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크리스찬

2022. 9. 25. 17:56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3~16)

 

예수의 전기를 전하는 책이 복음서이다. 그 복음서는 마태, 마가, 누가, 그리고 요한의 복음서이다. 각 복음서들은 기록한 저자의 독특한 관점과 이력, 필력, 그리고 수신 대상의 차이 때문에 크고 작은 상이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중에 마태복음의 수신자는 구약에 능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래서 저자 마태는 그의 복음서에는 많은 구약 내용들이 인용하였다. 그래서 구약을 모르면 마태복음을 해석하지 못할 정도이다. 그러니 그가 말한 산 위의 동네는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을 수신자였던 유대인들은 바로 알아 들었다. 적어도 구약을 통해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1. 드러나는 산 위의 동네

구약에는 자주 산이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 산은 예루살렘을 뜻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산은 시온산이요 예루살렘이었다. 마태가 그의 복음서에서 말한 산 위의 동네는 그 유대인들에게 특별한 예루살렘이었다. 예루살렘은 율법주의의 총 본산지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으며 율법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라는 말까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태는 시온산, 그 예루살렘, 그 율법주의의 실체가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전하고 있다. 그 율법주의, 예배의 총본산이었던 예루살렘은 그럴듯하였다. 흠모할만했고 따를만하였다. 진짜 빛인 예수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참 빛인 예수가 나타나자 그 산 위 동네의 이중성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의 제사와 외양과 근엄한 의식으로 지탱되고 유지되어왔던 그 예루살렘, '산 위의 동네'가 예수의 출현으로 인하여 더 이상 숨겨지지 못한 채 실체를 들키고 만 것이다. 그래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한다는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한 때는 산 위의 동네에서 살았었다. 그리고 그런 동네에서 주류로 살고 싶어 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당시의 예루살렘처럼, 그런 동네에서 살기를 추구하는 인생들이 태반이다. 보기에 폼나게, 멋진 스펙으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명품 옷을 두른 채 거기 걸맞은 교양 있는 말을 하며 훌륭하게 사는 것, 그것이 성공한 인생이고 사람 사는 것처럼 산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진짜 빛이 비취자 그런 것들의 실상이 드러났다. 마치 10년 넘도록 청소를 안 했던 하수구 뚜껑이 열리는 것처럼, 더 이상은 그 더러운 실상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예수는 그런 인생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극언을 하였다. 아니 더 심한 말까지 하였다. '겉으론 깨끗하지만 그 속에는 죽은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구나!'(마23:27) 경직과 권위주의, 형식과 위선에 찌들어 있던 그들에게 던져진 이 말로 예수는 극형을 피할 수가 없었다. ‘내가 여기까지 오르느라고 얼마나 수고하고 공을 들였는데, 그래서 이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 다들 나에게 깨끗하고 흠이 없다고 공인을 하는데그런 의식으로 사는 그들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사렛 촌동네에서 볼품없는 한 인간이 나타나더니 너희가 더 이상 참 빛 앞에서 숨기우지 못할 것이다!’ 라며 모욕감을 안겨버린 것이다. 기득권자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와 신분을 걸고 예수를 몰았다. 전쟁을 벌인 결과 그 예수를 처단하였다. 그런데 싸움의 방식이 묘했다. 율법주의자들의 전쟁은 상대를 죽이는 방식이었고 예수의 전쟁은 자기가 죽는 방식이었다.

 

2. 불가피한 충돌

예수의 빛을 조명받아 사는 우리는 세상의 빛이다. 그러기에 '산 위의 동네'와 충돌은 불가피하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마5:14) 산 위의 동네가 숨겨지지 못하고 드러남은 세상의 빛때문이었다. ‘세상의 빛이 오기 전까지 산 위의 동네는 안전하였다. 모두들 우러러보았고 겉보기에 멋진 동네였다. 그러나 키 작은 사람이 그 키 작음이 드러나는 때는 키 큰 사람 옆에 설 때이다. 바로 그런 것처럼, 이전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웠던 산 위의 동네세상의 빛이 나타나자 그때부터 그 실체, 즉 위선이 탄로 나 버렸다. 사람들은 세상의 으로의 삶을 윤리적인 것으로 여겨왔다. 교회를 다니고 믿음 생활을 하면 더 차원 높은 도덕적 삶으로 세상에 감화를 끼치는 것이라 생각해왔다. 실제로 그렇게 사는 기독교인들 향하여 응원과 지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빛으로의 삶에 대한 본 뜻은 자기 어둠을 깨닫고 예수께 그 빛을 받아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다. 으로 인해 산 위의 동네와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전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를 제대로 믿으면서도 적당히 믿으려는 자신과의 갈등, 주변과의 충돌, 더 나아가서는 문화 집단과의 불협화음이 불가피한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 상식과 종교적 계율을 적당히 이행하는 선행이 아니라 속 사람까지 완전히 변화는 진짜 크리스찬이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가 세상에서 하고자 했던 일도 그것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님은 바로 그 일을 원하신다. 진짜 크리스천이 되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속 사람을 향한 부대낌, 제대로 믿으려는 갈등, 신앙생활을 철저히 하려는 투쟁을 원하신다. 그런 것 없이 때 되면 예배 가고 남들 하니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도 예수도 원치 않는다.

 

그래서 제자들이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요6:28~29) 물론 우리는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서 선한 일, 좋은 일을 많이 해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을 받아야 한다. 이것은 믿는 자들의 삶으로서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빛과 소금'으로의 우리 삶은 그 이상의 의도를 담고 있다. 예수가 말씀하신 대로 그를 보내신 자를 믿는 것, 즉 진짜 크리스찬'이 되라는 것이다. 겉이 아닌, 속이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자연적인 빛과 소금으로의 삶, 즉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인 그 단계의 삶을 사노라면 사람들에게 칭찬만 듣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들로부터 핍박도 동시에 받는 것이다.

 

3. 마음의 할례

도대체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예수가 작심하고 그들을 공격했던가? 그들은 속이 더러움에도 겉만 깨끗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었다. ‘소경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23:24~27)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목숨 걸고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외면상 흠잡을 데가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런 그들에게 예언자 예레미야가 '새 영'을 외쳐왔었다. 오래전부터 예언자 에스겔도 '새 마음'을 외쳐왔었다.

 

그 예언자들이 외쳐왔던 '새 영'은 무엇이고 새 언약은 무엇인가? 마음의 할례였다. 이미 구약 때부터 믿음의 본질은 겉이 아니라 속이라는 사실을 외쳐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종교를 이용해서 기득권을 누리는 계급들, 또 그런 것을 추구하는 인생들에게 새 마음은 용납될 수 없었고 '새 영' 따위는 이해될 사안도 아니었으며 심사숙고할 수조차 없는 문제였다. ‘소경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예수 눈에는 그들이 성전보다는 성전의 금이 더 중요히 여긴다고 보였다.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23:16~19) 예수 눈에는 그들이 제단보다 그 제단의 예물을 더 중요히 여기는 집단으로 보였던 것이다.

 

산 위의 동네즉 성전 지도자들이 입으로는 성전과 제단을 강조하였지만 내심 금과 예물을 더 중요시하였다. 오늘이라고 다를까? 말씀은 그런 예배. 그런 제사, 그런 삶에서 벗어나라 한다. 그 옛사람, 산 위의 동네에서 내려와 하늘 사람으로 살라한다. 그래서 그로 인한 갈등과 충돌이 있다면 피하지 말라 한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이는 마땅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래전 예언자의 말을 오늘 우리들에게 다시 외치게 하신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사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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