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을 기다리는 세상에서

2023. 4. 7. 16:57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이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세례요한이 이르러 광야에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요한은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그가 전파하여 가로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 그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 하노라 하시니라' (막1:1~11)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했다. 가장 먼저 성전을 둘러보고 해가 저물자 베다니로 다시 나와 거기서 1박 하고 다음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후 예루살렘 성전을 뒤집어엎었다. 그 성전에 돈 바꾸는 자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절기마다 속전의 값으로 드리는 성전세를 세겔이라는 돈으로 환전해야 했는데 상인들은 환전하며 13%의 커미션을 떼었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상인들과 결탁하여 백성들이 가지고 온 제물을 트집 잡아 돌려보냄으로써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도록 유도하였었다. 그리하여 성전은 이미 장사하는 도둑의 소굴이 되어 있었다. 예수는 백성들에게 가장 존경받던 종교지도자들을 강도라 부르며 장사치들을 쫓아내었던 것이다.

 

성전에서의 이 예수 사건은 삽시간에 예루살렘 전역으로 퍼졌다. 며칠 후 예수는 하루 종일 종교지도자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이날 은밀히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모여 예수 죽일 구체적 방법을 논의했는데 그 사이에 예수는 무엇을 했을까? 복음서에는 아무 기록이 없다. 아마도 한 일이 많았기에 베다니에서 쉬며 홀로 기도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성전정화사건 이후로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을 찾아가서 예수를 팔겠노라 약속하고 은 30개를 받았다. 그 얼마 뒤, 예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만찬 후 동산에서 목숨을 걸고 기도하였다.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신 후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였으니 그 만찬이 최후의 식사였던 샘이다.

 

1. 감란산에서 출발하여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네 복음서에 모두 나온다.(마21:1-11, 막11:1-11, 눅19:28-40, 요12:12-19)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었다. 유월절기로 예루살렘과 주변 마을은 전국에서 몰려온 순례자들로 북적거렸다. 통계에 의하면 당시 예루살렘에서 도살된 양의 수가 25만 마리 정도였다 한다. 최소 열 사람이 양 한 마리를 바치게 되어있는 유월절 규정을 감안할 때 민족 최대 명절인 유월절에는 최대 250만 명이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다고 추정된다. 게다가 예루살렘에서 30km 이내 모든 성인 남자들은 반드시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와야 했던 것이 당시 규정이었다. 또한 어느 곳에 살든 유대인이라면 일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이 소원이었다. 그런데 각 복음서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의미를 조금 다르게 전한다. 요한복음의 예수 입성은 전체적으로 승리의 분위기이다. 군중은 종려나무 가지로 예수를 적극 환영하였으며 예수의 적대자인 바리새인들마저도 "온 세상이 그를 좇는도다"라고 인정하고 한탄한다.

 

마태복음은 구약 슥9:9의 메시아적 본문을 인용하지만 예수가 다른 왕들과 달리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었음을 강조한다. 누가복음에서는 무리가 예수를 환호하면서 그를 왕으로 맞이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를 '선생님'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하지만 누가는 예수를 예언자로 묘사하면서도 그가 입성 후 예루살렘 파괴를 예언하며 슬피 울었다고 전한다. 이와 달리 마가복음은 단순하다. 꾸미지 않은 소박함은 이 복음서가 가장 원초적임을 말해준다.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의 왕권은 모호했고 예루살렘 입성은 풍자적이었다. 예수는 침묵하였지만 역설적으로 사람들의 생각 이상의 왕이었음을 그리고 있다. 마가에 의하면, 예수 일행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다. 벳바게는 '무화과나무의 집'이라는 뜻이고 베다니는 마르다와 마리아, 그리고 나사로가 살던 곳으로써 예수가 자주 머물렀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감람산에 있었음을 특히 강조한다. 이 산은 예루살렘 동편 해발 800m로서 예루살렘보다 40m 높다.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에서 감람산 배경은 중요하다.

 

구약의 스가랴 예언자가 ‘그 날’ 곧 여호와 날이라 불리는 마지막 날에 주께서 온 세상의 왕이 되시기 전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라고 예언했기 때문이다. 즉 감람산은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소였다. 바로 그 산에서 예수는 먼저 제자 둘을 보내 아직 아무도 타지 않은 나귀 새끼를 가져오게 하여 거기서부터 행진을 시작하였다. 나귀는 일찍부터 메시아와 관련된 짐승이었다. 랍비들은 꿈에 나귀를 본 사람은 메시아가 오심을 희망해도 좋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스가랴도 메시아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할 것을 예언했었다. 나귀는 팔레스타인 땅에서 특별한 짐승이었다. 왕들은 전시에 말을 탔지만 평시에는 나귀를 탔다. 그래서 나귀는 성지에서 평화를 상징하는 동물이었다. 하여 공의로운 구원자가 나귀 새끼를 타고 임하시면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라 예언했다. 예수는 의도적으로 이 예언에 기초하여 '거리 공연'을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2. 거리 공연을 연출하며

나귀 새끼를 데려올 때 '왜 그러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면 즉시 보낼 것이라' 하였다. 이 말은 나귀 새끼의 소유자와 사전 약속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이스라엘에서 예언자들은 자기들의 말이 사람들의 무관심과 몰이해에 부딪힐 때 그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극적 행동으로 메시지를 전하곤 했었다.(왕상11:29-31, 겔4:1-3; 5:1-4 ) 예수 역시도 그런 극적인 행동을 준비하여 연출하려던 것이었다. 제자들이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얹으니 예수가 그 위에 탔다. 그러자 더 많은 이들이 자기들의 겉옷과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펼쳤다. 실상 이것은 '왕의 즉위식'이었다. 오래전 예후가 왕으로 선포되었을 때 그의 친구들이 자기들의 옷을 펼쳐 길에 깔았던 적이 있었다.(왕하9:13) 100여년 전 마카비가 시리아로부터의 독립전쟁에서 승리 후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기도 했었다.

 

그래서 들에서 벤 나뭇가지혹은 나뭇가지라고만 말하는 마가나 마태와 달리, 요한은 그 나뭇가지를 종려나무 가지’(요12:13)라고까지 말했다. 종려나무는 유대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나무였다. 게다가 이 나무는 불사조와 같은 나무였다. 도끼로 쳐서 남은 그루터기를 불로 태워도 1년 후면 다시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밟고 태워도 다시 살아나는 나무를 보면서 약소 민족이었던 유대인들은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를 향해 예루살렘 성민들은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고 외쳤다. 이는 시118:26 인용이었다. 순례자들이 길고 긴 순례 여정 끝에 예루살렘 성전에 도달했을 때 기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의 마지막 내용이었던 것이다.

 

물론 훗날에는 절기나 예배 때 자주 사용되면서 본래의 뜻을 잃고 하나의 환호가 되어 순례자나 유명 랍비에게 건네는 인사말이 되었다. 이런 '호산나'를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 외치는 그들에게는 어떤 기대와 희망을 품었던 것일까? 예수 출현 약 100년 전에 예루살렘 군중이 크게 노래했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시리아 지배로부터 아크라를 탈환한 마카비를 환영할 때,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마카비를 향해 '호산나', 즉 '이제 구원하소서'를 소리 높여 외치며 열광적으로 환영했었던 기억과 추억을 소환하였다. 지금 예루살렘의 군중이 예수를 향해 다시금 그때처럼 '호산나'를 외치고 있었다. 그들은 그때의 마카비와 같은 전쟁 영웅의 귀환을 너무도 간절하게 대망하여 왔었다.

 

3. 새끼 나귀를 타고

그런데 예수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왔다. 사람이 한 번도 타본 적이 없는 어린 나귀이기에 예수의 발은 땅에 질질 끌렸다. 전쟁을 연상시키는 큰 말 대신에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온 예수,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예언자 스가랴의 예언대로 '공의''구원'을 성취하는 메시아가 평화의 왕으로 왔다. 하지만 그 왕은 지금 사람들이 기대하는 전쟁의 영웅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왔다. 당시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런 메시아를 상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예수는 이 기획된 거리 공연으로 그들의 잘못된 메시아에의 기대를 수정하려 하였다. 그것이 예수의 거리공연 의도였다. 그들의 메시아관마카비를 환영할 때처럼 민족적 메시아로, 개선장군의 영웅적 메시아로 옹립하려 했으나 예수는 그 요구를 거절한 것이다. 화려했을 것으로 상상하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에서 마가가 강조하는 것은 행렬 내내 수수께끼 같은 침묵으로 나귀 새끼를 타고 있는 예수였다.

 

무리의 환호에 응답도 않으신 예수, 본인이 준비하고 연출하는 이 요란한 행렬 한가운데에서 그는 단지 침묵할 뿐이었다. 군중 환호 속에 예수 침묵, 그것이 그의 이야기 핵심이었다. '그래, 나는 메시아가 맞다. 하지만 너희가 기대하는 그런 메시아는 아니다. 나는 너희를 구원하겠으나 너희가 기대하는 방법으로는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아니라 '자기들의 꿈과 욕망을 투사한 메시아'를 기다린다. 공의와 평화를 이루는 겸손한 왕이 아니라 부와 권세와 성공을 약속하는 영웅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군마가 아니라 나귀를 타신 왕,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오는 메시아, 그런 왕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다. 심지어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버림받은 왕이 되었다. 열광적으로 그를 환영했던 인간들은 불과 며칠 사이에 그를 ‘죽이라’ 소리쳤다.

 

오래 전의 메시아 예언은 그렇게 이루어져 갔다.‘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53:1-3) 세상을 구할 메시아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를 묵인하는 것 같은 이 현실에서, 이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왕이신 예수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고통의 원인은 분명 왕에게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능해 보이는 이 왕의 삶이 진정한 구원이며 유일한 치유책이었다. 그것이 날마다 조금씩 내가 죽는 것으로 내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결론

예수는 말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8:34)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방식' '나의 방식'을 오해하며 살아왔던가? 얼마나 자주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혼동하며 살아왔던가? 소란스러운 세상 가운데로 나귀 새끼를 타고 침묵으로 온 예수, 우리의 욕망과 바람이 투사된 메시아가 아니라, 군중이 기대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보라.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화를 위해 오는 메시아를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들어온 예수는 강도 소굴처럼 편견과 욕심으로 더러워진 마음의 성전을 깨끗이 청소한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모든 것을 다 이룬 그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세상을 이긴 것처럼 너희도 세상을 이길 것이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정권은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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