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오신 하나님

2022. 1. 23. 18:48인문, 철학, 신학 그리고 성경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말하며 지극히 높으신 자의 지식을 아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내가 그를 보아도 이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 일어나서 모압을 이편에서 저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민24:15-19)

 

터키의 미라라는 작은 도시성 니콜라스라는 교회가 있었다. 산타클로스의 기원으로 알려진 세인트 니콜라스는 3세기경 이 교회의 주교였다. 그는 상속 재산이 많은 부자였으나 그 재산을 이웃에게 나눠주고 평생 어려운 이들을 도우며 살았다. 굳이 자기 선행을 알리고 싶지 않았던 그는 어느 날 가난한 집 굴뚝으로 동전 주머니를 던져 넣었는데 하필 그 주머니가 그날 난롯불에 걸어말리던 양말 속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성탄 선물을 양말에 넣는 관습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산타가 아니라 메시아로

매년 맞이하는 성탄절은 산타클로스와 선물이 화두가 되는 시즌이다. 그러나 성탄은 산타가 아니라 메시아가 오시는 날이다. 어둠 속에서 구원의 빛을 기다려온 날이다. 구원의 빛을 기다림은 지금 이곳이 구원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빛을 기다림은 이 세상이 어둡다는 말이다. 어둠의 고통이 큰 만큼 빛을 기다리는 마음 또한 간절해지다. 생명의 빛으로 오시는 메시아를 만나는 기쁨은 그 기다림의 깊이만큼 커진다. 오래전에도 그 빛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동방박사들도 그중 한 무리였다. 복음서 중 마태가 동방으로부터 온 박사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 동방은 별자리 연구가 활발했던 페르시아였다. 메시아가 탄생 장소를 정확히 찾아온 그들은 천체 운행을 살펴온 점성학자들이었다.

 

메시아 출현은 당시 유대인뿐만 아니라 다른 민족들도 큰 관심사였었다. 동방으로부터 어떤 지배자가 나타나 세상을 다스릴 것임을 그들도 기대하여왔었다. "동쪽 산"(민23:7)에서 온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대신에 축복을 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올 것이고 한 통치 지팡이가 이스라엘에서 일어설 것이다"(민24:7)라는 신탁을 하였었다. 그후, 이 신탁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되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백성이 앗시리아와 바빌론의 포로로 끌려가 근동 각지에 흩어지면서 이 예언도 함께 전해졌다. 동방 박사들도 수백 년 전의 이 예언을 그렇게 전해 들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별의 심상찮은 움직임을 보고 메시아 탄생의 예언을 확인코자 박사들이 그 먼 순례길을 떠나왔던 것이다.

 

하지만 동방박사들의 방문에 헤롯은 긴장하였다. 로마 권력에 기대어 유대 지역 왕으로 임명받은 그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는가?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라고 말하는 박사들 말에 불안하였다. 그는 교활하고 잔인한 통치자였다. 권력을 위협하는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았기에 자기 두 아들까지 죽였던 폭군이었다. 헤롯은 대제사장과 서기관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느냐"라고" 물었다. 분명,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았는데 헤롯은 '그리스도'로 바꾸어 물었다. 권좌에서 밀려날까 두려웠던 그는 옛날 이집트의 파라오가 모세 출생 , 히브리 남자 아기들을 다 죽였듯,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의 두 살 아래 모든 사내아기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때를 기준하여 죽이라 명하였다.

 

어떤 왕으로 오시나 

이런 상황에서 마태는 예수가 어떤 ''인지를 구약 미5:2를 인용하며 선포하였다.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라" 이 구절에 비밀이 있다. 분명 미5:2를 인용하였는데 본문은 구약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다. 정작, 구약 본문은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이다. 여기 '다스리다'라는 말이 <70인역>에서 '아르콘타'인데 마태는 그 용어를 굳이 '헤구메누스'로 바꾸었다. '아르콘타'나 '헤구메노스' 모두 '통치자'이다. 하지만 동사로 바꾸면 뜻이 달라진다. '아르콘타'는 '다스리다'라는 의미를 갖지만 '헤구메노스'는 '인도하다'라는 뜻으로 둘의 차이는 크다.

 

마태는 헤롯 통치와 메시아 통치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고자 의도적으로 다른 단어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진정 '유대인의 왕'은 헤롯이 아니라 양을 치는 '이스라엘의 목자'라는 말이다. 힘과 압박으로 '다스리는' 헤롯과 같은 왕이 아니라 양떼와 같은 이스라엘 백성을 선한 길로 '인도하는' 목자(시79:13) 같은 인도자라는 것이다. 실로, 우리에게 오신 메시아는 군림하고 굴종시키는 통치자가 아니었다. 섬김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선한 목자이었다.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었다. 진정한 목자는 양떼를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고 위험으로부터 지키며 그 양들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놓는다. 그런 왕, 그런 목자와 같은 선한 통치자가 2021년전, 우리가 사는 이 땅에 오셨다.

 

그러니 동방박사 이야기는 이스라엘에서 한 왕이 나서 인류 보편의 희망이 성취되었음을 선포하는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 '유대인의 왕, 한 다스리는 자, 이스라엘의 목자'는 하늘 약속이 성취된 메시아이다. 세상 권력자인 로마 황제의 다스림이 아니라 절대 사랑이고 생명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선포하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성탄절의 은혜이다. 2,500년 전 노자는 말했다. <산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강물이 되어 바다로 끊임없이 흐르는 이유는 바다가 강물의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하여 바다가 모든 강물을 지배함은 모든 강물이 언제나 바다에 모이기 때문이라> 성탄은 이런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된 사건이다. 저 위 높은 곳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낮고 낮은 땅 우리 가운데 거하신 이 사건은 하늘에서 내려와 죽기까지 자기를 비워 하늘 뜻을 이루고 우리를 구하시는 메시아가 탄생했음을 알리는 복된 소식이다.

 

어떤 모습으로 오시나

성탄의 신비는 또 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사9:1). 메시아 예언으로 불리는 유명한 말씀이다. 이사야는 어둠에서 고통받던 이들에게서 그 어둠이 걷힐 날이 올 것을, 희망 없는 땅에 사는 이들에게 희망의 빛이 비칠 것을 예고하였다. 그리고 새 통치자가 와 그들을 내리누르던 멍에를 부수고 그 짓누르던 압제자의 몽둥이를 꺾을 것이라 약속하였다. 그런 이스라엘을 절망과 어둠에서 구해줄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 얼마나 큰 능력과 찬란한 영광채로 오실까? 그러나 뜻밖이었다. 그 메시아는 '한 아기'로 오셨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사9:2~3).

 

용포에 싸여 요람에 누운 황태자가 아니라 누추한 포대기에 싸여 구유 위에 누인 아기라니? 온갖 영웅들을 소환해도 감당할 수 없을 구원 역사에 겨우 한 아기라니? 세상 구원은커녕 제 한 몸조차 스스로 가눌 수 없는 약한 아기의 모습이라니? 그러나 이 아기가 성탄의 은총이었다. 세상의 구원자가 어머니의 사랑과 돌봄이 필요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감싸주고 보듬어 안아주고 사랑해야 할 한 아기,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은 인간 어머니의 손길과 돌봄에 당신을 맡기신 것이다. 구원은 주저앉아서 받는 구호품이 아니요 황제의 하사품도 아니었다. 우리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방적인 수혜자나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로 만드는 것도 아니었다. 구원은 생명을 지키고 사랑하며 나누는 사람으로 일으켜 세움이었다. 그러니 성탄은 우리 삶의 고난에 참여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의 사건이요 우리의 탄식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연대이다. 그래서 혹, 코로나 성탄절에 다시 오신다면 필경 방역 마스크를 쓰고 오신다.

 

우리 고난에 참여하시는 메시아이시다. 1년 내내 마스크를 벗지 못하고 성탄절이 되어도 예배당에 모이지 못한 채, 거리두기 조치라도 발동되면 이 엄동설한에 살기 막막한 사람들의 어려움에 동참하시려고 우리처럼 마스크를 쓰고 오신다. 성탄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의 고통과 아픔 속으로 들어오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우리를 믿고 격려하시며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찾아오신 사건인 것이다. 누가에 의하면, 천사로부터 메시아 탄생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이들이 목자들이었다.(눅2:8-20) 오랜 시간 집을 떠나 거친 광야에서 지내야 했고 벌이도 적어 살림이 궁핍했던 그 목자들은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고 있었으니 밤에도 일했다. 그런데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그들에게 메시아 탄생의 기쁜 소식이 가장 먼저 전해졌다. 메시아는 이런 이들에게 먼저 찾아오신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하게 사는 이들에게 구원의 복음이 먼저 전해지는 것이다.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마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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