는 일은 계속해서 점차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이니 구원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형상을 좇아 새 자아로 점차 되어 간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완전히 거룩한 자가 되었다. 다만 그 사실을 완전히 깨닫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생에서 우리에게 준 것들을 하나씩 풀어서 보여주신다. 결국에는 내가 하나님께 복 받은 존재임을 깨닫고 내가 움켜쥐고 있던 땅의 것들을 내려놓게 되는 것이다.
창12장에서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였다. 그런데 22장에서 또 축복하였다. 그 축복 이유로 그가 ‘당신 말을 준행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의 축복은 이미 주어진 것이었지만 그는 그 축복을 받을만한 자로 만들어져 간 것이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과정이다. 이렇게 인간은 피조성과 인격성을 동시에 지닌 존재이다. 인간의 책임성만 강조함을 경계해야 하고 하나님의 주권만 강조함도 경계해야 한다. 은혜로 죄에서 건져졌으니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 그 신분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요일4:20~2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요8:34~36)
'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물과 바람 (0) | 2023.11.06 |
---|---|
이상한 재판 (0) | 2023.11.06 |
빗나간 운명, 그러나 가능성 (1) | 2023.09.30 |
인간에 대하여 (0) | 2023.09.30 |
이 탄식의 세상에서 (1) | 2023.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