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친 세상에서

2022. 9. 25. 15:58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롬1:13~15)

 

파울로 코엘료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에서 주인공 베로니카는 세상 삶에 권태를 느껴 자살을 시도했던 젊은 여자였다. 자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그녀는 정신병원에 갇힌다. 하지만 자실을 시도했던 다량의 수면제 복용으로 심장 질환을 얻어  1주일 시한부 인생이 되었다. 그 기간 동안, 베로니카는 세상으로부터 비정상이란 진단을 받고 외롭게 그 정신병원에 갇혀 있는 소위 미친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중 한 미친 사람 제시카의 이야기가 있었다.

 

1. 정상과 비정상

<어느 왕국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한 마법사가 모든 백성들이 물을 길어먹는 우물에 묘약을 풀었다. 그래서 그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 미쳐버렸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날마다 물을 마시기 때문에 이튿날 아침이 되자 그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미쳐버렸다. 그런데 왕과 그 가족은 왕실의 우물을 따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그들만 미치지 않았다. 제정신인 왕은 백성들의 안전과 보건을 위해서 공중위생에 관한 일련의 조치를 담은 칙령을 내린다. 그런데 모든 백성들이 그 우물물을 마시고 이미 미쳐 있었기에 그들은 왕의 칙령을 따르지 않았다. 오히려 백성들은 자기들의 왕이 미쳤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규모 하야 시위를 한다. 왕은 쓸쓸히 왕위를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런데 왕비가 왕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 ‘우리도 우물로 가서 그 물을 마십시다. 그러면 우리도 그들과 똑같아질 것입니다.’ 왕은 왕비의 지혜에 감탄하면서 서둘러 가서 그 우물물을 왕비와 함께 마셨다. 그래서 왕도 백성들과 같이 미쳐버렸다. 왕은 죽는 날까지 그 왕좌를 지킬 수 있었다.>

 

제시카의 이야기를 들은 베로니카는 나지막히 말했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미친 것 같지 않군요 그러자 제드카가 말했다. ‘아니야, 베로니카, 난 미쳤어. 저 정신병원 담장 너머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아?’ 제드카의 의중을 알아차린 베로니카는 조용히 말했다. "물론, 마법사가 묘약을 탄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이겠죠!’ 이에 제드카가 말했다. ‘그렇지! 그 사람들은 자기들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그 담장 밖 사람들을 정상이라고 믿지. 그래서 나도 그 우물물을 마신 척하고 살아왔었지.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는 그들과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었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제드카는 담장 밖 사람들이 미쳤다고 하는 그런 사람, 즉 자기 정체성을 더는 숨기지 않고 드러내어 살겠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자기는 미치지 않았으니까! 그 우물물을 마시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그 정신병원에 계속 있겠다는 것이었다.

 

작가 코엘료는 그 소설에서 누가 진짜 미친 사람이냐?’를 묻고 있다. 마법의 우물물을 마신 사람들이 가득한 그 세상에서 그들로부터 비정상이란 진단을 받고 정신 병원에 갇혀있는 사람이 진짜 미친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 마법의 우물, 이를테면 맘몬이나 세속의 물을 마시고 힘과 돈이라는 것에 미쳐있는 정신병원 담장 바깥사람들, 소위 정상적이라는 그들이 미친 사람들인가? 이 세상 삶의 성공과 승리라는 것이 그렇다. 그 현실은 오늘이라고 다르지 않다. 소설속 이야기와 똑같이이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 정해 놓은 선과 악이 있다. 그런 구조나 어떤 현실적 가치를 암묵적으로 기준 심고 그 합의에 따라 정상비정상으로 갈랐다. ‘정상에 속했다는 이들은 자기들의  잣대와 위치와 능력으로 그 기준에 이르지 못한, 또는 도달치 못하는 이들을 비정상으로 규정하였다. 그렇게 비정상’이라 정의된 그들을 자기들 세상에서 따돌리고 소외시켜 왕따를 놓았다.

 

2. 세상을 거슬러 살기

그것을 작가 파울로는 정신병원에 수용되는 존재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런 것이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의 당연한 속성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간들이 그 정상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고자, 쫓겨나지 않고자, '비정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자기들 전 인생들을 걸고 산다. 오염된 아담 안에서 태어난 인간들 모두가 그런 삶의 공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의인이 없으되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사람들만이 그런 세상 삶의 공식에서 벗어나 산다. 성령의 능력으로 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일반 사람들 보기에 이런 사람들은 미친 사람들로 보일 수 있다. 가히 그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는 공식은 힘의 원리로 사는 그들과 정반대인 하늘 원리로서 산다. 그렇게 세상에서 구별된 이들은 마치 정신병원에 갇힌 것에 비유될 만큼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추구하였고 또 실제로 그렇게 산다. 성경은 그런 삶을 가리켜 ‘거룩함’ 또는 구별됨이라고 하였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그런 상태를 빚진 자라고 표현하였다.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자신이 모든 사람에게 빚을 진 자라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말이야말로 정신병원에 갇히기로 적합한 언급이다. 도대체 그가 일반 사람들에게 무슨 빚을 졌다고 빚진 자라는 말인가? 그러나 바울의 그 말을 성경의 맥락에서 보면, ‘빚진 자’라는 인식조차 없는 인생들이 비정상일 수 있다. 여기 빚진 자라는 원어 ‘오페이레테스’는 ‘갚을 의무가 있는 죄인으로 법정에서 판결을 받은 사람을 뜻한다. 그러니 채무상환을 소홀히 하거나 거부하면 잡혀 가야 하니 그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빚진 자는 어떤 일을 해야 할 의무나 필연에 묶여 있는 신분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그런 처지로 사람들에게 빚진 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함부로 살 수가 없다. 반드시 해결해야 할 어떤 의무나 필연에 묶여 있는 인생이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누구에게인가 꼭 갚아야 하는 것, 그것이 복음이다. 바울의 고백처럼 그렇게 우리는 복음에 빚진 자’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로 그런 삶을 살아내도록 이끄신다. 내가 그렇게 살겠다는 결심을 하여 내 의지로 이행한다는 말이 아니다. 밖에서 나를 띠 두르고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이 끌고 간다는 말이다. 물론, 그 전도자의 삶, 그렇게 빚진 자로 사는 인생은 고되다. 정말 힘이 든다. 마치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연어들처럼 사투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바울의 말처럼, 그것이 우리의 삶이요 기독교인된 자들의 인생인 것을 말이다. 파울로의 소설식으로 표현하자면, 그 삶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비정상적이 삶이요 정신 나간 인생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는 그런 삶이 영생을 얻음에서 치루어야 할 마땅한 대가라 말씀하셨다. 이미 우리들은 세상의 허무함을 경험하였고 이 땅이 덧없음도 공감해 온 바 있다. 그러기에 그 사투 현장에서 오히려 성령의 은혜와 하늘 소망으로 기쁨을 경험하고 평안을 누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빚진 자로서 기뻐하기도 하고 평안을 느끼기도 하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친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3. 일하시는 성령 하나님

복음에 빚진 자라는 바울의 말은 단순히 전도하라’는 말이 아니요  선교하라는 명령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복음은 말로서만 되는 것이 아니요 글로서만 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복음은 우리 사는 삶에서 나온다. 그 사람의 삶을 보면서 저것이 정말 복음이지라는 사람들의 평가로 증명되는 것이다. 그런 삶은 우리의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연적이고 또 그렇게 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당신의 영으로 그렇게 살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런 현실을 어떻게 표현하였던가?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고전9:16) 여기 부득불이란 말에는 강제강압의 의미가 있다. 누가 우리를 띠 띠우고 강제로 끌고 간다는 말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복음 전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어 있기에 운명인 것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는 바울의 표현은 예언자 이사야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는 탄식이었다. 여기 ‘화로다’라는 탄식은 망자가 지옥문 앞에서 터트리는 비명소리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 함은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이 절박하게 외치는 소리일 만큼 중차대하고 심각한 사안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빚진 자의식으로 복음을 전하든, 부득이 주어진 현실에서 복음을 전하든, 내게 화가 있으리로다는 두려움으로 전하든 우리는 복음을 전하게 되어있다. 뒤집어 말하면 복음의 빚, 은혜의 빚을 진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입으로만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우리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끔 이끌고 만들어 간다는 말이다.

 

 그것이 내 삶에서 녹아 나오지 않을 때마다 ’오호라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는 탄식을 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만큼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 삶은 필연적이고 당위적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도 같은 취지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여기를 정확하게 다시 읽어보면, ‘내 증인이 되어라가 아니라 되리라’라는 말이다. ‘내 의지로 되어라가 아니고 하나님이 반드시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이 미친 세상에서 우리가 증인’으로 사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니었다. 그것은 명령이면서 동시에 약속이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약속한 것을 반드시 이루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미쳐 돌아가는 사람들의 이 세상에서 우리는 빚진 자의 삶,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그렇게 살도록 하나님이 이끄시고 만들어 내신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 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이같이 창화 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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