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5. 21:05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주인이 그 중의 한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 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16:5~16)
하늘나라, 그 천국은 어떤 곳일까? 우리가 천국을 생각할 때는 먼저 하나님의 마음, 즉 아가페를 알아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설명함에서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마20:1)고 하였다. 천국은 공간적이고 시간적 개념이기 이전에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비슷한 말도 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영생’ 또한 무엇을 ‘아는’ 것이라는 말이다.
천국은 예수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것을 누리는 상태이다. 그 예수 안에 하나님의 마음, 즉 아가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했을 때 그 예수 안에 이미 아가페가 들어 있었다. 그러니 그 아가페를 아는 것은 아들을 아는 것이기도 하다. 그 주인의 마음인 아가페, 다시 말해서 사랑과 은혜를 아는 자들은 지금 그대로도 감사하여 초막이든 궁궐이든 그 어디에서도 하늘나라로 산다. 그 주인의 사랑과 은혜의 마음을 아는 삶이 천국인 것이다.
1. 일꾼과 포도원 주인
포도원 주인이 이른 시간부터 일꾼을 찾았다.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포도원, 즉 천국에 들여보내기 위함이었다. 성경에는 분명 ‘일을 시키기 위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는 천국이 인간의 ‘수고’로 들어가는 곳이 아님을 말해준다. 물론 상식적으로, 포도원에 들여보냄은 일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것이 품꾼을 찾는 목적이었다면 이른 아침에 일꾼을 충분히 뽑아서 일괄적으로 포도원에 들여보냈을 것이다. 주인이 우리 시각으로 오전 6시부터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까지 이렇게 다섯 차례나 품꾼을 구하러 장터에 나갔다. 이는 어떤 경제적 논리나 실용적 논리에 의해서 품꾼을 구한 것은 아님을 말한다.
그러면 일꾼을 구하는 포도원 주인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일을 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일꾼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기 위함'이었다. 한 데나리온은 당시 일반 사람들에게 하루 먹거리를 구할 금액이었다. 그것이 없으면 그 일꾼이 가족이 하루를 굶는다. 그 의미에서 한 데나리온은 일꾼과 그 가족들에게 ‘생명’이었다. 그러니 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일꾼을 구하러 장터에 나감은 아침부터 일찍 일꾼을 부려 먹으려 함이 아니라 일찍부터 천국 백성들을 찾아 나섬이다. 포도원, 즉 천국 안으로 그들을 들여보내기 위해서 주인은 때를 나누어 품꾼을 찾아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품꾼이 자기를 고용해 줄 주인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품꾼을 ‘나가서’ 찾아다녔다는 사실에 기독교의 특성이 보인다.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제 육시와 제 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이것은 잃은 양을 찾고 잃은 드라크마를 찾으며 세상으로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해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육신 사건 전체 맥락과 같은 이야기이다. 품꾼들은 장터에서 허탈하게 놀고 있었다. 장터는 광장으로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또 제 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그들이 놀고 있었던 이유는 아무도 그들을 쓰는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2. 쓰는 자가 없었으니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오늘날에도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보면 이 양상과 다를 바 없다. 기술이 있거나 힘이 좋은 사람들은 이른 아침에 다 뽑혀 간다. 그런데 낮 시간, 심지어는 저녁 5시에까지 아무도 그들을 뽑아가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 하나도 내세울 것이 없는,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냉혹한 현실은 이런 사람들을 절대로 뽑지 않고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주인은 그런 인생들조차도 뽑아가서 포도원, 즉 천국에 들여보냈다. 주인은 그란 인생들에게도 ‘한 데나리온’이라는 생명을 주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다.
하지만 율법주의에 입각한 인생들은 이런 은혜를 깨닫지 못한다. 아니, 알 수가 없다. 아침 6시, 9시, 12시, 오후 3시, 5시에 온 사람들이 그 포도원에서 일할 때는 모두 행복했다. 모두들 감사하고 기쁜 마음으로 일했다. 문제는 임금을 나눠줄 때 발생했다. 오후 5시에 와서 고작 1시간 일한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자 아침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받을 줄로 기대하였다. 그런데 앞서 받은 이들과 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내가 더 많이 일했는데, 나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때까지의 감사와 행복이 깨져버렸다. 처음에는 자기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써 준 주인이 마냥 고마웠지만 자신이 한 일의 양과 다른 사람이 한 일의 양을 비교하면서 은혜가 망각되고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내가 더 많이 일했는데, 내가 1시간만 일한 저 사람보다 더 가치 있는 사람인데, 왜 나를 저 사람과 똑같이 대우하는가?’ 일찍 온 일꾼들의 주인에 대한 불만이었다. 그것은 똑같이 은혜로 대하는 주인에 대한 분노였다. 이 말은 ‘청함을 입은 자는 많은데 택함을 입은 자는 별로 없다’는 복음서의 다른 언급을 연상시킨다. 은혜의 자리로 불러들이기는 했는데 그 은혜를 진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는 말이다. '더 오랜 시간, 더 많이 일했으니 보상을 더 달라' 이것이 율법주의 아래서 길들여진 우리의 모습이자 자세일 수도 있다.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런 주인의 판단 바탕에는 은혜주의가 깔려 있었다.
3. 주인의 은혜로운 판단
아침 일찍 온 일꾼들은 율법주의적 판단으로 항의했고 주인은 은혜주의적 관점에서 답변하였다. 비슷한 장면이 성경에 종종 나온다. ‘저 세리와 창기들이 나와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나는 싫다. 그런 것이 예수 믿는 것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다’ 화가 나고 자기 배가 아픈 이유가 있다. 자신은 근사한 인생을 살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자기는 함부로 살지도 않았고 크게 잘못한 것도 없으며 남들보다 더 열심히 일했는데 ‘왜 저 사람과 나를 기분 나쁘게 동일하게 취급하느냐?’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 중에도 차등상급론을 말하는 이들이 많다. 정녕 구원의 진짜 의미를 모르고 하는 말들이다. 우리는 내 효용가치나 헌신, 능력에 따라 구원받지 않는다.
우리 모두는 죄와 허물로 이미 죽어 있었다. 어느 인간이든 예외 없이 사망 상태로 태어나니 누구도 포도원에 들지 못할 운명이었다. 각자의 지위, 스펙, 외모, 재산이 각기 다를지라도 모두 ‘사망’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인간은 모두가 죄인이었고 하나님의 원수들이었다. 그럼에도 포도원에 들어온 우리는 들여보내 준 주인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누가 더 성숙하고 누가 덜 성숙하며 누가 더 헌신했고 누가 덜 헌신했는지, 누가 더 선하게 살았고 누가 덜 착하게 살았는지가 그렇게 중요할까? 그것이 중요하다고 우긴 이들이 있었다.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그런 이들의 ‘율법적 경직’을 지적함에 있다.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나의 열심, 선함, 나의, 멋짐을 바라보는 순간, 또는 내가 이루어낸 성공들을 바라보는 순간 위험하다.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성공했고 헌신한 사람이야. 나만큼만 해 보라고 해’ 이런 생각들이 무서운 이유는 더 이상 은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가, 지금의 천국 생활 누리기가 정말 힘들다. 그러나 오후 3시, 5시에 온 사람들은 주인이 고마워서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니 이런 사람들이 ‘먼저 된다’ 하니 신앙인들이다. 이들은 ‘한 데나리온’을 받을 자격이 없었지만 바로 이런 사람들이 주인을 사랑한다. 자기가 어떤 사랑을 받았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5시에 온 사람처럼 게으르게 살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의 처음 자리가 무엇이었는지를 얼러는 말이다.
결론
하나님 앞에서 선 우리 모습은 이렇게 ‘면목 없는 자’이다. 주인의 마음을 아는 것, 주인의 긍휼, 사랑, 은혜를 아는 것이 천국을 누리는 삶이다. '세계적인 인물이 되고 큰 성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이런 선동과 기도 제목은 기독교가 아니다. 그것이 되고 안 되고는 복음과 상관이 없다. 구원은 ‘내가 무엇을 했느냐?’에 근거하지 않는다. '내가 누구인가?'에 근거할 뿐이다. 나이 쓸모없음, 면목 없음의 상태로 내려감, 즉 오후 5시에 온 사람의 심정을 갖는 것이 구원의 상태요 천국을 누림이다.
‘너희 목마른 자 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 (사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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