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2. 16:49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무리 중에 한 사람이 이르되 "선생님, 내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하소서" 하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12:13-21)
온갖 음식이 차려 있는 '뷔페'나 코스별 요리가 나오는 한정식을 가면 과식을 하게 된다. 이런저런 음식을 보면 욕심이 생겨 많이 먹게 되고 내는 돈이 아까워 선보이는 요리를 남김없이 먹기 때문이다. 인간의 과식이나 폭식 이유를 과거 굶주림에 대한 두려움이 잠재된 것에서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다. 언제 굶게 될지 모르니 기회가 있을 때 많이 먹어두어야 한다는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굶주림에 대한 잠재적 두려움으로 작동된다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인간에게는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을 채우려 한다. 그렇게 욕망하는 것으로 자기 빈 공간을 채워야 만족하는 존재가 인간인 것이다. 세상은 그 빈 공간을 채우라고 쉼 없이 우리 욕망을 부추기고 내면의 두려움을 조장한다.
어느 재미교포가 오랜만에 모국을 방문하고 느낀 소감을 적을 글 중 일부이다. "한국에 와 보니 웬만한 가정집뿐만 아니라 심지어 공중화장실에도 미국에서는 부자들만 쓰는 비데가 설치되었고 주차 티켓을 뽑는 촌스러운 행동 없이 우아하게 자동인식으로 주차장에 든다. 모든 대중교통은 카드 하나로 해결되고 집에서 앉아 햄버거를 배달시켜 먹고 어느 집을 가도 비밀번호나 카드 하나로 문을 열고 들어간다. 차마다 블랙박스가 달려있고 방문하는 집마다 전등은 LED이며 가스, 전등, 심지어 콘센트도 리모컨으로 켜고 끈다. 그런데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에 사는 것이 힘들다고 토로한다. 집값이 비싸다고, 정치는 헛짓을 해댄다고, 아이들 교육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지옥에 살고 있다고 아우성이다. 신기하다. 쌀이 넘쳐나 저장할 창고가 없고 각종 먹거리가 산을 이루어 비만이 늘고 당뇨와 혈압 환자가 늘어난다니! 이렇게 풍요로운데 왜 이들은 바쁘고 불안하며 불만족스러울까? 냉장고를 두세 개 가지고 편하고 고급스러운 집에서 살면서도 만족을 모를까?“
1.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전6:3) 백 명의 자녀를 낳았다니 얼마나 건강하고 부유했겠는가? 하지만 성경은 그 같은 자손의 축복이나 장수라는 행복도 궁극적인 만족이 되지 못했다고 말한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3-15) 왜 사람이 시험과 유혹을 당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 스스로 자기 욕망이 야기한 것이다. 인간의 그 욕망이 죄를 짓게 만들고 그 죄가 인간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의 탐욕을 가장 경계하였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 (눅12: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경고한 야고보서는 계속하여 말한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1:16-17) 내 욕망이 언젠가는 만족을 줄 것이라고 스스로 속이지 말라는 말이다. 탐욕은 터진 주머니와도 같아서 채워도 채워지지 않고 결국 삶을 지옥으로 이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흙과 물과 공기와 지금이라는 선물로서 산다. 흙에서 왔다 흙으로 돌아가는 백 년 남짓한 존재이지만 분에 넘치는 은혜로 산다. 은혜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햇빛을 받아 익은 곡식과 달빛을 받아 자라나는 과실 등, 땅 위의 풍성함에서 하나님을 본다. 인생 자체가 은혜로 살아간다는 경외감이 절로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재배한 농산물, 내가 만든 공산품, 내가 짜낸 아이디어, 어느 것 하나도 나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인정함이 신앙심이다.
어느 화가가 산과 물을 그린 풍경화를 비싼 금액에 팔고 돈을 챙겨 가려는데 어떤 사람이 물었다. "이것이 정말 100% 당신 것이 맞소? 왜 돈을 다 챙겨서 가오?" 화가는 어이가 없어 말했다. "내가 직접, 나 혼자 그린 내 그림을 판 내 돈을 내가 가져가는 것이 무슨 문제요?" 그러자 그가 말했다. "당신이 그린 것이야 맞겠죠. 하지만 그림 안의 수많은 나무는 당신이 심은 것이요? 그림 안에 흐르는 아름다운 물도 깨끗해 보이던데 저 맑은 물이 되도록 쓰레기 하나라도 청소해 봤소? 당신이 그림을 그린 저 만 원짜리 종이는 당신이 만들었소? 붓은? 물감은? 정당한 돈을 내고 샀다고요? 그렇다면 내가 그 돈을 줄 테니 그렇게 만들어보시오!" 따지고 보면, 그림 중 화가의 몫은 작은 부분이었다. 하나님이 대자연을 창조하여 나무들이 자라고 물이 흐른다. 누군가 오랫동안 그 나무들을 가꾸고 물을 정화했고 누군가는 종이를 발명했으며 누군가는 붓과 물감을 만들었다. 내가 정당하게 획득한 것까지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라고 여기는 마음이 신앙이다.
2. 욕심의 잉태에서 사망으로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다. 우리 또한 이전에는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던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긍휼의 하나님이 큰 사랑으로 우리를 살렸다. 그래서 '진노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땅의 사람’에서 ‘하늘의 사람’이 되었다. 그런 신분의 우리들에게 바울은 호소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의 욕망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이 바라시는 것은 육체를 거스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생명을 얻었으니 성령이 인도해 주심을 따라 살아갑시다.' (갈5:16-24)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기에 이제는 그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자기 안에 예수가 산다고 수차례 고백했었다. 그의 경험과 고백처럼 우리 역시 그 십자가에 내 탐욕과 집착을 못 박았기에 자유하게 되었다. 우리 안에는 십자가에서 못 박힌 예수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욕망이 아니라 생명으로 이끄는, 아니 생명 자체인 예수가 살고 있다. 우리 안의 빈 공간을 하나님으로로 채워나가는 삶, 영혼의 허기를 그의 은혜로 채워나가는 일상, 예수로 인하여 가능해졌다. 그는 하나님이었으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마다하고 겸손히 자기를 비움으로서 만유 안에 충만케 되었고 우리로 충만한 삶을 살게 하였다. 그런 우리 삶에 하나님의 안식과 예수의 평안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 함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런 인생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사회가 만들어지고 역사라고 하는 시간들이 진행되어 온 이레로 하나님은 때마다 경계시켰다. 탐욕을 멀리 하라고, 재산이 차고 넘치더라도 사람의 생명은 거기에 달려 있지 않다고 말이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아 속지 말라.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1:16-17) 마음의 탐욕을 비울 때 하늘이 열린다. 오직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을 때. 내 영혼이 만족스럽고 진짜 평안을 경험한다. 지금도 육신의 허기와 영혼의 갈증으로 아프고 우울하게 답답한 시간들을 살고 있는 인생들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우시고 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과 평화를 경험하라'고 말이다.
3. 비워서 만족으로
바울은 박해와 훼방 중에 고생으로 세운 고린도 교회에게 말하였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으니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3:6-7) 이 겸손, 이 비움이 우리 기독교의 신앙이다. 이 같은 자기 비움의 이치를 따를 때 인간 삶에 평화가 있고 안식이 있다. 탐심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비워져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 만족과 평안이 생겨나니 비로소 그 안에 다른 이를 허용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들에게는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에 항시 무언가로 그 공간을 채우려 해왔지만 생명의 하나님으로 채우지 않으니 욕심에 미혹되어 죄와 사망의 길로 몰렸었다. 인간의 욕심이란 짠 바닷물 같다. 그래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만 더 심해지는 것이다. 그런 삶과 영혼에 평화가 없고 안식도 없다. 그러니 자신 외에 이웃이 들어올 틈도 없다.
영원히 만족을 모른 채 피폐해진 영혼을 안고 결국 사망으로 갈 일만 남은 인생들, 진정한 만족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성경은 거듭거듭 증언해 왔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 (고후3:5)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하나님 그 한 가지만으로 즐거워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망한 상황에서도 예언자 하박국은 그 하나님 한분만으로 인해 즐거워하였다. 그런 은혜로 사는 이들은 작은 것에서 큰 감사를 느낀다. 살아 있어서, 숨 쉴 수 있어서, 따뜻한 아침밥을 먹을 수 있어서, 사용할 물이 있어서, 가족이 있어서, 맑은 공기, 차 한잔이, 손에 책 한 권 들려있음에, 심지어 넘어지고 속아서 손해를 보아도 하나님만으로 기쁘다. 망국의 세월을 살면서도 감사를 노래했던 하박국의 심정은 바로 그것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족의 영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한다. 항시 그 영으로 나의 빈 곳이 채워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그러니 기도는 무엇을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우는 것이요 없는 것을 불평함이 아니라 있는 것에 감사함인 것이다. 무엇이 행복이고 어떤 것이 만족인가? 한 시인은 <행복>이 무엇인가 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요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이다. 수도승 달라이 라마는 말했다. '탐욕의 반대는 무욕이 아니라 만족이다. 그 만족이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모든 것을 잃어도 “하나님이 제게 계시면 저는 기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3: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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