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6. 5. 21:33ㆍ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7~10)
기독교인들의 담론에는 빈번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어휘가 등장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다른 말로, 기독교인의 인생 목적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크고 어마한 일을 하는 것으로서인가? 아니면 모두가 부러워 할 만한 성공으로서인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란 그런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1. 인생의 존재 목적
우리는 왜 사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 많은 현인들이 숙고했고 많은 인문학자들이 연구하고 숙고하며 고민했지만 아직까지도 뚜렷한 결론을 짓지 못하고 있다. 다만, 성경은 이 문제에서 확신에 찬 대답을 내놓고 있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 인간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드러내며 살도록 창조되었다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과 온유와 화평, 그리고 절제와 겸손과 오래 참음을 보이는 삶으로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 보이는 것, 나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주는 것이다. “내 백성은 나의 영광을 빛내려고 창조하였나니”(사43:7)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분명하다. 내가 빛을 내고 내 영광을 드러내려 함이 아니다. 하나님의 빛을 내고 그의 영광을 드러냄이 창조된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도 내 삶에 그분의 성품을 보여 그들도 하나님에게로 돌아오게 한다.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요15:8) 과실을 많이 맺음은 하나님 성품을 삶에서 잘 드러냄이다.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이 영광받는다. 이것이 우리를 창조한 목적이요 인생의 존재 이유이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우리의 그러한 삶, 착한 행실이 곧 신의 성품인데 문제는 교회에서, 또 세상에서 번번히 나를 드러내려고 하는 데서 야기된다. 나는 질그릇이고 내 안의 보배인 신의 성품이 드러나야 하는데 오염된 우리 본능이 '내가 드러나도록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셔야 한다'고 전제하고 기도하였으니 근본부터 문제였던 것이다.
분명, 기독교는 세상 종교들과 다르다. 내 능력과 성공을 얻고자 절대자를 의지하는 세상의 여타 종교들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오히려 내가 약할 그 때에 하나님의 강하심이 드러나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특색이요 본질이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12:9~10)
2. 나의 약함과 하나님의 강함
성경에서의 ‘약함’은 ‘가난하고 힘없는’ 세상적 기준의 약함이 아니다. 내가 힘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요 소유의 과다 문제도 아니다. 내 가진 힘이 크거나 작거나에 상관없이, 내 능력을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것, 그것이 ‘약함’의 뜻이다. 여기 ‘하나님의 능력’은 인격적인 힘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말한다. 자기 힘을 동원하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동원하는 이들이 ‘약한 자들’이다. 나를 위해 내 힘을 쓰지 않고 우리를 위해 그 하나님 힘을 동원했던 예수의 삶과 성품, 그 예수의 방식으로 사는 것이 ‘약한 자’의 삶이다. 주어진 상황에서 나를 죽이고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게 하는 것이 약함이요 그런 처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다. 오늘의 많은 교인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하고 기도들, '남부럽지 않는, 남에게 뒤쳐지지 않는 강한 힘’을 구하는 기도들, 이는 기독교의 본질을 오해한 무지에서 비릇된 기도들이다.
교인들이, 교회들이 세상에 강함을 보여주려 애를 쓴다. 물리적 힘을 발휘해야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제가 하나님 일을 도와드릴 테니 이번 일만 성공하게 해 주세요! 그러면 한번 멋지게 헌신하고 거하게(헌금) 한 번 쏘겠습니다!’ 흥정인지 호소인지 탄원인지 이런 식의 기도를 부끄러운 줄도 모른채 내뱉는다. 신앙은 강한 힘으로 사는 게 아닌데, 항복하며 사는 것인데도 말이다. 왜 하나님이 굳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던가? “너희가 수효가 적은 연고로”(신7:7) 하나님이 들어 쓰는 사람이나 민족은 자신을 비워 스스로 약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힘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에, 시퍼렇게 살아 펄펄 뛰던 나를 그분께 항복시키는 것, 이것이 기독교이다.
신앙은 내가 소유한 지식이나 물질, 지위로 평가되지 않는다. 또한 평가되어서도 안 된다. 부자이건 가난한 이건 하나님 앞에 나를 비워내고 항복해야 한다. 기독교의 인생관과 가치관은 세상이 정의하고 있는 것과 반대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맡기는 연습의 삶, 그렇게 자신을 죽이고 하늘 성품을 드러내는 삶으로 세상에 하나님을 전한다. 그리고 그 방식 또한 힘이 아니라 자기 비움이다. 그래서 힘에 의해 전파되었던 서구제국주의 복음은 모조리 실패로 끝났다. 기독교 식민주의가 실패한 그 자리들, 아프리카나 중동 등에 오늘날 이슬람이 득세함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힘으로 전파되는 것이 아니었다. 예수는 이런 삶의 방식에 완벽한 모델이었다. 그 예수가 오늘의 우리를 향하여 말한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이다.
3. 고난의 이유
기독교인이 믿음으로 살며 겪는 어려움에는 이유가 있다 이 땅에 죽고자 왔던 예수를 보라. 그냥 쉽게 죽었으면 될 것을 굳이 고난이라는 과정을 겪어야만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왜 공생애 3년 동안 배반, 수모, 고난까지 참담하게 겪어야 했던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고단한 삶의 여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정한 뜻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히2:10) 예수가 고난을 통해 온전하게 되셨다니? 이전에 뭔가 부족한 분이었는데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인가? 예수는 영원 전부터 온전하였다. 그럼에도 고난과 수난을 통과해서 온전하게 되었다 함은 하나님이 예수께 시킨 일, 그 사역이 고난을 통해서 온전하게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고난은 하나님이 이미 정한 뜻이었다. 이 말은 반드시 그것을 통과해야 하나님의 정한 뜻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정한 뜻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어려움은 신의 성품을 드러낼 기회이다. 예수는 자기를 돌로 치려는 자들에게 사랑과 용서와 인내라는 신의 성품을 보였다. 나아가 자기를 절벽에 밀치려 했던 사람까지도 품었다. 이런 성품으로 원수들을 대함이 고난이다. 물질적 삶, 성공추구, 쾌락적 삶과 세상을 살다 보니 고난은 망하고 가난해지고 실패하는 것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이 정의는 어렵다.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 우리로 당신께 영광을 돌리는 삶으로 쉽지 않은 여정을 준다. 예수가 자기를 비우고 하늘 성품을 나타내는 삶을 살고 갔더니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였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를 그 자리로 부른다. 나를 비우고 죽여 내 안에 있는 당신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당신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 그러니 그 여정이 어려움이고 그 고난이 하나님의 정한 뜻을 이룬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오늘도 당신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은 교회와 우리들에게 고통의 시간들, 어려운 삶의 여정을 허락하고 있다. 그 과정을 통한 목적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4:3) 우리의 거룩으로 그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의 거룩은 삶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거룩한 자들이 사는 법이다.
마무리
여전히 ‘힘의 논리’를 포기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 그러니 이 세상에서 나라 사이의 전쟁이 끊이지 않고 개인 사이의 권력 다툼이 계속 되고 있다. 그런 세상에 마구간에 출생하여 꼴찌 인생을 살다가 볼품없는 나귀를 타고 입성하여 당시 세상에서 가장 약한 꼴찌로 죽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 예수를 추앙하여 탄생한 기독교는 힘의 논리를 따르지 않는다. 힘의 논리가 판을 치는 세상에 왔던 하나님은 몸소 평화의 논리를 펼치고 보여 주었다. 약하나 하늘 성품을 드러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들, 그들로 하늘 뜻을 성취시켜 나가는 삶의 방식, 그것이 거룩한 자들이 사는 법이다.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가라사대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히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시니라"(사5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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