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0. 22. 15:10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삭이 가로되 내가 이제 늙어 어느 날 죽을는지 알지 못하노니 그런즉 네 기구 곧 전통과 활을 가지고 들에 가서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이삭이 그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리브가가 그 아들 야곱에게 일러 가로되 네 부친이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나로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좇아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염소의 좋은 새끼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부친을 위하여 그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네가 그것을 가져 네 부친께 드려서 그로 죽으시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창27:1~10)
성경에서 그리는 구원의 그림은 큰 자를 버리고 작은 자를 택하는 이야기들로 분명하게 나타난다. 여기 창세기의 이야기에서도 그렇다. 아버지는 하나님을 상징하기에 결과적으로 축복을 받은 야곱은 성도를 상징하고 에서는 세속 논리로 살아가는 자연인을 상징한다. 이 이야기는 누가복음의 맏아들과 탕자, 또는 창세기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와 같은 프레임이다.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 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아버지가 좋아하는 별미, 야곱에게는 그 아버지가 요구하는 별미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었다. 하지만 에서에게는 있었다. 그래서 자기 능력을 발휘하여 별미 만들 재료를 잡겠다고 활을 들고나갔다.. 그런데 그 과정에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며 사는 여인이 개입한다. 그녀는 이삭의 아내이자 에서와 야곱의 어머니 레베카였다.
1. 큰 자와 작은 자
성경에는 세상에서 ‘큰 자’가 천국에서는 ‘작은 자’로, 세상에서 ‘작은 자’는 천국에서 ‘큰 자’로 묘사되어왔다. 하나님이 작은 아들만 편애하는 것인가? 사냥 잘하는 에서, 집에서 성실을 다하는 듬직한 큰 아들, 동생을 쳐 죽일 만큼 강했던 형 가인,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이들을 택하지 않았다. 사냥도 못하는 무능한 야곱, 이름 뜻도 '속이는 자'임에도 그를 선택하였다. 집에서도 말썽 피워 인정도 받지 못했던 탕자를 택하였고 자기 방어도 제대로 못하는 아벨, 그 이름조차도 ‘별 것 없음’이었던 동생 아벨을 택하였다. 왜 하나님은 이런 루저들만 택하였던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려면 반드시 이런 루저들이 되어야 하는가? 정말 하나님께 부름 받으려면 현실 세상에서 성공하지 말아야 되는가?
그런 질문들은 성경을 제대로 읽지 못한, 또는 정확한 의도를 간과함에서 비릇되는 의구심들이다. 성경이 말한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 또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그 말들은 우리 인간에게 자기 수고를 자랑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자기 선함, 성적이나 능력으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세상에서 성공한 자라도 자기 의를 주장하지 않으면 택함 받은 자요, 세상에서 실패한 자라 할지라도 자기 의를 주장하면 버림받은 자이다. 에서, 가인, 맏아들은 자기 의를 주장할 만큼 유능했고 탁월했으며 용맹하였다. 반면에 야곱, 아벨, 탕자는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을 만큼 무능했고 문제 투성이었다. 하지만 야곱은 무능하여 에서처럼 사냥을 못하기에 도우미가 나섰다. 어머니 레베카가 그의 도우미였다. 인간의 구원은 자기 지식과 선행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함을 서사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자기 업적을 숭배한다. 그래서 성공을 추구하고 자기 계발과 발전에 몰두한다. 큰 자, 상징적으로 ‘장자’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아버지가, 아니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버지는, 아니 하나님은 그런 인생을 유기시키고 자기 능력을 주장치 않는, 또는 주장할 거리가 없는 인생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주었다. 노벨상이든 효행상이든 그 인간의 성공은 구원의 조건도, 자격도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구원에 실패할 수도 있다. 도저히 자기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인간, 그 절박한 밑바닥에서 자기 주제를 철저하게 자각하여 도움이 필요함을 깨친 인생, 하나님은 그런 인생들을 택하고 구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 이스라엘 12지파가 이 형편없는 사기꾼에게서 나온 것이다. 아버지 별미를 만들고자 열심히 사냥 나간 능력자 에서가 유기된 아이러니, 이것이 신의 구원 프레임이다.
2.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결정하니
이미 야곱과 에서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은 그들을 잉태한 베레카에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언약을 주었다. 인간의 행위 이전에 하나님의 택함이 먼저 있었다는 말이다. 그 같은 프레임은 이삭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런 일이 언약의 출발 가정인 아브라함 집안의 전통이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능력으로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생식능력이 완전히 죽었을 100살에 가서야 이삭을 얻었다. 야곱 아버지인 이삭 그 자신도 하나님의 무력자 선택 역사가 없었더라면 태어나지 못했을 인생이었다. 그러니 그러한 택함 받음의 전통을 지닌 이삭의 집안은 세상 상식이나 세속 능력을 기준으로 살면 안 되는 집안이었다. 그럼에도 이삭은 현실의 눈으로 보아 강한 아들에게 유업을 물려주려고 하였다. 솔직히 이런 양상들이 우리 인간의 본능인 것이다.
바로 그럴 때 ‘아니지, 그것은 아니야’ 하고 방해되는 일이 발생한다. 하나님의 개입이 레베카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레베카가 약한 야곱을 위해 총대를 메었다. 큰 아들이 미워서가 아니었다. 둘 다 쌍둥이였다. 다만 리브가는 하나님의 언약 수행자였다. 아버지가 원하는 별미를 만들 능력이 없는 약한 자 대신 그녀가 별미를 만들었다. 이 과정에 야곱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걸친 옷도 야곱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레베카가 형의 옷을 가져다 입혀주었다. 사실 ‘에서의 옷’에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다만 야곱이 스스로가 한 일이 없다는 말이다. 자기 수고를 조금이라도 내세우는 인생은 아버지의 나라에 들지 못함을 상징할 뿐이다. 그래서 혼인잔치 비유에서 주인이 준 옷을 안 입고 자기의 멋진 자기 옷을 입고 온 사람들이 잔치집에서 쫓겨났던 것이다. 쫓겨나 이를 갈았다 하니 분명 분한 것이 많았다. ‘내 옷도 괜찮은데, 왜 나를?’ 꽤나 자기 나름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고로 살아온 인생들이었기에 하늘의 초대에서 배제된 것이다.
야곱이 위장해서 형의 옷을 입고 아버지 앞에 섰을 때 이삭은 말했다. “음성은 야곱의 음성이나 손은 에서의 손이로다” 보지 못하면 듣는 귀가 더 발달되기 마련이다. 아버지는 그가 야곱인 줄 알고 있었다. 오늘도 하나님은 내가 누구인지 잘 안다. 그럼에도 나의 옷 따위에 관심 두지 않는다. ‘내 아들 예수의 옷 입고 왔구나. 통과!’ 이것이 구원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옷 보고 구원한다. 입은 옷은 내 옷이 아니라 예수의 옷이었다. 야곱은 형의 옷으로 언약을 이어받았지만 그 옷의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것을 우리는 인생을 사는 내내 겪는다. 왜 내 수고와 업적이 아니라 예수의 옷을 입고 가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이다. 그 구원에 필요하다면 우리를 생의 절벽 아래로 밀어내기도 한다. 그렇게 깨져서 자기 옷, 자기 의를 버리게 만든다. 하지만 그 자기 옷에 중독된 인생들은 좀처럼 그 옷을 버리지 못하니 하나님이 안타까이 볼뿐이다.
3. 구원, 그 이후
야곱이 하란에서 돌아오는 길의 얍복강가에서 천사 모습으로 나타난 하나님과 씨름하였다. 그 씨름에서 야곱이 굽히지 않았다. ‘자기’라는 우상을 섬기는 우리 인간들의 고집이 이처럼 대단하다. 절대 나를 포기 못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그를 죽여야 했다. 그래서 환도뼈를 쳤다. 환도뼈는 고환을 싸고 있는 골반 뼈, 자손 번창이라는 당시 인간들의 희망을 상징하는 부위였다. 하나님은 그 인간적 희망을 꺾은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새 이름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자'를 주었다. 이것은 고집불통, 나쁜 놈이란 뜻으로서 오명이었다. 그럼에도 오늘의 우리는 스스로를 '영적 이스라엘'이라 칭하며 그 오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스스로 신이 되어버린, 하나님에게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그 나를 죽이려고 내 안에 하나님의 영이 임한다. 그리고는 나에게, 우리에게 씨름을 선포한다. 출세지향적 속물성을 죽이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 바라기를 만들기 위해 필요하다면 환도뼈라도 치겠다고 말이다. 이런 것의 연속이 신앙생활이다.
야곱은 형을 만나 그 앞에 무릎 꿇었다. 그리고 '내 주여' 라고 불렀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고 예언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큰 자는 이 땅에서 '작은 자'의 삶을 살고 볼품없이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에서가 야곱을 섬기는 양상이 성경의 분명한 메시지이다. 하나님이 야곱을 장자로 택하였으니 그가 장자요 하나님 아들이며 장자들의 총회원이다.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손을 어긋나게 축복함에서도 같은 양상이 반복되었다. 아들 요셉이 제지하자 야곱은‘나도 안다. 그러니 막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며 강행하였다. 왜? 이 세상에서 큰 자는 하늘에서 작은 자이고 이 세상에서 작은 자가 하늘에서 큰 자이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탕자의 비유에서 '큰 자, 맏아들'은 아버지 말을 잘 듣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살았다. 하지만 바로 그 사람들의 인정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의 부당함을 따지는 월권으로 이끌었다. ‘아버지! 내가 아버지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왔는데 어찌 제게 이럴 수 있습니까? 이러면 안 되지요!’
둘째는 아버지 돈을 탕진하고 돌아왔다. 유대인들이 가장 경멸하는 동물인 돼지를 치는 인생이 되고자 자처하였다. 세상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것이다. 아버지의 노예가 되어 돌아왔고 집안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며 무릎 꿇었다. 즉, 죽으러 돌아온 것이요 ‘내가 죄인 중의 괴수’였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런 '작은 자, 바닥으로 내려간 자'가 천국에서 큰 사람이요 장자들의 총회에 참석할 맏이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말 잘 들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인생들에게 말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의롭게 살아왔다고,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스스로 여기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지칭한 것이다. 복음은 이런 것이다. 혹, 그러면 방종하여 함부로 살지 않겠나를 염려하는 이들이 있다. 아버지의 은혜를 아는 인간의 행위는 결코 인간 그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마무리
인간의 행위가 그렇게 대단한가? 바울은 자신이 자신이 율법의 모든 규례를 흠없이 행해 왔던 것을 배설물이라 했다. 그가 정말 흠이 없었을까? 아니다. 형식이나 절차상으로 흠이 없었다는 말이다. 선행과 봉사 활동들을 내놓으며 자랑하는 이들이 많은 오늘의 세상에서 우리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나의 삶을 내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우리는 다만 그 이끄심에 순종하며 산다. 그래서 우리를 성도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 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9: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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