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5. 19:57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다윗과 그 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시므이는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저주하고 저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티끌을 날리더라 왕과 그 함께 있는 백성들이 다 곤비하여 한 곳에 이르러 거기서 쉬니라' (삼하16:9~14)
개신교 최대교회를 이끌었던 어느 원로목사의 장례식이 있었다. 교회와 교단의 관계자들은 최고의 존엄과 정성을 다하여 장례식을 진행하였다. 생전에 저명했던 분이라 그 예식을 공중파에서도 중계하였다. 각계 조문단이나 일반 조문객들의 표정은 담담했고 더러는 침통해하고 비통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신앙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 같은 장례식 분위기에 의아함이 느껴졌다. 죽었다고 굳이 저렇게 슬퍼하고 음울해야 하나? 기독교에서 죽음은 축제이어야 하지 않는가? 로마 바티칸에서는 장례식에 참여한 조문객들이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처럼 박수를 친다고도 한다. 그 박수는 고인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갔음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의미함이리라.
1. 죽음의 경계 저편 사건
소망은 죽음이라는 경계 저편의 사건이다. 죽음 이쪽 편에서 소망하는 것들은 소망이라 할 수 없다. 유한하고 잠정적이기 때문이다. 좋은 직장 들어가기, 큰집 장만, 등 우리가 살면서 갖는 희망은 그것이 성취되면 오래지 않아 무감각해진다. 이런 허무는 우리에게 또 다른 것을 열망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열망은 사는 날 동안 끝이 없을 것이다. 죽음 이전 이편에서 우리가 원하고 성취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로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기에 소망이 아니다. 그러니 소망은 죽음 이후의 사건인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자칫 우리 신앙이 피안주의로 빠질 위험도 있다. 이 세상일들이 모두 헛되니 포기하고 저 세상만 바라보라는 메시지로 읽힐 수도 있으니 말이다. 고대 유대사회에 엣세네파라는 경건주의 종파가 있었다. 성과 속의 구별에 유난했던 중세기에고 수도원과 수사 제도에서 그런 유파들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일부 이상한 종파에서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고 피안의 세계만이 진짜라 하여 현실도피적 경향들을 보이는 집단들이 있다.
물론, 이 세상 것들은 죽음으로 소멸된다. 그러니 보이는 현실 세계가 무의미하다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에서 피안과 차안을 구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이원론적 구별과 극단은 금물이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죽음 저편의 내세와 죽음 이편의 현실은 상호적이고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런 신비에서 이해되어야 기독교적인 신앙의 실체를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 선과 악, 현실과 내세, 빛과 어두움 등, 이 같은 이원론적 사고로는 무조건 피안적인 희망만을 노래하거나 세속적 욕망을 그 피안적 희망에 투사시킬 뿐이다. 게다가 현실에서는 후자적 신자들이 더 많고 활동도 적극적이다. 죽음 이후의 천국을 희망한다고 하면서도 실상 현실에서는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 성공하고 잘 사는 것을 목표로 삼는 신앙인들이 넘친다. 그래서 어쩌면 종말이 왔다고 설교하면서도 수백억 원짜리 교회당을 짓는 현실이다.
근본적으로 희망은 무엇인가? 베드로는 소망을 이렇게 진술한다.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그분에게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되었다.‘ 이미 베드로는 앞에서 이 소망을 언급한 바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크신 자비로 우리를 다시 낳아 주시고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우리에게 산 소망을 안겨 주셨다.‘(벧전1:3) 앞의 언급이나 뒤의 언급 모두 기독교의 소망이 예수의 부활에 근거함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죽음, 그것이 극복되는 사건보다 더 중차대하고 궁극적인 사건이 있을까?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이 분명하기만 하다면, 그래서 그를 믿는 우리도 역시 부활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기만 하다면 이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모든 것이 파괴되는 그 기초가 해결되었으니 말이다.
2. 미래로 열린 생명
그런데 문제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을 우리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믿기 싫어서가 아니라 믿을만한 이야기가 아니기에 믿을 수 없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지 못함은 상식적으로 판단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한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찌해야 하나? 다수 신앙인들은 믿음만이 이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무조건 믿음에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같이 인간 상식을 넘는 사건일수록 우리는 양자택일을 강요받는다. 무조건 믿을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할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로든 강요는 정당하지 않다. 우리의 합리적 인식능력을 모두 포기하고 무조건 믿는 것만이 건강한 기독교이겠는가? 그렇다고 그런 요소들을 무조건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도 분명 지혜롭지는 않다.
그건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신앙이란 과거에 벌어진 어떤 초자연적 사건을 오늘날 믿느냐 아니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그것이 향하고 있는 미래 생명에 소망을 두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광신이 아니고 과학실증주의도 아니다. 그보다는 미래를 향한 전망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존중 자세들이 어떤 미래를 지향하고 있는가를 인식하고 선택함이라는 말이다. 신앙에서 이 같은 미래적 성격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기독교의 본질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지금까지 벌어진 사건보다는 앞으로 벌어질 사건이다. 그런데 그 미래 사건은 아직 증명될 수 없다. 아직 증명되지 않은 그 미래의 시간과 사건, 그것에 우리의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삶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그 최후의 사건, 종말론적 생명 사건, 미래의 시간, 그것이 부활이다. 죽고 다시 살아난다는 표상으로 묘사되어 있는 이 부활이 미래의 생명이란 말이다. 그렇게 때문에 기독교는 이 부활이라는 소망에 집중한다. 이 부활은 아직 결정되거나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열려있는 궁극적 생명이다. 그렇기에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을 무조건 믿는가 부정하는가로 신앙을 재단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함부로 편을 가르고 매도함은 일종의 신앙적 폭력이 될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언어로 정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생명 사건이 예수에게서 일어났다. 신약 성경의 복음서들은 이런 종말론적 생명을 역사적 예수 사건에서 미리 당겨 경험했음을 변증하고 있다. 이 변증만이 우리가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보증해 줄 최소한, 또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3. 기다리는 삶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이렇게 권한다.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에 여러분에게 내려 주실 은총을 끝까지 기다리십시오.’ 그가 나타남은 곧 그의 재림을 말한다. 어떤 이들은 예수가 구름을 타고 재림한다고 생각했었다. 고대 신화시대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여겨왔다. 당시에는 그런 신화적 사건들이 자연스럽게 여겨졌기에 예수 재림 또한 그런 방식으로 묘사했었다. 하지만 실상 예수 재림은 세상 모든 것들이 완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사건이다. 그 완성은 죽음으로부터 부활이었다. 그 완성적 생명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삶이 오늘 우리 신앙인의 실존이다. 그 기다림이 소망이고 그 소망이 신앙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니 이 기다림은 우리가 완성된 어떤 것을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현실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성취한다한들 그것은 여전히 미완성일 뿐이다. 사회적 신분을 얻었거나 도덕적인 업적을 이루었다고 해도 그 역시 한시적일 뿐이다. 예술이나 정신적인 깊이에 도달한 대가들도 자신이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한 이가 없다. 천변의 아름다운 꽃들, 지금 우리에게 아름다움의 극치로 보이는 일체의 것들이 그 자체만으로도 경이롭고 화려하지만 완전한 생명은 아니다. 그러니 우리 사람들은 어떤가? 살아가는 여러 형식들,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자손을 낳으며 돈 벌고 쌓고 하는 삶의 내용과 형태들도 여전히 완전한 생명은 아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결국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을 뿐이다. 모든 생명체가 이 죽음을 경계로 해서 존재와 비존재를 경험하기에 우리는 죽음 안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를 절대화하지 않고 그 너머의 것을 추구한다.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에 관한 예수 비유처럼 우리는 등불을 들고 그 생명을 기다리며 현실과 지금을 산다.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 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25:1~13)
결론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 실체가 나그네라는 뜻이다. 한 곳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디를 향해서 길을 떠나는 처지, 그래서 안주하지 않는다. 아직 목표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절대적인 생명 세계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신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 판단은 우리의 업적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분의 공정함은 우리의 기준과 다르다. 인간의 행위나 업적은 자신을 숨기면서도 만들어낼 수 있으니 나의 업적은 곧 나 자신이다. 그러기에 인간의 성공과 실패 여부가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기준이 될 수 없다. 나 자신을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다. 그 하나님이 당신의 기준에 따라서 정확하게 나를 판단하신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살기에 우리는 매 순간을 함부로, 엉터리로 살 수 없다. 그날을 기다리며 그 두려움으로 사는 삶을 일러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생명 경외’라 한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벧전1: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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