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7. 15:3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51:1~7)
기본적으로 인간은 하나님께 죄인 된 상태이다. 하나님의 바람에 불순종하는 존제이니 죄인이다. 그런 면에서 죄는 수동적이거나 정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요 적극적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이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안 지을 수도 있는 중간 지대에 있고 또 그런 상태로 태어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죄를 멀리할 수도 있고 선을 택하여 살 수도 있다고 여겼다. 소위 인간의 자유 의지라 말하는 것을 믿어왔던 것이다.
1. 본질적 존재로서
처음 인간이었던 아담은 그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악에 오염된 이후에는 상실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지을 수도, 안 지을 수도 있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하나님께 불순종할 존재로 태어난다. 이후, 살면서 악의 영향력 아래에서 눈도 멀어져 갔다..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3-4) 오염된 인간이라 악을 의도적으로 행할 수 있지만 선을 의도적으로 행할 수는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 우주에 한 악한 정신이 있고 인간은 그것의 종이 되었음이다. 그 불순종은 배운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다. ‘날 때부터’ 진노의 자녀였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그렇다. 인간은 날 때부터 죄 중에 출생하였다.
성경은 죄 중에 태어난 인간이기에 선을 행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한 사람으로서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그 후예들이 예외 없이 죄인으로 났다.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5:13~14) 죄라는 것은 그것을 규정짓는 법이 있어야 죄로 성립된다. 빨간불에는 서야 한다는 교통법이 없으면 빨간불에 달려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 하지만 모세의 율법이 있기 전에도 죄는 있었다. 아담과 모세 사이는 수천 년의 갭이다. 모세에 의해 주어지기 전에는 ‘이것이 죄다’라는 율법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살았던 사람들은 죄를 안 지은 것인가?
아니다. 성경은 그럼에도 죄를 지었다고 전한다. 아담 이후에도 계속 사망이 왕노릇 하였음이 그 근거이다. 죽음은 죄의 삯이었는데 율법이 있기 전에도 인간은 죽었기 때문이다. 특히 영아 사망의 경우, 자기 의지로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음에도 죄의 삯으로 죽었기에 바울은 인간이 날 때부터 원죄가 있음을 말한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5:18-19) 이렇듯 성경은 원죄 문제를 간단하고도 정확하게 짚고 있다. 우리가 그렇게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는 말이다. 인간으로서는 이것을 믿고 싶지 않다. 하지만 살면서, 관계로 얽혔던 경험에서, 아니 자신 스스로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원죄에 관한 성경의 이 지적에 공감되고 확신된다.
2. 안녕과 평안을 위하여
심리학에서는 인간을 달리 말한다. 인간은 본래 선하고 가능성 있는 존재인데 좋은 본을 보지 못하고 나쁜 영향을 받아서 악해진다는 것, 그러니 그 본래의 선함들을 개발하고 훈련하면 인간은 얼마든지 선하게 바뀌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학교에서 체벌도 없어졌다. 때리지 말고 왜 아이가 저렇게 되었는지 ‘분석해서 그 결과를 가지고 고쳐나가자’는 것. 하지만 성경에는 아이들이 잘못하면 채벌이 마땅하다고 한다. 그래서 맞는 것이 두려워서라도 못하게 만들라고 한다. 그 정도로 인간은 죄 중에서 태어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불가지론자로서 평생 우울증에 시달리다 간 인물이었다. 그는 환경과 여건을 잘 만들어 좋은 모범을 보이면 인간이 선하게 된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인류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환경이 에덴이었다. 그런데 그 에덴에서 인간이 타락하였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완벽한 환경이어야 인간이 타락지 않을 수 있나? 불순종이란 순종 대상을 인정치 않음이다. 결국 인간이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겠다는 말이다.
참 멋있는 말이지만 처음 인간 아담이 저지른 죄가 바로 그것이었다. 인간은 애초에 만들어지기를 하나님과 관계하고 그 안에 있을 때에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존재였다. 때문에 그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자기 하고 싶은 어떤 것을 한들 만족이 없다. 행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에서, 자유는 하나님이 이끄는 삶에서 온다. 한국에서 미국까지 배로 태평양을 건너 여행을 한다면 몇 달은 걸린다. 며칠은 배 안에서 경치도 구경하고 좋지만 일주일 이 주일이 지나면 점점 답답하다. 걸어서 조금만 가도 사방이 더는 넘지 말아야 할 난간이니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로운 곳은 어디인가? 막힘없고 끝이 안 보이는 바다이다. 혹 승선자들이 자유롭고 싶다고 바다로 뛰어들어 가려한다면?? 죽음이다. 배 안에서 제한된 자유이나 선장의 지시에 따르고 배를 의지해서 목적지에 도착함이 안전이다. 이생의 이치도 다를 바 없다. 내가 내 삶의 주인 되어 내 마음대로 사는 삶은 사망이다. 하나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그를 의지하며 사는 인생에 평안이 있고 안녕이 있다.
유독 성경에는 ‘육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된다. ‘죄의 상태 안에 있는 인간 본성,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뜻한다. 아니 살아 움직이는 모든 인격, 성품을 포함하기도 한다. 타락 이후 죄된 본성으로 존재하는 것들을 ‘육체’라 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5:17) 성령의 감동과 역사를 거스르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육체이다. 그렇다고 그런 인간 안에서 나오는 소욕이 나쁘기만 할까? 오히려 자연스럽다. 배가 고플 때 밥을 원하는 것, 졸릴 때 잠을 자고 싶은 것, 목이 마를 때 물을 마시고 싶은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배고플 때의 맛있는 식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즐거움이다. 이런 소욕과 비교해서 죄가 되는 욕구는 과욕이다. 타락 이후 인간의 자연스러웠던 욕구가 절제가 되지 못하였으니 그것이 죄가 되었다. 자신을 위해서 채우고 싶어 하는 그 끝없는 욕망이 타락된 인간의 본성이 되고 만 것이다.
3. 진노의 삶에서 돌이켜야
그 욕구가 내면에서 나오니 모두 죄가 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욕구가 탐심이 되더니 죄가 되어버린 것이다. 애당초 쾌락과 즐거움은 하나님이 준 선물이었다. 그런 것들은 죄가 아니었다. 다만, 절제되지 못한 쾌락과 즐거움이 죄였다. 지나쳐서 하나님을 잊고 자기 쾌락과 행복과 즐거움만을 추구하다가 사망에 이르고 만 것이다. 타락한 인간은 절제하지 못하니 지나친 욕심의 존재가 되었다. 먹는 것은 인간이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인데 그 먹는 것이 인간을 끌고 가기 시작했다. 먹기 위해 인간들이 인생을 걸고 있다. 더 많이 먹기 위해 다른 이들을 밟고서야 했고 더 큰 쾌락을 위해 일탈을 서슴지 않았다. 그 근본은 처음 인간 아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회법상 죄라고 정해 놓은 것만 죄로 생각하여 그 실정법을 어기지 않은 스스로를 괜찮은 인간으로 여기나 착각인 것이다.
그러면 자기 괘락, 자기 욕심만을 위해 사는 그 삶은 행복할까? 돈 많으면? 모두에게 인정받는 인플루언서라면?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럼에도 왜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가? 생의 목표를 행복에 두기 때문이다. 한 예로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 그 가정의 최고 목표를 행복에 둔다. 그래서 서로에게 그 행복을 위해 노력을 요구한다. 상대가 조금만 노력을 해 주면 내 가정은 행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기에 그 충족될 수 없는 단계에서 불행을 느낀다. 그러니 가정의 목표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명령에 대한 ‘책임’이며 ‘순종’이어야 한다. 우리 삶은 이 땅의 행복이 목표가 아니라 거룩한 자로 지어져 가는 것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책임 있는 삶을 인생에서 세워나가야 한다. 남편은 예수 역할을 하고 아내는 교회 역할을 하며 아이들은 그로 인한 언약 후손의 역할을 하면서 이 땅에서 천국을 배우고 경험하라는 명령, 그리고 거기에 반응함을 ‘책임’이라고 하고 ‘순종’이라 한다.
2000년 전의 이스라엘이 범한 잘못이 무엇이었던가? ‘저런 무능한 인간이 메시아라니?’ 이스라엘은 그래서 망했다. 하나님의 목적은 완벽한 가정 이루고 성공하여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라는 것에 있지 않다. 그 만남, 그 과정을 통해서 천국을 배우고 천국 백성의 자질을 키우라는 것에 있었다. 모든 인간들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다. 세례 요한은 그런 인생들에게 회개하여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고 외쳤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지옥에서 죄인들이 경험하는 이 진노는 오늘의 우리 삶에서도 나타난다. 이기적 욕심을 따라 행복을 추구하며 살고 있지만 행복도 없고 만족도 없는 상태, 그럼에도 계속 욕심을 채우고자 불안하게 사는 삶, 그것이 진노이고 지옥이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놔둘까? 우리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그 죄와 싸워 이겼으니 우리들도 싸워 이기라는 것이고 그의 삶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결론
구원받기 전의 우리 상태는 지옥이었다. 거기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것을 잊지 않도록 우리 삶에 여전히 불순종과 탐욕을 지닌 ‘육체’가 ‘새 영’과 공존하는 것, 여전히 옛사람이라고 표현되는 그 ‘육체’에 '새 영'이 들어와 있는 상태가 우리이다. 어느 날 갑자기 완전하고 거룩한 존재가 되지 않는다. 투쟁하고 고민하면서 한발 한발 가는 것이다. 그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전투에 오늘 우리가 삶으로 참전하고 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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