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7. 17:04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요8:52~58)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잡아 이익을 누리려고 싸우는 사람들이 보인다. 개인의 시커먼 욕심을 나라와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견강부회하고 혹세무민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한 시골학교 선생님을 묘사한 신경림 작가의 글이다. ‘북한강가 작은 마을 분교의 그 교사는 종일 남에게서 배우는 것이 업이다. 오십 명이 좀 넘는 아이들에게서 배우고 밭매는 그 애들 어머니들에게서 배운다. 뱃사공에게 배우고 고기잡이에게 배운다. 산과 들과 물에게 배운다. 제 아내에게도 배우고 자식에게도 배운다. 그는 늘 배운다. 아이들 질문에서 배우고 또 아이들의 장난과 다툼에서도 배운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모르랴. 배우기만 한다는 그에게서 그 아이들과 그 어머니들이 똑같이 배우고 있음을, 더불어 살면서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평범한 진실을 말이다. 하지만 그것조차 모르는 잘난 사람들이 서로 자기들만이 가르치고 이끌겠다고 설치니 세상이 온통 시끄럽다.’
1. 시작과 끝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리라.’(요일1:15~17)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말함이 아니다. 하나님이 친히 지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감탄했던 그 세계가 아니라 비열한 욕망과 그릇된 가치관, 그리고 이기주의로 점철된 인간 사회를 말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난 이런 세상을 사랑하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한다. 안목의 정욕은 눈에 보이는 겉모습에 유혹되기 쉽고 이생의 자랑도 이 땅의 공허한 자랑에 불과할 뿐인데, 자기 것 아닌 것을 자기 것인 양 자랑하여 스스로를 높이니 한마디로 허항 되고 허풍스러운 삶일 뿐이다. 성경은 이런 것들이 모두 '지나가는 것'이며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안락을 추구하고 지켜 쌓아 온 것을 통제하고 지키려 함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이다. 그럼에도 성경은 인간의 그런 본능을 경계한다. 정말 주목해야 할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이다.‘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잠30:7~8) 왜 잠언 기자는 자기를 가난하게도 말고 부하게도 말며 오직 일용할 양식만 달라고 기도했을까?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 함이니이다.’ (잠30:7~8) 성경이 그토록 이 세상이나 세상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지나가는 것인데 그 보이는 '잠깐'에 빠져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을 잊고 몰락할까를 염려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좀 살아 본 이들은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음;을 잘 안다. 전도자가 말한 것도 그런 뜻이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 하나님은 인생이 살아갈 날 수는 미리 정하였고 사람이 넘어갈 수 없는 한계도 정하였다. 인생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 저녁에 시들어 마르는 풀과 같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이다. 그 심판의 날, 곧 '하나님의 날'이 임하면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질 것"(벧후3:12)이라 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지나가는 것이다. 즉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는 말이다. 인생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우리 역시 마지막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두렵고 불편한 진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근심하게 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물어왔다. 죽은 후의 삶에 관해 물었고 종말 이후의 세계에 관해 물었다. 그래서 종교에 귀의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인생들은 시작에 대하여는 묻지 않는가? 아니 시작 그 이전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가? 죽음 이후에 관해서는 묻는다면 당연히 출생 이전의 우리 존재에 대하여서도 물어야 하지 않는가?
2. ‘있었다’가 아니라 ‘있다’
어거스틴은 물었다. '우리에게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더 이상 없음'이라는 어둠에서 와서 '아직 없음'이라는 어둠으로 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분명, 마지막이 있으니 시작이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시작을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의 마지막을 이야기할 수 없다. 바리새인들과 예수 사이에 극심한 논쟁이 있었다. 예수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 기대하며 즐거워하였고 마침내 보고 기뻐하였다"고 말하자 유대인들이 분노하며 "당신 나이가 고작 쉰도 안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고?"라고 반문하였다. 이에 예수는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하였다. 여기 주목해야 할 어구가 ‘있었다’가 아니라 ‘있다’라는 말이다. 요한 기자는 지금 예수가 영원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가 영원으로부터 온 사실에 대해서도 증언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의 적대자들은 그 어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시간의 과거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바울도 이 영원에 대해 증거 한 바 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이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이 다 그로 말미암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도다' (골1:15~16) 예언자 이사야도 같은 의미로 노래하였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사40:6-8).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인 예수는 '영원'이었다. 영원은 무시간이나 끝없는 시간이 아니다. 시간은 영원으로부터 나와 영원으로 돌아간다. 영원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시작이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근원이며 고향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에게 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래서 철학자이자 신학자인 하이덱거는 '예술의 본질은 시작이고 시인의 사명은 귀향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가 말하는 여기의 시인은 철학자, 사상가, 성직자를 말한다. 그는 자신의 철학과 신학에서 '존재, 존재자, 현존재' 개념을 구분하였다.
'존재'는 이렇게 혹은 저렇게 있는 것들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 존재 그 자체'이다. 즉 진리, 하나님과 같은 말이다. '존재자'란 물질이나 이념의 형태로 '있는 것들'을 의미한다. 기독교적 사고체계에서 모든 유한한 피조물을 뜻한다. '현존재'는 인간 실존을 가리킨다. 그 인간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있기에 현존재라 불렀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본래 있음의 고유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일상성에 매몰된 상태이다. 그래서 세상의 도구적 대상자로, 정치나 경제의 동물로, 과학적 사고의 노예로, 그리고 철학과 종교의 우상 제작자로 전락했고 오염되었다. 그래서 본래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 곧 '고향'을 상실한 것이다. 겉은 풍요로우나 속은 허전하고 외로워 항상 무언가를 소유하거나 탐구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그래서 시인들의 임무가 그런 현존재를 깨워 본래의 자리, 곧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에 있다고 하였다. 이 고향은 지리적 공간이 아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고 '충만하고 감사한 지금 여기'를 말한다. 우리는 그 존재의 고향,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3. 상실한 본향을 향하여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특히 몸이 약해지고 아프면서 임박한 죽음을 느낄 때면 많이 묵상되던 성경 구절이다. 그렇다 인간이란 아파봐야 존재의 근원과 한계를 깨닫는 존재이다. 그렇게 인생의 끝을 생각하니 인생의 시작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장차 어디로 가는가? 죽음이라는 끝이 있으니 분명 시작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돌아갈 곳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그분의 품이고 그분의 사랑이다.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램31:3) 이 영원한 사랑이 우리가 왔던 알파요 우리가 돌아갈 오메가이다. 우리는 '사유'가 필요하다. '깊은 사유'가 필요하다. '사유'란 영원하신 그분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자신의 근원을 바라봄'이다. 이 땅에 살지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고 감사이다. 그것은 근원으로 돌아감이고 그 근원으로 다가감이다.
잠깐 지나가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 것들에 사로잡혀 살다 보니 우리 인생들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 내세우는 무례한 삶을 살아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는 그 영원으로의 초대를 시인들을 통해, 사역자들을 통해전하신다. 아니 오래전부터 듣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해 오셨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납 하시리라.’ (사55:1~2)
이제 아침저녁의 공기가 다르다. 선선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지기도 한다. 인생 전체를 열 두 달로 나누면 지금 이 9월은 인생 어디쯤일까? 자아 탐색으로 치열했던 젊음이라는 여름을 보내고 이제는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를 넓혀가는 성숙의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긴 장마 뒤에 개인 모처럼만의 아침 하늘을 보았다. 파아란 하늘, 너무도 맑고 새파랬다. 이제 하늘은 더욱 높아가고 가을은 더 깊어갈 것이다. 영원을 향한 그리움에 우리들의 영혼도 저렇게 맑아져 깊어지고 높아지기를 기도해 본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셨던 영원하신 그분, 우리가 왔던 근원이자 우리가 돌아갈 시원으로 그분이 이 가을에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그 영원한 처소에서 지금 부르신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나를 청종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마음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사5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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