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4. 7. 16:13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디베료 가이사가 위에 있은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요한이 요단강 부근 각처에 와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 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눅3:1~6)
기독교는 신앙의 절기가 있고 교회는 그 절기력에 따라 그 성례식을 지킨다. 그중 사순절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하며 부활을 기다리는 절기이고 대림절은 생명의 빛으로 오는 구세주의 탄생, 곧 성탄을 기다리는 절기이다. 이렇듯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회는 기다림을 잊어버린 듯하다. 기다림의 언어와 예전은 남았으나 그 기다림의 간절함은 사라진 것 같다는 말이다. 로마의 극한 박해 아래 있던 초대교인들의 기도는 '마라타나', 즉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였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그리고 현세에 안주하면서부터 서서히 기다림을 잊혀져왔다. 그 이후의 교회 역사는 어쩌면 '기다림 약화'의 역사일 수도 있다.
1. 하나님이 오신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장차가 아니라 지금 오신다.나의 참담함이 다 지나가고 난 뒤가 아니라 그 한가운데로, 다른 곳이 아니라 내가 서 있는 여기로 오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린다 하지만 실상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오신다. 이것은 기독교이다. 세상 모든 종교들은 인간이 신을 찾아 나가지만 기독교는 신이 인간을 찾아오는 종교이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사35:4) 기독교는 신과 진리를 향한 인간 탐구 생활이 아니다. 내 보잘 것 없는 삶의 자리 한가운데로 나를 구하러 오시는 하나님의 '오심'과 '임하심'을 선포하는 종교이다. 대림절은 '출현, 도래'는 뜻이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것, 우리가 미래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미래가 지금의 나를 향해 오는 것이다. 소망의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삶 안으로 밀고 들어오기에 예수도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마11:12)라고 말했다. 침노란 '법이나 도리에 어긋나게 쳐들어감'이다. 그렇게 강력하게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가운데로 임한다는 말이다.
집에 반가운 손님이 들면 우리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 일어나 옷을 고치고 자리를 내어주며 차를 내온다. 그처럼 하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도 가만히 앉아 기다리지 않는다. 그의 임하심을 소망하는 인생은 주어진 현실에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 소망은 정적인 기다림이 아니라 동적인 기다림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뚫고 들어오시는, 침노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나를 그 나라의 참여자로 부른다. 단지 그 나라의 상속자가 아니라 그 나라를 가꾸고 다듬는 정원지기로 부른다. 일찌기 예언자 이사야가 그 정황을 다음가 같이 전하였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사40:9-11)
이사야는 이 기쁜 소식을 선포하면서 우리가 여호와의 오심을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한다고 외쳤다.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고, 사막에서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말이다. 광야는 생명의 힘이 스러지는 공간이고 사막은 생명이 말라버린 불모의 땅이다. 오늘 우리 삶의 자리는 어떤가? 바로 그 광야요 사막이 아니던가? 거기에서 예언자는 우리로 하여금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고 선포한다. 구약의 이 외침을 이어받은 사람이 신약의 세례요한이었다. 그는 실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다. 그는 우리로 하나님의 오심을 준비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를 건너뛰어 바로 성탄절로 곧바로 갈 수가 없다. 사복음서 모든 곳에서 예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세례요한을 묘사하고 있다. 다만, 누가는 거기에 조금 특별한 이야기를 더하여 들려준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서 세자 요한에 대한 보도 중 누가의 차이는 세 가지에서 드러난다.
2. 삶으로의 기다림
첫 번째는 3장 1~2절, 여기서 누가는 세례요한이 나타나 활동할 즈음의 시대적 맥락을 자세히 소개한다. 이는 다른 복음서 저자들이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내용이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 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디베료는 티베리우스로서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였으며 로마의 두 번째 황제이다. 분봉왕이란 '4분의 1 통치자‘라는 의미이다. 로마는 팔레스타인을 네 지역으로 분할시켜 각각의 관할자로 통치하게 했다. 이렇게 세계 정세와 팔레스타인 정세를 자세히 다루고 난 후에 누가는 종교로 눈을 돌려 요한이 출현할 때 대제사장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있었다고 말한다. 어느 때를 막론하고 한 시기에 두 명의 대제사장이 재직하고 있었던 때는 없었다. 그런데도 누가가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기록함은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지만 그의 장인 안나스가 여전히 막후에서 실권자로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누가가 세례요한의 활동 배경을 정치적, 종교적 맥락 속에서 설명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단지 유대인뿐 아니라 세계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음을 강조하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누가의 특이한 점은 네 복음서 저자 모두 세례요한의 활동을 사40:3의 말씀, 즉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와 연결하고 있지만 누가는 사40:3을 넘어 4~5절까지 확장하여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높은 것이 낮아지고 낮은 것이 높아지는 '역전' 현상이 일어나 평탄한 여호와의 길이 준비된다. 이는 약한 이들이 높아지고 높은 이들이 낮아진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함이다. 그 결과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가 지은 모든 생명이 수탈과 갈등 관계에서 벗어나 평등하고 조화로움에서 나타난다.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다. 세 번째로 특이한 점은 세례요한이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같으나 누가만이 무엇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례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고 큰소리로 꾸짖으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촉구하였다.(3:7-8) 그러자 무리가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물으니 요한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라.’ 또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와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물으니 요한은 ‘부과된 것 외는 거두지 말라’고 대답하였다. 이어 군인들도 와서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하고 물으니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며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3:10-14)고 말했다. 이런 구절들은 누가에만 나온다.
3. 회개에 합당한 열매로
무엇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인가에 대한 무리, 세리, 군인 등 상대는 다르지만 그들에게 답한 세례요한의 말에는 공통분모가 있다. 곧 재물에 대한 태도였다. 즉,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불의한 일을 저지르지 말고 자기 재물을 어려운 이들과 함께 나누라는 것, 그것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 하였다. 누가는 재물의 사용이나 재물에 대한 태도가 신앙과 무관치 않으며 오히려 신앙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통로라고 강조하였다. 재물에 대한 누가의 이 특별한 관심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강도 만난 이웃을 도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10장), 재물을 쌓아놓고 안전한 줄 알았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12장), 그리고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 (16장)가 오직 누가복음에만 나온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초대교회는 이 가르침을 잘 실천했다. 회심자를 위한 신앙훈련을 3년이나 시켰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에게 우선 신앙문답을 통해 '세속적인 삶을 그대로 살 것인지, 아니면 신앙적인 삶을 살 것인지'를 묻고 결단하게 했다. 이것을 통과해야 세례 예비자 과정이 시작되는데, 예비자들은 일주일에 몇 번씩 아침 일찍 모여 말씀을 공부했고 교사들은 그들을 안수한 후 일터로 나가도록 했다. 이때 교회가 세례 예비자들에게 요구한 내용은 오늘날에 보아도 놀랍다. ‘정당한 임금 지불, 고리대 금지, 보복 금지, 선한 말을 하고 분노를 억제할 것, 잘못이 있을 때 서로 사랑으로 교정하라" 등이었다. 회개는 머릿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 그것이 누가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다.
안일에 젖은 오늘의 우리는 설령 예수가 찾아와도 그를 알아보지 못할까 두렵다. 이사야는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사1:3) 하며 이스라엘의 안일을 한탄하였다. 현대인들은 지금 그분이 우리 가운데 온다 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심지어 내칠지도 모르겠다. 그분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나그네의 모습으로 오는 그분을, 우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로 존재하는 그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그들을 위해 일할 수 있음이, 연대할 수 있음이 축복이요 은혜이다. 그런 나눔과 섬김이 오늘 우리에게 오시는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는 일이다.
결론
대림절은 예수의 '첫 번째 오심'과 '다시 오심'을 맞이하는 준비의 절기이다. 우리는 주님의 초림을 믿고 재림을 기다리는 인생들이다. 그러니 깨어 기도하면서 주님의 오심을 기다림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사랑을 행동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그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반드시 찾아오신다. 시인의 말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왔다. 아니, 아직도 그 골짜기를 다 빠져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대림절은 이미 끝난 것 같은 미래를 여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시즌이다. 그 하나님, 그의 나라가 우리의 힘들고 지친 삶 한가운데로 찾아온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여호와여 내가 깊은 데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감찰하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파숫군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숫군의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구속이 있음이라 저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리로다'(시1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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