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5. 22:00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출12:21-25)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선택이나 결정에 '남을 따라'하는 경향들이 다분하다. 식당 선택, 심지어 결혼과 출산까지도 남을 따라 하는 경우가 많다. 썰렁한 식당보다는 손님들이 북적이는 식당에 들어가고 불법 주차 지역이지만 다른 차들이 서 있으면 왠지 안심되어 주차한다. 영끌 주식과 부동산 패닉 바잉까지, 사회의 큰 흐름에서 나만 소외되거나 낙오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 원인이다. 오래 전,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뛰어난 것 중 하나가 흉내 내기라 하였다. 그래서 모방을 인간의 본능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늘 줄을 서 왔지만, 정작 왜 줄을 서야 하는지는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남들이 다 그리 하니 나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왠지 안 될 것 같은 불안으로 사는 약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다.
인간 욕망은 자율적이지 않고 타율적이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의 한 사회인류학자는 그렇게 보았다. 무엇이 되고자 하는, 혹은 무엇을 갖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자율적이 아니라 타율적이라는 것이다. 명품을 갖고 싶어 하는 욕망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욕망이 아니라 누군가가 가진 것을 보거나 광고를 통해 갖게 된 타율적 욕망이란 말이다. 결국 인간의 욕망리라는 것은 '모방 욕망'이라 하였다. 문제는 우리가 무언가를 욕망하게 만든 그 사람이 그 욕망 유발자임과 동시에 경쟁자, 나아가 방해자라는 점이다. 같은 욕망물을 두고 서로 경쟁해야 했다. 세상의 모든 폭력이 거기서 시작되었다. 모방 욕망이 모든 폭력의 씨앗, 즉 '본질적 폭력'이었다.
1. 반복되는 제사
그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버리는 대사건이 있었다. 예수 십자가 사건이었다. 이 십자가는 신에게 바치는 인간의 희생제물이 아니었다. 폭력으로 폭력을 덮은 인간의 거짓 제의를 고발하고 무고한 희생양에게 가하는 폭력을 끊는 사건이요 상징이었다. 요한은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불렀다.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옴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 세례 요한이 예수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불렀을 때는 두 가지 생각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유월절 어린 양'이다. 그가 예수를 보았을 때는 유월절이 가까울 시즌이었다. 유월절 제물로 바치고자 전국에서 많은 어린 양들이 예루살렘으로 이끌려오는 그 시기였다. 오래전, 히브리 노예로 이집트에서 탈출하던 날 저녁, 그들 집을 보호해 준 것은 유월절 어린 양의 피였다. 다른 하나로, 요한은 성전에서 매일 드려지는 어린양 번제를 생각하였다. 그는 제사장 사가랴의 아들이었다. 때문에 성전 예식과 제사를 잘 알고 있었다. 출29장에는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 여러 제사가 상세히 규정되어 있다. 그 중 하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일 년된 어린양 두 마리를 잡아 하나는 아침, 다른 하나는 저녁에 번제로 드림이었다.
성전이 존속하는 한 이 제사는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어떤 학자는 그것을 '레위인의 고역'이라 부를 정도였다. 심지어는 전쟁으로 예루살렘이 포위당해 아사에 이르렀을 때도 이 제사는 중단되지 않았다. 주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때까지 그들은 매일 이런 어린 양 번제를 드렸다. 그러니 제사장의 아들인 요한은 이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런 그가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 함은 아침과 저녁으로 매일 바치는 '성전의 어린양'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택한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모든 사람들을 죄에서 구할 희생물을 말한다.
2. 완전한 제물
당시 그리스-로마 세계는 피로 진동한 세계였다. 그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동물 제사가 중심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전들 근처에 도살장이 있었다. 이는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도 마찬가지였다. 제단의 계단에는 피비린내로 진동했고 성전 안뜰 번제단에서 동물을 태우는 역겨운 냄새로 코를 찔렀다. 유월절같은 유대인들의 명절에는 수천, 수만의 순례자들이 바치는 동물 제사로 성전 안은 동물들의 울부짖는 소리와 피비린내, 그리고 태우는 연기로 자욱했다. 이 제사에 들이는 비용도 만만찮았다. 그러니 유월절은 예루살렘 거주자들에게 큰 대목이었다. 대제사장 일당은 이 시즌의 희생제물을 판매하면서 막대한 이윤을 남겼다.
이런 희생제의가 인간 부정을 씻고 죄를 제거할 수 있을까? 성경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사람을 온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할 뿐이며 아예 하나님은 제사와 예물과 번제와 속죄제는 원하지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다고 선언한다. 대신, 하나님의 뜻을 행한 예수, 그가 위의 뜻을 따라 자기 몸을 단번에 드림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였고 죄를 위하여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만족시켰다고 선포한다. 그가 단 한 번의 제사로 우리를 온전케 했으니 우리가 죄 때문에 다시 제사 드릴 일에 없다. 이제는 그의 희생으로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우리에게 휘장 가운데로 열린 새 살 길로 자신있게 나아갈 신분이 되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동물의 피나 고기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원하는 제사는 당신 뜻에 순종함이었다.
구약 예언자들은 끊임없이 이 이야기를 하였다.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 예언자 미가도 이렇게 말했다."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6-8)"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이었다. 하늘의 정의와 사랑으로 사는 삶이다. 예수가 완전한 제물이라 함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따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제물이고 진짜 제사이다.
3. 폭력의 종식
고대사회의 희생제는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함이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폭력으로 폭력을 막는 사회유지장치였다. 한 사회가 갈등과 폭력으로 위기에 처하면 그 타개책으로 시선을 외부로 돌려 해결함이 전쟁이었고 내부적 해결로는 그 위기의 책임자로 어느 한 사람이나 집단을 지목하였다. 그래서 그 사회의 상호폭력을 그에게 집중시켜 다시 평온을 회복한다. 소위 '희생양 메카니즘'이다. 이 메카니즘이 작동하면 사람들이 하이에나가 되어 물어뜯다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이 희생양 메커니즘이 성경에도 나온다. 예수 당시의 유대사회도 반목과 갈등과 폭력이 일상이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희생제물이 필요했었다. 예수를 처형함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에서 이 사실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요18:14)’였다. 그는 성전에서 희생제물을 팔고 사는 것에 맞서 소란을 피운 예수를 죽여 기존 질서와 평온을 회복하려 했다.
그런데 인류의 모든 희생적 제사와 성경이 말하는 예수의 희생, 곧 그의 십자가 사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인류의 모든 신화에서 집단폭력의 희생제물은 '죄인'이었다. 그러나 하늘 뜻을 이루고자 희생제물이 된 예수는 '무고한 존재'였다. 모든 신화에서는 박해를 가한 자에게 죄가 없고 희생된 자에게만 죄가 있다. 그러니 자신들의 폭력을 신성하고 정당하다 여겼다. 하지만 성경은 십자가 사건에서 희생된 예수를 무죄라고 선언한다."그에게는 죄가 없었다(요일3:5)" 예수는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벧전3:18)"는 것이다. 이는 예수처럼 무고하게 고난받는 이 땅의 모든 희생양이 무죄라는 선언이다. 오늘의 세상 폭력은 '구조적 폭력'이다. 그 폭력들은 대부분 사회적 약자나 취약층에게 가해진다.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 더 무차별적으로 가해진다. 강자를 숭배하고 약자를 혐오하는 세상에서 이 폭력 기술은 진화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모든 폭력을 근본적으로 종식시키고 이 땅의 모든 무고한 자들을 향한 손가락질을 멈추게 할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는 한물간 신앙이 아니요 빗바랜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지켜나가야 할 가치요 최고의 진주이다. 세상에 성스러운 폭력이란 없다. 모든 폭력은 그 자체로서 악이다. 예수는 이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손과 발에 못을 치는 이들에게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기도하였다. 그 숭고한 평화로 폭력을 이겼고 그것의 뿌리를 뽑았다. 그래서 우리가 "그는 우리의 화평이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엡2:14-16)"고 고백하게 되었다. 완전한 제물로, 진짜 제사를 드리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마무리
동물의 피나 무고한 희생양의 피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그 앞에 드린 ‘한 영원한 제사’로 우리는 생명 길을 얻었다. 예수를 죽게 한 악의 뿌리, 곧 사탄은 저 밖에 있는 어떤 유령이 아니었다. 내 안에 있는 욕심이었다. 자족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여 늘 비교하고 절망하던 우리들 이기심이었다. 동물의 피가 아닌, 약하고 무고한 이웃의 피가 아닌, 세상 모든 죄를 지고 우리를 위해 희생한 예수의 피로 완전한 제물과 진짜 제사로 사는 우리를 하나님은 원하신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은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히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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